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창세기(11) 카인의 후손 셋의 후손 (창세4,10-26)
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3-04-07 조회수482 추천수2 반대(0) 신고

 

 

 구약시대의 카인의 후예들이 준동하는 현실의 책임은 누가져야 하는가 ? 1. 인간창조 - 14. 인간 역사의 시작

 

창세기(11) 2023. 4. 8.

 

카인의 후손, 셋의 후손

 

(창세4,10-26)

10 그러자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 들어 보아라.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11 이제 너는 저주를 받아, 입을 벌려 네 손에서 네 아우의 피를 받아 낸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이다. 12 네가 땅을 부쳐도, 그것이 너에게 더 이상 수확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될 것이다.” 13 카인이 주님께 아뢰었다. “그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에 너무나 큽니다. 14 당신께서 오늘 저를 이 땅에서 쫓아내시니, 저는 당신 앞에서 몸을 숨겨야 하고,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되어, 만나는 자마다 저를 죽이려 할 것입니다.” 15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아니다. 카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나 일곱 갑절로 앙갚음을 받을 것이다.” 그런 다음 주님께서는 카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

16 카인은 주님 앞에서 물러 나와 에덴의 동쪽 놋 땅에 살았다. 17 카인이 자기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니, 그 여자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았다. 카인은 성읍 하나를 세우고, 자기 아들의 이름을 따라 그 성읍의 이름을 에녹이라 하였다. 18 에녹에게서 이랏이 태어났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투사엘을 낳고, 므투사엘은 라멕을 낳았다. 19 라멕은 아내를 둘 얻었는데, 한 아내의 이름은 아다이고 다른 아내의 이름은 칠라였다. 20 아다는 야발을 낳았는데, 그는 집짐승을 치며 천막에 사는 이들의 조상이 되었다. 21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인데, 그는 비파와 피리를 다루는 모든 이의 조상이 되었다. 22 칠라도 투발 카인을 낳았는데, 그는 구리와 쇠로 된 온갖 도구를 만드는 이였다. 그리고 투발 카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다. 23 라멕이 자기 아내들에게 말하였다. “아다야, 칠라야, 내 소리를 들어라. 라멕의 아내들아, 내 말에 귀를 기울여라. 나는 내 상처 하나에 사람 하나를, 내 생채기 하나에 아이 하나를 죽였다. 24 카인을 해친 자가 일곱 갑절로 앙갚음을 받는다면 라멕을 해친 자는 일흔일곱 갑절로 앙갚음을 받는다.”

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니, 그 여자가 아들을 낳고는, “카인이 아벨을 죽여 버려, 하느님께서 그 대신 다른 자식 하나를 나에게 세워 주셨구나.” 하면서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 26 셋에게서도 아들이 태어나자, 그는 아들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기 시작하였다.

 

인간이 범죄 한 후에 하느님께서는 창세기315절에서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최초의 복음에 관한 약속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지만 사탄의 머리를 부수고 이기실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또 이 말씀에서 여자의 후손은 하느님의 택하신 백성이고, 뱀의 후손은 하느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대적(對敵)하는 무리들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여자의 후손인 하느님의 택하신 백성들과 뱀의 후손들과의 끊임없는 영적인 전쟁터입니다.

그래서 뱀의 후손들은 끊임없이 여자의 후손인 하느님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고난(苦難)을 줍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택하신 백성들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사실을 창세기315절은 우리에게 말씀을 해 주고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백성들은 뱀의 후손인 애굽의 파라오를 통해서 끊임없는 고난과 고통을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들을 물리치시고 이기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백성들은 가나안땅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가나안은 함의 아들입니다. 함은 뱀의 후손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백성들은 셈의 자손들로 여자의 후손 즉 하느님의 택하신 백성들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들어갈 가나안땅에도 여전히 뱀의 후손들로 인한 고난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것을 창세기 315절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하와는 카인이 여자의 후손으로 하느님의 택하신 백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카인은 여자의 후손에게 고난을 주는 뱀의 후손이었습니다. 반대로 아벨이 여자의 후손으로 하느님의 택하신 백성이었습니다.

뱀의 후손인가 여자의 후손인가는 예배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카인은 아담의 원죄를 가진 죄인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카인은 자신이 하느님과 같이 되어서 하느님조차도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카인의 예배를 받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벨은 제물과 함께 그 자신이 죽었음을 믿는 믿음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가 하느님이 받으시는 참된 예배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내가 죽었음으로 믿음으로 예배를 하는 자가 여자의 후손이고 하느님의 택하신 백성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그 십자가에서 나의 옛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믿고, 죄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자아(自我)에 대해서 죽은 자로 여기고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가 됩시다.

