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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리 가족 모두 '오체투지 순례'에 참여했습니다
작성자지요하 쪽지 캡슐 작성일2008-10-27 조회수563 추천수3 반대(0) 신고
      우리 가족 모두 '오체투지 순례'에 참여했습니다




지난 9월 4일부터 벼르고 별러왔던 일을 52일째인 엊그제(25일)서야 마침내 실행했다. 가족 모두 '오체투지 순례'에 하루만이라도 참여하는 일이었다. 오체투지 1차 순례가 끝나기 하루 전이었다.


▲ 문규현 신부님과 함께 / 나로서는 지난 1월 태안 해변의 기름제거 작업장에서 문 신부님을 뵌 후 오랜만의 재회였다. 오체투지 25일 순례 점심 시간에 문 신부님과 우리 가족이 함께 기념 촬영을 했다.  
ⓒ 지요하  오체투지

오체투지 순례에 나 혼자 참여하는 건 주중 아무 때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내의 참여 의지가 워낙 강해서 부부동반을 하자니 '놀토'를 택해야 했다. 또 오체투지 순례 참여가 참으로 값지고 중요한 일이기에 나는 처음부터 '가족동참'을 생각하고 희망했다.

그 기회가 지난 11일에도 있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일찌감치 11일 '놀토'를 이용하여 오체투지 순례에 참여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그 날로 날짜가 잡힌 결혼식 주례 요청이 내게 왔다. 소년 시절에 부모 슬하를 떠나 독립 생활의 길로 들어서서 고생 끝에 어느 정도 자수성가한 신랑 쪽의 요청이어서 사양하기가 어려웠다.

다행히 결혼식 장소는 공주라고 했다. 그때쯤에는 오체투지 순례단이 전북 완주 땅을 접하게 된다고 했다. 결혼식 시간은 오후 1시라고 해서, 결혼식 후 곧바로 완주로 달려가면 오체투지 오후 순례에 2시간 정도는 참여할 수 있겠다 싶어 계획을 수정했다.

그런데 그날은 오체투지 순례를 오전에만 하고 오후에는 전주 '치명자산'에서 미사를 지낸다는 오체투지 순례단의 일정 소식을 듣게 되었다. 결국 그날 오체투지 순례에 참여하는 것을 포기하고, 계획을 25일로 미루었다.


▲ 방상복 신부님과 함께 / 경기도 안성 '유무상통마을'의 방상복 신부님도 25일 오체투지 순례 지점에 오셔서 우리 가족을 반가워해 주셨다.  
ⓒ 지요하  오체투지

25일 순례도 하루를 온전히 순례에 바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지레 아쉬움과 찜찜함을 안아야 했다. 그 날 오체투지 순례단이 지나는 곳은 논산시 상월면이었다. 태안에서 그곳까지 가려면 2시간 이상이 소요되니, 새벽 일찍 떠나지 않는 한 오전 순례 참여는 어려운 일이었다. 또 오후 3시쯤에는 대전으로 이동을 해야 했다. 대전 궁동성당에서 갖는 '대전가톨릭문우회' 행사(정기총회·작품집 제15호 봉헌미사와 출판기념회)에 '충남부회장' 처지에서 꼭 참석을 해야 했다.

단 하루만이라도 오체투지 순례에 온전히 전심전력하기는 어려운 사정이어서 이상하게 지레 죄스러워지는 마음이기도 했다. 그래도 우리 가족에게는 참여 자체가 중요한 일이니, 죄스럽고 불완전한 상태로나마 순례에 참여하기로 했다.

우리 부부는 전날 저녁에 장을 봤다. 김밥 거리와 주먹밥 거리를 준비했다. 절대로 소풍 가는 것은 아니니 추호라도 소풍 기분을 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유념하면서도, 아내는 빈손으로 갈 수는 없지 않느냐고 했다. 당연히 '후원금' 봉투도 준비해야 하지만, 순례단에게 제공할 김밥과 주먹밥을 만들어 가야 한다고 했다.

서울에서 대학교에 다니는 딸아이도 오체투지 순례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이고, 엄마를 도와주기 위해 오후 6시경 집에 왔다. 그리고 두 모녀는 새벽 1시경까지 김밥과 주먹밥 공사 준비를 했다.

