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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항구히 노력하는 실천적 사랑" - 10.26,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08-10-26 조회수490 추천수5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8.10.26 연중 제30주일                                      
탈출22,20-26 1테살1,5ㄴ-10 마태22,34-40

                                            
 
 
 
"항구히 노력하는 실천적 사랑"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삶의 중심이자 의미라고 말합니다.
바로 사랑이 우리 삶의 중심이자 의미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이 사라지면 삶의 중심도, 삶의 의미도 곧장 실종입니다.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주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사랑 영양실조가 만병의 근원입니다.
마치 하늘의 태양 같은 하느님이자 사랑입니다.
 
태양 사라지면 세상 만물이 어둠 속에 잠기듯
마음에 사랑의 태양, 하느님의 태양 사라지면
우리의 내면 역시 절망과 허무, 무의미의 어둠에 잠겨버립니다.

하늘 사랑으로 아름답게 타오르는 가을 단풍들입니다.

사랑할 때 아름답습니다.
 
‘사랑을 하면 예뻐져요.’라는 노래 가사도 있지 않습니까?
사랑할 때 밝고 부드럽고 따뜻한 얼굴이지만
사랑 사라지면 어둡고 딱딱하고 차가운 얼굴로 변합니다.
 
바로 사랑이 생명임을 입증합니다.
사랑할수록 충만한 생명입니다.
그러니 사랑해야 합니다.

얼마 전 어느 분의 전화를 잊지 못합니다.

“신부님, 그만 삶을 접고 싶습니다.
  세상살이에 적응하기가 너무 힘듭니다.
  저에겐 무기력한 하느님, 전혀 힘이 없으신 하느님처럼 느껴집니다.
  자식을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는
  무기력한 어머니 같은 하느님으로 느껴집니다.
  활력 넘치는 하느님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전화 받고 잠시 망연자실했습니다.
너무 솔직한 고백에 대답할 말이 없었습니다.
 
살다보면 누구나 때때로 무기력한 하느님을 체험하지 않습니까?
저의 마음 속 대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생사의 갈림길입니다.
  하느님 사랑 끈 놓쳐버리면 죽습니다.
  이럴수록 필사적으로 하느님을 찾아야 삽니다.
  하느님을 사랑해야 삽니다.
  하느님의 사랑 끈, 꼭 붙잡아야 삽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포자기로
  생명의 끈, 사랑의 끈, 하느님을 놔버려
  타락 방탕에, 우울증에 자살입니까?”


하여 오늘 주님의 복음말씀이 그리도 고맙고 절실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살기위하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제가 자주 애용하는 단어가 바로 ‘살기위하여’입니다.
살기위하여 밥 먹어야 하듯
살기위하여 하느님 사랑해야 합니다.
 
살기위하여 기도해야 하고,
살기위하여 미사해야 합니다.
 
아무리 육신 건강해도 영혼이 하느님 사랑 끈 놓쳐버리면
영혼도 육신도 서서히 무너져 내립니다.

하느님을 사랑할 때 튼튼한 영혼에
삶의 중심도, 삶의 의미도 또렷해져 활력 넘치는 삶입니다.
 
제2독서의 테살로니카 교회 신자들처럼
저절로 우상들을 버리고 더욱 살아계신 참 하느님을 섬기게 됩니다.
 
큰 환란 속에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됩니다.

생각으로, 마음으로의 추상적 사랑이 아닙니다.
마음을 다해 목숨을 다해 정신을 다해
갈림 없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올인 하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액세서리, 장식이 아니라 바로 삶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사랑은 비단 수도자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혼란하고 어지러운 세상 전쟁터에서,
영육이 건강하게 살아남으려면
누구나 이런 하느님 사랑에 올인 해야 합니다.
 
이런 하느님 사랑에 올인 할 때
비로소 마음의 순결에 열정의 회복이요, 영육의 치유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을 하느님을 볼 것이다.”

마음을 다해, 목숨을 다해, 정신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할 때
비로소 갈림 없는, 깨끗한 마음이 되어 하느님을 봅니다.
 
이런 깨끗한 마음의 하느님 체험보다
우리를 행복하게 자유롭게 부유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런 하느님 사랑의 자연스런 표출이 이웃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 따로, 이웃 사랑 따로 가 아닙니다.
결코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구별될 수 있지만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 사랑을 통해 검중되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그가 진정 하느님을 사랑하는지 이웃 사랑을 보면 압니다.
 
하느님 사랑의 진정성을 식별할 수 있는 잣대는 이웃 사랑뿐입니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그 두터운 성경책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두 말마디로 압축 요약됩니다.

얼마나 단순 명쾌합니까?
우리의 분도회의 모토인 ‘기도하고 일하라’와도 일맥상통합니다.
 
기도하고 일하고,
하늘보고 땅보고,
하느님 사랑하고 이웃사랑하고,
관상하고 활동하고...
저는 이를 일컬어 목운동의 영성이라 합니다.

기도와 일,
하늘과 땅,
관상과 활동,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서로 균형과 조화를 이룰 때
건강한 영성의 사람입니다.
 
하여 이렇게 살라고 네발 달린 동물과 달리
두발은 땅에 딛고 일하고 두 손은 하늘 향해 기도하라고 직립인간입니다.
 

그러나 막연한 이웃사랑이 아니라 구체적 실천의 이웃사랑입니다.
 
탈출기의 주님 말씀입니다.

“너희는 어떤 과부나 고아도 억눌러서는 안 된다.
  너희가 그들을 억눌러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그 부르짖음을 들어줄 것이다.”

“너희가 나의 백성에게,
  너희 곁에 사는 가난한 이에게 돈을 꾸어 주었으면,
  그에게 채권자처럼 행세해서도 안 되고, 이자를 물려서도 안 된다.
  너희가 이웃의 겉옷을 담보 잡았으면,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어야 한다....
  그가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들어줄 것이다. 나는 자비하다.”

‘나는 자비하다.’ 이게 하느님의 정의입니다.
무엇보다 약자들을, 고아나 과부, 가난한 이들을 각별히 챙기시는
자비하신 하느님이십니다.
 
‘나는 그 부르짖음을 들어줄 것이다.’ 라는 말씀이 마음에 켕깁니다.
 
억울한 이들의 한 맺힌 절규,
하느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날도 우리 주변 곳곳에
이런 억울한 이들의 한 맺힌 부르짖음들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으니
나라가 편할 리 없습니다.


우리 위정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이런 가난하고 억울한 이들의 부르짖음에
얼마나 잘 귀 기울이며 응답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진정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저절로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고
하느님의 뜻대로 가까이서부터
이런 약하고 가난한 이웃들에게 사랑을 실천합니다.
 
이런 이웃사랑은 지칠 줄 모르는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샘에서 끊임없이 샘솟는 이웃사랑의 실천이요,
하느님 사랑 나무에서 끊임없이 꽃피어나는
이웃사랑의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일시적 감정이나 기분이 아니라 항구한 인내의 노력입니다.

노력하는 사랑입니다.
살기위하여, 영혼과 육신이 건강하게 살기위하여,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실천은 필수입니다.
 
항구한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실천이
결국은 나를 사랑하는 길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실천에 항구할 수 있도록
당신의 생명과 사랑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십니다.

“저의 힘이신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하나이다.”(시편18,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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