미움은 뱀의 후손의 모습이고 사랑은 여자의 후손 하느님의 백성의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사랑으로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聖徒)가 됩시다.

오늘 본문은 뱀의 후손으로 카인의 족보(族譜)가 나옵니다. 또 오늘 본문 뒤에 있는 창세기 5장은 여자의 후손으로 셋의 족보가 나옵니다.

뱀의 후손으로 카인의 족보는 이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여자의 후손으로 셋의 족보는 여자의 후손으로 하느님의 백성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부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카인의 후손들을 하느님에게서 도피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세4,16) 16 카인은 주님(야훼) 앞에서 물러 나와 에덴의 동쪽 놋 땅에 살았다.

 

카인은 야훼 앞을 떠나서 에덴의 동쪽인 놋 땅에 거주(居住)합니다.

주님(야훼) 앞이란 하느님의 얼굴 앞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야훼 하느님의 얼굴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였다고 하는데, 이라는 이름이 유리(遊離)하다, 방황(彷徨)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유리(遊離)하다 방황(彷徨)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카인이 왜 주님 앞을 떠나서 유리하고 방황하다는 뜻의 놋 땅에 거주하게 된 것이 하느님께서 카인을 쫓아내었기 때문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카인이 범죄 한 후에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보기 바랍니다.

 

(창세4,12) 12 네가 땅을 부쳐도, 그것이 너에게 더 이상 수확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될 것이다.”

 

여기서 범죄 한 카인에게 주신 형벌이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효력을 네게 주지 못하고 너는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될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땅에서 소출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너는 땅에서 피하여 떠도는(遊離) 자가 되리라는, 어느 한 땅에서 정착하여 살지 못하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단순히 이 땅에서 피하여 떠도는 자가 될지라도 했습니다. 그런데 14절에서는 카인이~

 

(창세4,14) “그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에 너무나 큽니다. 당신께서 오늘 저를 이 땅에서 쫓아내시니, 저는 당신 앞에서 몸을 숨겨야 하고,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되어, 만나는 자마다 저를 죽이려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땅에서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땅에서 방황(彷徨)하는 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시는데, 카인은 하느님께 대하여도 하느님의 얼굴을 뵙지 못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16절을 다시 보면~

 

(창세4,16) 16 카인은 주님(야훼) 앞에서 물러 나와 에덴의 동쪽 놋 땅에 살았다.

 

하느님은 이 땅에서만 떠나라 했는데 카인은 야훼 앞을 떠나서 하느님에 대해서 방황하다는 뜻에서 땅에 거주합니다.

이것은 마치 집에서 형이 아우를 죽였습니다. 아버지가 이제 네가 더 이상 이 집에서는 살 수 없어서 이 집에서 떠나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집만 떠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형은 그 집만 아니라 아버지와의 모든 관계를 끊고 아버지의 품을 완전히 떠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카인의 후손들인 이 세상 사람들은 지금도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느님 앞을 떠나서 하느님에 대해서 떠돌고 방황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도피하여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이 없다고 합니까? 카인의 후손 즉 이 세상 사람들이라고 해서 하느님께서 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이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을 떠나고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어리석게도 마음가운데 하느님이 없다하고 살아갑니다.

 

(창세4,17) 17 카인이 자기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니(동침), 그 여자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았다. 카인은 성읍 하나를 세우고, 자기 아들의 이름을 따라 그 성읍의 이름을 에녹이라 하였다.

 

카인은 아내와 동침(同寢)하여 에녹을 낳고 카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을 따라서 에녹성이라고 합니다.

왜 카인이 하느님을 떠나서 성을 쌓는지 앞에 있는 말씀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카인은 범죄 한 후에 나를 만나는 사람들마다 나를 죽이면 어떻게 합니까?’ 라고 했습니다.

 

(창세4,15) 15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아니다. 카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나 일곱 갑절로 앙갚음을 받을 것이다.” 그런 다음 주님께서는 카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보호)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네가 비록 범죄(犯罪)했지만 내가 너를 지키고 보호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카인이 절대 사람들에게 죽지 않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17절에서 카인은 하느님의 보호를 거절합니다. 대신에 자기가 자기를 보호할 성을 쌓습니다. 그리고 그 성의 이름을 에녹이라고 합니다. 에녹이라는 이름의 뜻은 개벽(開闢), 시작 즉 하느님이 없는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카인의 모습을 통해서 본 이 세상 사람들의 모습은 하느님을 떠나서 이제 하느님의 보호하심을 거절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성을 만들어 하느님이 없는 새로운 창조의 세계를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하느님이 왜 필요하냐 하느님이 어떻게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는가 하느님 대신 우리를 보호할 성들을 많이 만들어야한다. 그것은 부동산이다 특히 아파트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파트의 이름을 성()이라는 이름에 캐슬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성이다. 사람들이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성이다. 나의 지위가 나를 지켜 줄 수 있는 성이다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카인의 후손들의 모습입니다.