새벽 1시가 넘은 시각에 잠자리에 든 아내는 4시 30분에 일어났고, 곧 딸아이도 일어났다. 두 모녀를 깨워준 이는 물론 어머니였다. 우리 가족은 곧 모두 함께 김밥과 주먹밥 공사를 시작했다. 전국적으로(?) 많은 이들이 감탄과 칭찬을 아끼지 않는 '구갑회표 김밥'과 함께 '구갑회표 주먹밥'도 만들어졌다. 이 일에는 나도 손을 보태야 했다.

김치와 콩나물국이며, 감과 메론 등 과일까지 준비하다 보니, 네 식구가 서둘렀지만 오전 8시쯤에야 모든 작업이 끝났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8시 30분에야 겨우 출발을 할 수 있었다.


▲ 문정현 신부님과 함께 / 문정현 신부님과 우리 가족이 함께 하는 자리에 여러분이 다투어(?) 참여해 주셨다. 내 바로 옆에 선 이는 전 국회의원 정범구씨.  
ⓒ 지요하  오체투지

올해 연세 85세이신 어머니는 동행하시지 않았지만, 어머니도 부분적으로는 오체투지 순례에 동참하신 셈이었다. 오체투지 순례에 대한 깊은 이해를 지니시고, 우리 가족이 참여하는 것을 적극 찬동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김밥과 주먹밥 공사를 벌이는 일에 기꺼이 손을 보태 주셨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참여를 하신 셈이 될 터였다.

우리 가족은 오전 11시가 넘은 시각에 논산시 상월면 지경리, 오체투지 순례단이 지나고 있는 지점에 도착했다. 순례단은 길에 앉아서 휴식을 하는 중이었다. 100명이 훨씬 넘어 보였다. 우리가 준비해 온 김밥과 주먹밥은 30명분 정도여서 우리는 괜한 걱정을 했다. 일단 내 차를 순례단의 진행 방향 쪽으로 멀찍이 갔다놓은 다음 우리 가족은 순례단 쪽으로 되돌아 걸어왔다.

다시 오체투지가 진행 중이어서 우리는 순례단의 후미 쪽으로 갔다. 순례단의 후미에는 유니폼 조끼를 입지 않은, 즉 몸을 엎드리지는 않고 허리를 깊이 구부리는 식으로 오체투지 순례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이 열을 지어 있었다. 30명 정도 되어 보였다. 

  

▲ 고3 아들녀석의 영광 / 두 분 신부님은 의도적으로 내 아들녀석(지한결)을 가운데 세우고 사진을 찍으셨다. 한결이는 두 분 신부님의 포로가 된 기분이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 지요하  오체투지

그들 중에는 경기도 안성시 '유무상통마을'에서 오신 방상복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도 계셨다. 다시 휴식 시간이 와서 우리 가족은 우선 방 신부님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고, 방 신부님과 함께 오신 일행 분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다시 오체투지가 시작되자, 조끼와 장갑이며 무릎보호대도 착용하지 않으신 채로 방 신부님도 오체투지를 하시는 것이었다.

순례단은 11시 30분에 오전 순례를 마쳤다. 점심시간을 가진 다음 오후 2시부터 다시 오후 순례를 시작한다고 했다. 우리는 순례단의 선두 쪽으로 갔으나, 문규현 신부님과 전종훈 신부님, 수경 스님 모두 차를 타고 점심식사 장소인 마을회관으로 일찍 가셔서 뵙지 못하고, 방상복 신부님 일행과 함께 계룡산 신원사 근처 '사랑의 시튼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영성의 집'으로 갔다.

거기에서 점심식사를 하기로 하셨다는 방상복 신부님 일행에게 김밥과 주먹밥을 나누어드린 다음 딸아이를 남겨두고 우리 부부는 바삐 지경리 마을회관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두 분 신부님과 수경 스님, 그리고 문규현 신부님의 형님이신 문정현 신부님도 이미 점심식사를 마치셨다고 했다. 

  

▲ 수경 스님과 함께 / 오체투지 25일 오후 순례기도를 시작하기 전 우리 가족은 수경 스님과 기념 촬영을 했다.  
ⓒ 지요하  오체투지

아내는 문정현·규현 형제 신부님을 처음 뵙게 된 것을 더없이 기뻐했다. 지난 1월 문규현 신부님이 태안 해변에 기름을 닦으러 전주 평화동성당 신자들과 함께 세 번이나 오셨는데, 학교 근무 관계로 한 번도 뵙지 못한 것을 몹시 아쉬워했던 아내는 문규현 신부님을 뵈면서 "30년 동안이나 뵙고 싶었던 신부님"이라고 과장적인 인사를 했다.

