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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람을 움직이는 힘 ....... [김상조 신부님]
작성자김광자 쪽지 캡슐 작성일2008-11-02 조회수974 추천수6 반대(0) 신고
 
 
 
 
영화 쇼생크 탈출을 보았는가?
이 영화를 보면 희망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주인공 앤디는 억울하게 살인범으로 몰려 무기징역을 살게 된다.
주인공 앤디는 아마도 감옥에 갇힌 날부터 탈옥을 계획하게 된 듯하다.
하지만 그가 탈옥할 때까지는 아무도 그렇게 모범생?인 죄수가 탈옥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주인공 앤디가 탈옥을 계획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물론 자신이 진짜 살인범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년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탈옥후 자신의 별장까지 마련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감옥생활의 끝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사람을 살게 하는 힘이 바로 끝이 있다는 사실이다.
인생의 끝은 죽음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이건 진실이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순간 순간마다
죽음의 한 조각을 경험하면서 살아간다.
우선 질병이 그렇다. 시시콜콜한 감기나 복통,
못에 찔린 상처나 산소호흡기를 달아야 하는 중병에 이르기까지
모든 질병은 죽음의 한 조각을 맛보는 것이다.
고독함도 죽음의 한 조각이다.
즉, 아무도 없이 오랫 동안 혼자 있는 시간은
어쩌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일 것이다.
실패도 마찬가지. 입시에 떨어진 수험생은 아마도 한 동안 죽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늙는다는 것. 예전에는 아무 힘들이지 않고 올라갔던 계단에서 자주 쉬어야 하면 슬픈 마음이 든다.
은퇴, 직장이나 가정에서 내 자리가 없어지는 것은 죽을 준비를 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렇게 죽음은 살아 있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경험하는 것이다.
문제 하나, 열심히 달리기 시작했는데 골인 점이 안 보이면 달리던 사람이 어떻게 할까?
1) 골인점이 나올 때까지 10바퀴고 100바퀴고 계속해서 달린다. 그러다가 쓰러진다. 2) 멈춘다. 3) 엄마한테 가서 물어본다.
골인 지점이 있기 때문에 사람은 달린다.
마찬가지로 수감생활에 끝이 있다는 사실,
아니 수감생활을 끝장내야 한다는 분명한 골인지점이 있었기에
앤디는 그 끝을 향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다.
나의 지금의 모습에 끝이 있다면,
즉 내가 지금의 모습을 버리고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지금의 수고를 견딜 수 있다.
하지만 전혀 그럴 가망성이 없다면 사람은 노력하지 않는다.
시어머니와 도저히 화합할 수 없어서
며느리가 점쟁이에게 갔더니 쥐도 새도 모르게 시어미를 죽여줄 수 있다고,
그것도 살인죄도 쓰지 않고 죽일 수 있다고 하며 물었다.
“시어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뭔가?” “인절미를 아주 좋아합니다.”
“그러면 앞으로 100일 동안 지극정성으로 아침마다 맛있는 인절미를 해서 공양하시오.
그러면 100일후 시에미는 시름시름 앓다가 반드시 죽을 것이오.”
그렇게 해서 날마다 지극 정성으로 인절미를 해서 갖다 바쳤다.
그렇게 미운 시어미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다니 무엇보다 정성을 다 해서 갖다 바쳤다.
그랬더니 한달 후부터 시어머니가 변하기 시작했다.
“우리 며느리가 최고다. 이렇게 착한 며느리가 없다.”
100일이 다 되어갈 무렵 시모와 며느리는 너무 너무 사이 좋은 고부가 되었다.
며느리가 울상이 되어 점쟁이에게 갔더니 점쟁이 왈,
“거봐! 그렇게 밉던 시에미는 이제 죽고 없지?”
죽음이란게 굳이 육신이 사라져야 죽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살던 모습이 없어진 것도 죽음이다. 죽음이란 그런 것이다.
시몬느 보봐르의 소설 “인간이면 누구나 죽게 마련이다”라는 책에서
주인공 포카스는 신비한 약을 먹어서 영원히 죽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주인공은 더 이상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죽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죽지 않는 사람에게 고통이나 기쁨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어떤 것도 진지하지 않고 피상적이다. 어떤 희생이나 봉사도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다.
사는 것이 너무 당연하고 끝없이 반복되는 일상에 지나지 않게 된다.
죽음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살아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된다.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 알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죽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희망할 수 있다.
지금 수고하는 일이 끝나고 이 수고가 보상되기를…
죽음 후에 오는 세상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인간의 삶은 무의미하다.
결국, 삶과 죽음은 따로 따로가 아니라 하나인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세상을 바꾸고 자기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그 노력만큼 죽게 된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꼭 자기만큼 살다가 꼭 자기만큼 죽는다.”
이런 사실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중략…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죽음을 넘어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이 있기 때문에
지금 마음이 가난하고, 슬프고, 온유하고, 의로움에 주려도 행복하다는 말씀이다.
아니 그렇다면 기뻐하라는 말씀이다.
주리고 목마르고 슬픈 것은 아까 말했듯이 죽음의 한 조각이다.
예수님 때문에죽음을 맛보게 된다면 기뻐하라, 즐거워하라, 행복해 하여라 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예수님 말씀에서 알 수 있는 한 가지 사실,
“예수님 때문에” 모욕을 당하면 행복하다는 말씀이다.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당하는 까닭은 이 세상을 예수님이 바라는 세상으로 바꾸려 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죽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현실을 체념하고 희생하고 인내하라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끝장나고 모든 것이 새롭게 창조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세상이야 말로 진정한 “끝”이기 때문에
지금의 이 세상을 그런 세상으로 바꾸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라는 뜻이다.
그런 노력을 했기 때문에 지금 당하는 가난과 슬픔이 행복한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방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그리스도의 뜻에 맞게 변혁시킨 결과 지게 되는 현실이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요약된다.
“행복하여라, 십자가를 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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