18절에서 22절을 보면 카인의 후손들은 가축치는 자의 조상이 되고, 음악 하는 자의 조상이 되고, 또 기술을 가진 자의 조상이 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오해해서 가축을 치고 음악을 하고 기술을 가지는 것은 카인의 후손들의 모습이다 그래서 이것은 이 세상나라의 모습이라고 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우리 가운데서도 가축(家畜)업을 하는 분도 있고, 음악(音樂)을 하는 사람도 있고, 기술(技術)을 가진 이도 있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 인간이 범죄 하기 전에도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땅을 경작(耕作)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때 땅을 경작하는 그 일자체가 예배(禮拜)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축(家畜)업을 하고 음악(音樂)을 하고 기술(技術)업을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원래 우리가 이 땅에서 하는 모든 일들은 하느님께 예배하는 일들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이 자리에서만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장사를 하면서도 하느님께 예배하고, 가축을 치면서도 하느님께 예배하고, 컴퓨터를 다루면서도 하느님께 예배해야합니다.

그런데 지금 카인의 후손들은 그 모든 일들을 하느님에게서 도피(逃避)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습니다. 또 이 일들이 하느님 대신에 그들을 보호할 수단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은 일을 하면 할수록 하느님에게서 더 멀어지고 있습니다. 일을 하면 할수록 하느님이 더 필요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카인의 후예 가운데 19"라멕은 아내를 둘 얻었는데, 한 아내의 이름은 아다이고 다른 아내의 이름은 칠라였다.“ 라멕은 자기 마음대로 두 아내를 둡니다. 그리고 23절과 24절을 보면~

 

(창세4,23-24) 23 라멕이 자기 아내들에게 말하였다. “아다야, 칠라야, 내 소리를 들어라. 라멕의 아내들아, 내 말에 귀를 기울여라. 나는 내 상처 하나에 사람 하나를, 내 생채기 하나에 아이 하나를 죽였다. 24 카인을 해친 자가 일곱 갑절로 앙갚음을 받는다면 라멕을 해친 자는 일흔일곱 갑절로 앙갚음을 받는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어떻게 말합니까? 나의 상처로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아이들을 죽였다고 합니다. 라멕은 자신을 개인적인 상처 때문에 사람들 마음대로 죽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카인을 위하여 벌이 일곱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는 벌이 일흔일곱 배로다고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왜 라멕이 카인을 위하여는 벌이 7배인데, 라멕 자신을 위해서는 벌이 77배라고 하는 것은 앞에서 하느님께서 카인을 위해서 하신 말씀을 염두 해두고 한 말입니다. 앞에 15절을 다시 보면~

 

(창세4,15) 15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아니다. 카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나 일곱 갑절로 앙갚음을 받을 것이다.” 그런 다음 주님께서는 카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보호) 하셨다.

 

여기 보면 카인을 죽이는 자에게 벌을 7배나 주시는 분은 하느님입니다. 그런데 24절에서 라멕 자신이 하느님 대신에 벌을 준다고 합니다. 벌을 주는 기준이 라멕 자신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내게 상처를 주면 내가 누구든지 죽이겠다고 합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느님은 벌을 7배나 준다고 했는데, 나는 하느님보다 더해서 벌을 77 배를 더해서 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카인의 족보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카인의 후손들은 항상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해서 반대로 해석합니다. 하느님은 카인에게 네가 이 땅에서 떠나라고 하셨는데 카인은 하느님을 떠납니다. 하느님은 카인에게 내가 너를 지키고 보호(保護)하겠다고 했는데 카인은 자신을 보호할 성()을 쌓습니다.

하느님은 네가 하는 모든 일을 통해서 하느님을 섬기고 예배하라고 하는데, 카인의 후손들은 하느님에게서 도피하는 수단으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내가 심판하리라고 하시는데, 카인의 후손들은 내가 하느님보다 더 크게 심판하겠다고 합니다.

이런 카인의 후손들의 모습은 자신이 하느님과 같이 되어서 이 세상에서 주인 노릇하려는 선약과를 먹은 이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카인의 후예들과는 대조가 되는 셋의 후손들은 어떠합니까?

 

(창세4,25) 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니, 그 여자가 아들을 낳고는, “카인이 아벨을 죽여 버려, 하느님께서 그 대신 다른 자식 하나를 나에게 세워 주셨구나.” 하면서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

 

아담이 하와와 동침한 후에 그녀가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셋이 여자의 후손인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셋은 카인이 죽인 아벨을 대신하여 다른 씨를 주신 것입니다.

 

(창세4,26) 26 셋에게서도 아들이 태어나자, 그는 아들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기 시작하였다.

