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진리는 깨닫는 것이지 배우는 것이 아니다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9-01-31 조회수474 추천수2 반대(0) 신고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코 4:26-32)
 
 하느님 나라는 저절로 자라는 씨앗과 같다고 하셨다.
씨앗은 죽어야만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날 수 있다.
마치 우리들안에 성령을 모시어 진리를 깨닫는 과정을 말하는 것 같다. 
불교의 깨달음에 관한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즉 사람이 땅에 씨를 뿌리면 싹이 트고 자라서 줄기가 나오고,
이삭이 나오고, 열매를 맺는다. 씨를 뿌리는 일은 우리 눈에 보이는데,
씨앗이 자라나는 과정은 마치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 같다.
사람은 씨를 뿌리고 그 나머지는 하느님이 하신다. 인간과 하느님의 공동 작업이다.
하느님께서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공을 들이고 정성을 쏟으며
우리들에게 성령을 주신다.
하느님은 그렇게 당신의 입김을 불어넣으며 생명을 움직이신다.
깨달음을 얻어야 즉 진리를 깨달아야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는 말이다.
진리는 배우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 같다.
 
즈카르야서(3:1-4)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가 주님의 천사 앞에 서 있는 예수아 대사제를 나에게 보여 주었다.
그의 오른쪽에는 사탄이 그를 고발하려고 서 있었다.  주님의 천사가 사탄에게 말하였다.
‘사탄아, 주님께서 너를 꾸짖으신다. 예루살렘을 선택하신 주님께서 너를 꾸짖으신다.
이 사람은 불 속에서 꺼낸 나무토막이 아니냐?’ 
그때에 예수아는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었다.  
천사가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저 사람에게서 더러운 옷을 벗겨라.’ 하고서는,
예수아에게 말하였다.
‘보아라, 나는 너에게서 네 허물을 치워 버렸다. 나는 너에게 예복을 입혀 주겠다.’   
 
“불속에서 꺼낸나무토막”이란, 비록 죄를 저질렀지만,
회개하면서 마음이 새까맣게 탄 우리들의 영혼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자신이 지은 죄를 생각하면서 또한 그 죄로 인하여 상처를 받았을 다른 사람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죄로 인하여 일어나는 결과들을 생각하면서 그 마음이 새까맣게 타버린 것이다.
바로 이런 사람이 흰 예복을 입을 자격을 얻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하얀 사람이 예복을 입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불에 그슬려 까맣게 타버린 사람이 하얀 예복을 입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얀 세마포 안에는 불에 타서 그슬린 새까만 마음이 숨겨져 있다.
그런데 우리 말에 속이 시커멓다는 말이 있다.
불에 그슬려서 마음이 새까맣게 탄 것과 그 속내가 시커먼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도 마음이 타지 않는 사람,
하느님 앞에 죄를 범하고도 그 마음이 타지 않는 사람은 그 속내가 시커먼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마음은 전혀 불에 그슬릴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자기가 원하는대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하고 싶은 것 다하고,
먹고 싶은 것 다 먹는 그런 사람은 평생 자아부정을 하지 않는다.
진리의 요구가 그 사람에게 아무런 느낌도 주지 못한다.
자신은 항상 의롭다고 생각하지만, 매사에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다.
이런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이나 친구들로부터 깊은 사랑과 애정을 받지 못하게 된다.
양심이 둔감하거나 마비된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그 마음이 불에 타서 그슬리지 않는다.
자아부정은 속세의 나쁜 버릇을 과감히 버리고 하늘나라의 것을 취하려고 갈망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영혼은 하느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끊임없이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우리 영혼의 빈 공간을 하느님으로 채우지 않으면
세상 어떤 것도 영혼의 갈증을 해갈시켜주지 못한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 존재적인 외로움을 채워줄 수는 없다.
오직 성령으로 채우지 않는 이상 그런 공허감은 계속 느낄 수밖에 없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진리 안에서 살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데이비드 호킨스는 『호모 스피리투스(I;Reality and Subjectivity)』에서
“그냥 자기의 일을 계속해나가고 나머지는 섭리(providence)에 맡기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 다음, 마지막 걸음은, 신께서 옮겨 놓으십니다.”하고 말하는 것은
진리 안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호킨스 박사가 그의 모든 저서의 서두와 말미를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Gloria in Excelsis! Deo!”이란 말로 장식했던 것도
“언제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즉 하느님의 말씀(진리)에 따라 일하는 것이 곧 섭리입니다.”하는 뜻을 지니고 있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