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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7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8-10-26 조회수502 추천수2 반대(0) 신고
 

2008년 10월 26일 일요일 연중 제30주일


오늘의 묵상입니다.


지리산 노고단에서 시작한 오체투지 순례단은 오늘 공주 계룡산 신원사에서

금년일정을 마무리합니다.

전남 구례군 산동면 구간을 지날 때에 참여한 기억이 엊그제인데

그 느림보 행렬이 벌써 계룡산까지 왔습니다.

어제는 방신부님과 류상태 목사님(강의석 사건으로 학교를 떠난 전 대광고 교목) 등 몇 분과 함께 순례행렬을 다시 찾았습니다.


문규현 신부님과 전종훈 정구사 사제단대표 신부님 그리고 수경스님은

모두 건강해 보였지만

고령이신 문정현 신부님은 다리가 불편하시여 양쪽 목발을 짚고 행렬을 뒤따르고 계셨습니다.

형님 문 신부님의 빠른 쾌차와 힘든 순례길의 모든 염원들을 아빠 하느님께서

들어 주시옵길 기도하며 오늘 묵상을 시작합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34-40


그때에 34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35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36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39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40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수님은 사두가이들과 부활 논쟁에서 명쾌한 설명으로

그들의 말문을 막아 버렸습니다.

복음서에서는 바리사이들은 위선자 또는 당시 위선적인 사회지도층의 대명사로

인식되고 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바리사이들은 부활을 인정한 반면에

사두가이들은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던

유대교의 두 흐름으로 학자들은 분류하는 것 같습니다.


또, 바리사이들은 율법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며

토라에 복종할 때에 천국이 도래한다는 종말론적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사두가이들은 그들의 성경에 부활이 없으므로 종말론적 믿음을 믿지 않았으며

제사장이 지킬 율법은 제사장만 지켜야 하고 일반인들은

지킬 의무는 없다고 봤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양쪽에서 모두 공격을 받고 계셨으므로 당시로서는 엄청난

혁신적인 생각을 하신 분임을,

또 언제나 명쾌한 논리로 그들의 공격을 방어하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존의 율법을, 그 의미를 찾아 진일보된 재해석을 하였기에

예수님에 대한 공격은

늘 과연 저자가 율법을 제대로 알고 복음을 선포하고 있는지를 시험하고 있으며

오늘도 이런 의도로 바리사이들이 질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이런 수작을 미리 다 알고 계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엿 볼 수 있는 대표적인 대목은

산상설교에서 하신 말씀으로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하시며

십계명에서 6가지 계명을 달리 해석하여 알려 주셨습니다.


그 표현은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또는 '하신 말씀이 있다.' 등으로

시작하거나 끝을 맺고 있으며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고 있는 십계명까지도

새롭게 알려주셨습니다.

저는 십계명을 생각할 때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이 새롭게 알려주신

계명을 따르지 않고

왜 유대교의 십계명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지, 이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감히 누가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는 십계명을 예수님은

이미 이 천 년 전에 그 계명을 改命하였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이런 모든 정신을 닮고 싶습니다.

지금은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급급하지만 그 많은 말씀을 예수님의 眞意대로 이해하는 것도 한계가 있으며

또 말씀의 진의를 정확히 이해하였다 하더라도 수시로 순간순간

찰나적으로 대응하며 살아야 하는 삶에

말씀을 모두 기억하여 그대로 적용하며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저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정신을 제대로 체득하면 그 많은 말씀을 일일이 기억하지 않아도 실천할 수 있다고 믿고 있기에

예수님의 정신을 묵상할 수 있을 때가 가장 보람된 묵상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예수님의 얼을 이웃사랑, 생명존중, 평화, 평등, 공분 등으로

생각하였으나

오늘은 여기에 '새로운 사고'를 하나 더 추가하려고 합니다.

모든 생명체는 환경적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끊임없이 진화하고 발전해 나가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그 생명체는 곧 멸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생명체뿐만 아니라 국가, 제도, 사상 등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변화의 속도에 대한 생각은 모두 다르겠지만 변화 발전해 나가야 한다는

당위성만큼은

결코 다툼의 대상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제 생각도 틀릴 수 있다는 점을 언제나 기억하여 예수님처럼

늘 새로운 사고로 살아 갈 수 있도록 완고해 지는

지금의 제 자신을 반성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게 이렇게 질문하시고 계십니다. '너는 이를 어떻게 이해했느냐'

이 물음에 저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꼭 그것만은 아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시자 주님께서는 '맞다'하시며 꼭 그것만은 아니며 하느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

생명이 있고 없고 그 모든 것이 바로 네 이웃이다 하고 다시 알려주십니다.

제가 이렇게라도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 땅에서 태어난 덕분입니다.

노자 도덕경은 '道라는 것은 항상 그러한 것이 아니다 (道可道 非常道)'로 시작되고

금강경의 마지막 장은 대략 이렇게 끝나고 있음을 생각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내가 그것(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을 설하였다 하여

그것으로 생각하느냐,

세존이시여! 아닙니다. 아니라 하여야 그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수보리야! 맞다, 내가 말한 것은 그것이 아니기에 그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빠 하느님!

아빠 하느님과 한 분이신 성자께서는 지극정성을 다하여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또한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하셨습니다.

가장 작은 이들에게 지극정성을 다하는 것이

아빠 하느님께 지극정성을 다하는 것으로 새롭게 알려주셨기에

이를 기억하며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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