나는 아내가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하며 만들어온 김밥이니 맛이나 보시라고 권하니 문규현 신부님도 전종훈 신부님도 단 한 개씩만 입에 넣으셨다. 절대로 배불리 먹지 않는 것도 순례정신의 하나라는 말씀도 하셨다.

내 승합차에 실린 아이스박스 안에는 전날 저녁에 미리 준비해놓은 맛좋은 '태안 막걸리'도 다섯 병이 들어 있었다. 지난 1월 태안 해변에서 문규현 신부님께 태안 막걸리를 대접해 드린 적이 있었다. 그때 막걸리 맛이 썩 좋다는 말씀도 하시면서 막걸리를 맛있게 드시던 모습이 기억나서, 순례 중이긴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굳이 준비를 해온 것이었다.

하지만 문 신부님은 고개를 저었다. "평소 막걸리를 좋아하고 태안 막걸리 맛을 잘 기억하지만, 순례 중이라서…"라는 말과 함께 문 신부님은 검게 그을린 얼굴로 함박웃음을 지으셨다.    


▲ 오체투지 25일 오후 순례기도를 시작하기 전 / 수경 스님과 전종훈 신부님이 나란히 앉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  
ⓒ 지요하  오체투지

우리 부부는 늦게 도착하여 아직 식사를 하지 않은 몇 명 여성분들과 오체투지로 식욕이며 소화 작용이 더욱 왕성할 학생들에게 김밥과 주먹밥을 나누어주었다. 우리 부부와 아들녀석이 먹을 소량만 남겨 가지고, 곧 논산 D고로 달렸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학교 급식실로 가는 대신 기숙사 앞의 낙엽 지는 나무 아래 벤치로 온 아들녀석과 함께 김밥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그리고 우리 부부는 수능시험이 코앞에 닥친 고3 아들을 차에 태우고 오체투지 순례 지점으로 되돌아왔다.

일단은 일반 대학으로 진학을 하겠지만, 일반 대학에서 경험을 쌓은 다음 신학교로 방향을 돌릴 수도 있는 아들녀석을 나는 신부님들께로 데리고 다니며 인사를 시켰다. 아들에 대한 내 소망을 잘 알고 계시는 방상복 신부님이 특히 내 아들녀석을 반가워해 주셨다.

오체투지 순례단은 1시 50분쯤 오전 순례를 마친 지점으로 돌아갔고, 나는 내 차를 진행 방향 멀찍이 갔다놓은 다음 되돌아왔다. 딸아이와 아들녀석은 조끼를 입고 장갑과 무릎보호대를 착용하고 있었다. 나도 선두 차량으로부터 그것들을 얻어 착용을 했다. 김밥과 주먹밥 공사를 하느라 밤 깊도록, 또 새벽부터 오래 서 있었던 아내는 무릎 통증 때문에 오체투지 대신 허리를 굽히는 방식으로 순례를 하기로 했다.

참으로 거룩하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최근에 40일 넘게 병상 생활을 하고 겨우 퇴원한 건강치 못한 몸이었지만, 가족들의 염려 가운데서도, 나는 한 시간 동안이나마 오체투지 순례에 최선을 다하고자 했다. 기꺼이 열심히 오체투지 기도를 했다.

내 앞에서 딸아이와 아들녀석도 열심히 오체투지를 했다. 서너 발짝 걷고, 징을 든 스님의 구령에 맞추어 아스팔트 바닥에 엎드리고, 4·5초 후 징 소리에 따라 일어서서 걷고 하는 동작의 반복이었다. 대략 25회 정도 오체투지를 하고 5분 정도 휴식을 하는 것 같았다.

휴식을 마치고 다시 오체투지를 시작할 때마다 순례단은 진행 방향을 향해 깊이 허리를 굽힌 다음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또 한바탕의 오체투지를 마치고 휴식을 할 때는 전후좌우 동료들과 허리 굽혀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감사와 격려의 뜻을 지닌 인사일 터였다.   

  

▲ 오누이의 다정한 모습 / 오체투지 순례를 함께 하는 두 오누이의 모습이 한결 정다워 보인다.  
ⓒ 지요하  오체투지

나는 내 아이들과 함께 오체투지 순례에 참여한다는 사실이 더없이 행복했다. 아버지인 내가 자식들에게 참으로 소중한 경험을 안겨주고 있다는 생각이 내 가슴을 한없이 뿌듯하게 했다. 땅바닥에 엎드릴 때마다 진심으로 하느님께 감사했다. 남편과 아들딸이 함께 오체투지를 하고 있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아내도 더없이 행복한 표정이었다.

