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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성가정의 비밀 3 - 가난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08-12-27 조회수761 추천수8 반대(0) 신고

 

 

 

성가정의 비밀 3 - 가난

 

오늘은 정말로 성가정 대축일입니다. 이틀 동안 ‘순종’과 ‘정결’을 통해 성가정의 의미를 묵상해 보았는데 오늘은 복음삼덕의 마지막인 ‘가난’에 비추어 성가정의 의미를 묵상해 보겠습니다.

 

제가 서울 한 무료급식소에서 봉사활동을 할 때였습니다. 두 분의 행려자들이 식사를 하시고 나와서 심하게 다투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원인은 한 행려자가 다른 사람의 신문을 들고나간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신문이 이불과도 같기 때문에 매우 귀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신문만 잔뜩 모아서 들고 다니기도 합니다. 그 많은 것 중에 하나를 뽑아 간 것인데 그 난리가 난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신문을 하나 주겠다고 해도 해결되지가 않았습니다. 아마 자존심까지 손상을 입었는지 그 신문을 돌려받아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런 장면을 보면서 ‘어쩌면 행려자들도 가난한 사람들이 아닐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작은 것들에 지독하게 ‘집착’을 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성경에서 예수님께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부어드린 여인이 그 사람들보다 더 가난할 수 있겠다.’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수천 만원하는 향유를 한 번에 예수님께 발라드린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유다가 매우 화를 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팔면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는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돈에 집착하는 도둑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돈에 더 집착한 사람은 그 여인이 아니라 유다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가난’이란 ‘집착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첫 인간의 후손인 카인은 아벨이 부유하게 되자 질투하여 들판에서 그를 살해합니다. 이 집착과 욕심은 개인은 물론이요 가족 안에서도 발견될 수 있습니다. 세상 것에의 집착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줄어들게 합니다. 우리는 ‘사랑’과 ‘집착’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사랑’은 ‘자유’를 주지만 ‘집착’은 강제로 ‘소유’하려는 마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요셉성인과 성모님에 의해 성전에서 봉헌되십니다. 봉헌은 세상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다 주님 것임을 고백하는 신앙행위입니다. 세상 모든 것도 마찬가지지만 자녀도 사실 나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저는 삼형제 중 막내입니다. 형 둘이 아마 부모님이 원하시는 대로 되지 못해서인지 부모님이 저에게 거는 기대가 크셨습니다. 저도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나름대로는 부모님 말씀을 잘 따르는 아이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사춘기 때 즐겨 불렀던 노래가 민해경의 ‘내 인생은 나의 것’이란 노래였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은 나의 것

그냥 나에게 맡겨 주세요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은 나의 것

나는 모든 걸 책임질 수 있어요

 

사랑하는 어머니 부모님은 나에게

너무도 많은 것을 원하셨어요

때로는 감당하기 어려웠지만 따라야 했었지요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았고

하지 말라는 일은 삼가했기에

언제나 나는 얌전하다고 칭찬받는 아이였지요

 

그것이 기쁘셨나요

화초처럼 기르시면서

부모님의 뜻대로 된다고 생각하셨나요

그러나 이제 말하겠어요

부모님의 사랑을 다 주셨지만

나는 아직도 아쉬워하는데

 

이렇게 그늘진 나의 마음을 그냥 버려두지 마세요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은 나의 것

그냥 나에게 맡겨 주세요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은 나의 것

나는 모든 걸 책임질 수 있어요

 

 

부모님이 부모님이 살아오신 그 길이

나의 인생은 될 수 없어요

시대는 언제나 가고 가는 것

모든 것이 달라졌어요

부모님의 어린 시절을 다시 돌아보세요

그때는 아쉬운 마음이 없으셨나요

나는 이미 알고 있어요

부모님이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랑인줄을

나는 알아요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도 부모님은 알아주세요”

 

부모님이 아이들의 삶을 마치 자신들이 못살았던 것을 대신 살아주어야 하는 듯이, 혹은 자신들이 살았던 대로 살아야 하는 것처럼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부모님도 부모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자녀에게도 자녀가 선택해서 살아야 할 자유를 주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요?

물론 이것이 그들을 전혀 터치하니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도 항상 우리가 좋은 길로 가도록 이끌어 주시지만 우리의 자유를 강요하지 않는 것처럼 자녀들에게도 좋은 길을 가르쳐주기는 할지라도 강요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아들이 죽으러 나가는 것을 뻔히 알고도 아들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삶이 아들이 가야하는 삶이기 때문이고 아들이 선택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자녀를 하느님께 봉헌했다고 나몰라라 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라 오히려 당신 모든 것들을 자녀를 위해 바치실 줄 아셨습니다.

갑자기 이집트로 떠나라는 주님의 명령에 성가정은 나자렛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집과 모든 것을 남겨둔 채 그날 밤으로 이집트로 떠났습니다. 만약 재물에 집착했더라면 나자렛으로 다시 내려가서 짐을 챙기는 시간에 헤로데에게 잡혀 죽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과연 사람이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불교는 이 ‘비움(空)’이 바로 해탈의 경지라 합니다. 그러나 비워지기만 해서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의 집착이 사라지면 정말 행복할까요? 비워있는 항아리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 안에 귀중한 것으로 채우기 위해서 비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베들레헴의 마구간은 이 빈 항아리였습니다. 비워졌으니, 그렇게 가난해 졌으니 아기 예수님께서 들어와 쉬시게 된 것입니다. 사실 마음은 가장 가난해졌지만 하느님으로 채웠으니 세상 누구보다도 큰 부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비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채우기 위해 비우는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만으로는 성가정이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의 가난을 예수님으로 채웠기에 예수님을 통하여 요셉과 마리아가 참 부부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가정은 바로 남, 녀가 만나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함께 나아가는 기찻길과 같습니다. 함께 하지만 결코 만나서 혼합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위로 기차가 지나갈 때 그 기차가 두 길을 하나로 이어줍니다.

기차는 성령님, 곧 사랑이 되겠지요. 사랑은 더 멀어지지도 더 가까워져 혼합되지도 않게 하며 하나로 결합시켜줍니다. 바로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혼합되지 않으면서도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는 원리와 같습니다.

 

성가정은 자녀가 있어서 자녀를 통하여 부부가 하나 되는 가정이 아닙니다. 한 쌍의 남, 여와 예수님만으로 충분합니다. 부부의 비움 안에 예수님께서 들어와 사신다면 그것이 성가정입니다.

 

가정에도 질서가 있어야 하기에 순종이 필요하고, 욕망이 아닌 참 사랑을 위해 정결이 필요하며, 그리스도를 모시기 위해 가난이 필요하다는 것을 삼일에 걸쳐 묵상해 보았습니다. 모든 가정이 이 세상에서는 물론이요 천상까지 이어지는 성가정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로마에 유학 중이신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복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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