 

또 셋이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을 에노스라고 합니다. 여기서 에노스란 이름의 뜻은 사람(6,4), 또는 남자’(13,8)를 나타낼 때 쓰였습니다. 에노스이란 뜻도 있습니다. 특별히 이 에노스란 성경에서 치료가 거의 불가능한 병든 상태에 있은 인간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예레15,18 미카1,9) 또 재난을 당하거나(예레17,16), 고통 가운데 있는 인간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이사17,11).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셋이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치료가 불가능한 인간,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재난가운데 있는 인간, 슬픔과 고통가운데 있는 인간이란 뜻에서 에노스라 할 때 그때부터 비로소 처음으로 사람들은 야훼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느님이 그냥 하느님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전능자라는 뜻을 가진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2장에서부터 야훼 하느님의 이름이 나옵니다. 야훼 하느님은 특별히 하느님의 백성들과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무엇보다 야훼 하느님은 하느님의 백성을 누구보다 더 사랑하셔서 그가 고통 중에서 부르짖을 때 들으시는 하느님의 이름입니다(예레33,3).

그래서 인간의 연약함을 생각하지 않고 더 이상 하느님의 도우심이 필요가 없다고 자가 뱀의 후손입니다.

내가 흙에서 나온 연약한 사람인 것을 아는 자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내가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지만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아는 자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또 이 땅의 삶이라는 것이 고통이요 수고요 슬픔이라는 것을 아는 자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내가 인간으로 연약하고 부족함을 알기에 야훼 하느님께 부르짖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수많은 고통과 슬픔의 눈물을 흘리고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도 그것으로는 정말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인간적인 절망감을 느끼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 모든 눈물과 고통들이 우리들을 여자의 후손으로, 하느님의 자녀로 부르시기 위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고난과 고통이 있습니까? 무엇보다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고난이 있습니까? 창세기 315절은 우리에게 여자의 후손인 하느님의 자녀에게 고난(苦難)은 필수(必修)라고 말씀하십니다.

절대 여자의 후손인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 고난과 고통을 피하지 맙시다. 고통을 피하는 것은 죄()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고난과 고통을 통해서 에노스와 같이 야훼 하느님께 부르짖으며 나가는 진정한 여자의 후손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은 카인의 후손들처럼 자기를 보호할 성을 쌓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의지한다고 하면 하느님께서 과연 우리를 보호하실 것인가에 대해서 하느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즈카2,8) 8 말하였다. “저 젊은이에게 달려가서 이렇게 일러 주어라. ‘사람들과 짐승들이 많아 예루살렘은 성벽 없이 넓게 자리 잡으리라.

 

앞으로 예루살렘에 많은 사람과 가축들이 있게 될 것이니까 너는 그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열심히 예루살렘 성곽을 쌓아라라고 해야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있게 될 것인데, 성곽 없는 성읍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즈카2,9) 9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예루살렘을 둘러싼 불벽이 되고 그 한가운데에 머무르는 영광이 되어 주리라.’

 

원문에 보면 내가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그러니 하느님이 자신을 걸고 지금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친히 사면에 불성곽이 되어서 너희와 함께 하고, 너희를 보호하고 지키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곽이 없어도 하느님께서 친히 영광(불벽)이 되어주십니다.

여기서 영광(불벽)이란 말은 그 불안에 있는 사람은 따뜻한 보호를 느낍니다. 그런데 그 불밖에 사람들은 불로 태워버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불벽)이 되어주신다 뜻은 하느님의 백성은 보호하시고, 하느님의 백성을 위협하는 자들은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카인의 후손들인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을 지켜 줄 에녹성을 쌓고 있지만,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의 영광(불벽)이 되어 주셔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해주십니다.

 

(즈카2,12) 12 만군의 주님께서 나에게 권위를 주어 파견하신 그분께서 너희를 약탈한 민족들을 두고 말씀하신다. 너희를 건드리는(침범) 자는 정녕 내 눈동자를 건드리는 자다.

 

우리가 하느님의 눈동자이고, 하느님이 우리의 눈꺼풀이 되어서 하느님이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일분에 몇 번 눈을 깜박거립니까? 우리가 이것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눈꺼풀은 지금도 계속 깜박거리면서 눈에 수분을 공급하고, 또 이 물질을 막아주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눈동자와 같이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주고 계십니다.

 

(즈카2,14) 4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왜 우리가 사방의 위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노래하고 기뻐해야합니까?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 가운데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불벽)이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쌓는 돈의 성()들과 세상의 권세의 성들과 사람의 성들은 모두 무너지고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지키시는 하느님의 성()은 영원히 안전할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우리 삶 가운데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하시는 하느님의 영광을 체험하며 살아갑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