대학교 3학년인 딸아이와 고3인 아들녀석도 오체투지 순례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이 오체투지 순례기도가 왜 '사람의 길'이고 '생명의 길'이며 '평화의 길'인지를 어린 나이임에도 충분히 헤아리고 있었다. 나는 그런 녀석들이 고맙고 대견스러웠다.

어쩌면 내 아이들에게 평생 한 번뿐인 경험을 안겨주는 것일지도 몰랐다. 물론 이 순례는 예정보다 4일이 앞당겨진 26일 끝나지만 완전히 끝나는 것은 아닐 터였다. 어디까지나 '1차', 또는 '첫번'의 성격을 지니는 것일 터였다. 오체투지 순례를 시작하고 이끄는 분들은 북한 묘향산까지의 순례를 마음에 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계획이 실행되면 오체투지 순례에 참여할 기회는 또 있겠지만, 종교인들이 굳이 오체투지 순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도 분명하니, 첫 번째인 오늘의 이 기회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 아버지와 두 자녀의 오체투지 / 딸과 아들녀석을 나란히 앞세우고 뒤에서 함께 오체투지 기도를 하면서 나는 더없이 행복한 마음이었다.  
ⓒ 지요하  오체투지
  

나는 몸을 엎드리고 길바닥에 이마를 댈 때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 구원자이신 하느님, 저는 당신을 믿고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기도를 했다. "감사합니다"라는 기도도 했다. 그리고 '낮춤'이라는 단어와 '속죄'라는 단어를 연속적으로 떠올리고 되뇌었다. 내 오체투지 행위가 진실로 나를 낮추는 것이 되고 속죄행위가 되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낮춤이라는 단어와 속죄라는 단어 옆으로, '초인'이라는 말도 내 의식의 언저리에서 맴을 돌았다. 9월 4일 지리산 노고단을 출발하여 52일째가 되는 오늘, 목적지인 계룡산 신원사 중악단을 눈앞에 둔 여기까지 오체투지를 지속해 온 문규현 신부님과 수경 스님, 그리고 중간에 합류한 전종훈 신부님에게서는 도저히 '초인'이라는 단어를 분리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 휴식 시간에는 다시 인사를 교환하고 / 또 한바탕의 오체투지 기도를 마치고, 징 소리와 함께 '휴식'을 알리는 스님의 말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다시 감사와 격려의 인사를 나누곤 했다.  
ⓒ 지요하  오체투지

참으로 초인적인 의지였다. 그 초인적인 의지는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무엇이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일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오체투지로 무수히 산을 넘고 들을 건너는 그 인고의 힘을, 그 신비로움을 내가 어찌 다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계속적으로 물음표를 세울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라 더욱 가슴 벅차게 경이감을 안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경이로움 속에 나는 머물러 있었고, 그로 말미암아 진심으로 하느님께 감사할 수 있었다.

"제게 이런 경이로움을 안겨주시는 하느님, 그리하여 저로 하여금 '희망'이라는 단어와 '신념'이라는 단어를 새롭게 온 가슴으로 껴안게 해주시는 하느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리하여 오체투지 순례는 최선의 아름다운 기도행위임을 스스로 실감하고 확인할 수 있었다. 비록 한 시간 정도, 겨우 200번 정도 오체투지 순례에 참여한 것이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참으로 가슴 뿌듯하고 고귀한 기도 시간이었다.


▲ 26일 오후 계룡산 신원사 중악단 앞 / 오체투지 순례 1차 회향 행사 장면을 지켜보고 함께 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계룡산 신원사 중악단 앞 광장에 모여들었다.  
ⓒ 지요하  오체투지


덧붙이는 글 |

25일 저녁 대전을 거쳐 공주로 가서 큰처남 집에서 일박을 한 우리 가족은 26일 공주 중동성당에서 주일미사를 지내고, 미사 후 내 신앙문집을 판매하는 일을 했다. 그리고 오후 3시 계룡산 신원사 중악단으로 가서 오체투지 순례단의 '1차 회향 행사' 자리에 함께 했다. 끝까지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오체투지 순례의 마지막 시간, 마지막 자리에 잠시나마 우리 가족이 함께 했다는 사실에서도 큰 '감사'를 느낀다.


2008.10.27 20:32 ⓒ 2008 OhmyNews
출처 : 우리 가족 모두 '오체투지'에 참여했습니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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