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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1월 2일 야곱의 우물- 마태 11, 25-30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8-11-02 조회수527 추천수2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 11,25-­30)
 
 
 
 
마태오 11장은 그동안 일어난 일을 재점검하고 있습니다. 현실은 우리가 기대한 것과 항상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님을 일깨워 줍니다. 오히려 예상 밖의 진실에 감탄과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하느님의 계획이 한낱 철부지들에게 드러났습니다. 모두에게 공개되지만 모두가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11,25) ‘아버지’를 정겹게 부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입니다. 하느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주님이요, 천지를 섭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감사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11,25) ‘이것’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와 구원 행적 전부를 가리킵니다. 학식깨나 갖췄다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콧방귀를 뀌었습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합니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도 그를 알아주십니다.”(1코린 8,1­3)

 
못난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느님에 대해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배우지 못한 사람들, 순진한 사람들, 단순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그들은 율법을 잘 알지도 못하고 다 지키지도 못하던 저주받은 군중입니다.(요한 7,`49) 이러한 공평한 사실에 예수님은 감사를 드리십니다. 사실 이스라엘 지도자들한테는 배척을 받아 이스라엘 전도가 실패했지만, 그래도 열두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던 군중들이 당신을 이해한 것에 감사 기도를 바치셨습니다. 보잘것없는 소득에 감지덕지하십니다. 이것이 곧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26절)
 
아버지의 선하신 뜻은 아들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27절) 예수님께서는 계시의 대리자이십니다. 하느님에 관해서 알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예수님한테서 배울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것에 근거해서만 하느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 가는 길이십니다.

 
초대교회는 아들이 아버지를 안다는 것을 신비적으로 해석했습니다. 안다는 것은 곧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 그와 일치하는 것, 그에게 몰입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도 아버지를 사랑하고 일치하고 서로에게 몰입하는 관계로 인도되었습니다. 정작 이 기쁜 소식에 기뻐할 수 있었던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28절) 이러한 초대는 일찍이 집회 51,`23­29에서 지혜를 추구하는 말씀과 유사합니다. “배우지 못한 자들아, 내게 가까이 오너라. 내 배움의 집에 와서 묵어라.”(집회 51,23) 지혜는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 향하고 그 멍에는 가볍습니다. 마태오는 이 말씀으로 예수님이 지혜의 참 스승이심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초대는 보편적입니다. 단 자신에게 예수님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과연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이 자신을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자’임을 인정할 수 있을지…. 그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곤궁한 이들의 무리가 떠오릅니다. 곤궁한 현실이 축복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초대에 반응한 사람들은 그분이 제공하는 안식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무거운 짐’은 다양하게 풀이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에겐 율법이 무거운 짐으로 여겨졌을 겁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기하지 않으시고 풀이하심으로써 짐을 가볍게 하셨습니다. 부자들이나 권력을 쥔 자들의 착취와 횡포도 가진 것 없는 백성들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짐입니다. 외적인 짐도 힘겹지만 자신 안에 있는 마음의 짐도 무겁습니다. 과거의 상처나 자신에게 너그럽지 못한 인색함이 우리의 평온을 깨뜨리고 억누릅니다. 때로는 자신을 옭아매는 의기소침이나 무기력도 떨쳐버리기 어려운 버거운 짐입니다. 이런 것들에서 주님께서 평온을 약속하십니다.

 
그분께 두 가지 태도를 배웁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29절) 온유함은 자신과 이웃에게 끝없는 인내로 베푸는 친절입니다. 자신에게든 상대방에게든 분노하는 일을 멈추고 너그러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또한 겸손은 영혼의 깊은 바닥으로 내려가는 용기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으로 겸손하셨습니다. 그 깊은 바닥을 견디고 이겨내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는 사람은 무거움과 우울함 대신 가벼움과 자유를 누릴 것입니다.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29­-30절) 예수님이 주시는 ‘안식’은 보살핌입니다. 현실의 필요를 채워주시고(6,8.25-­34; 7,11) 다가올 세상에서 맞이할 축복(5,`2­12)으로서, 하느님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한테도 자신들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평안을 선포할 권한이 주어집니다.

 
가뭄에 단비 같은 오늘 말씀은 마태오복음의 정점입니다. 위아래가 바뀌고 앞뒤가 뒤집히는 반전입니다. 고생스럽고 힘겨운 현실을 살다 보면 인생이 좀 보이기 시작합니다.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이건 아닌데 이건 아닌데, 하는 깨달음은 수시로 찾아듭니다. 머리로 습득해서가 아니라 몸으로 익히고 터득해서 얻은 삶의 진리 같은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호된 인생 수련 덕분에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에 눈뜰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깨우침에 예수님이 먼저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무거운 짐을 들어주시고 멍에를 느슨하게 풀어주시며 휴식까지도 약속하십니다.
 
내 십자가를 지고 간 것이 이토록 큰 상을 불러왔다는 것에 아버지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강지숙(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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