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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님의 사랑(성거산지기신부님 연중30주 강론)
작성자김시원 쪽지 캡슐 작성일2008-10-30 조회수583 추천수2 반대(0) 신고
 
 
 
Photo by 성거산지기 정지풍 아킬레오 신부님 
 
 
10월에 피는 성거산의 야생화
 
 
 

 

예수님의 사랑


연중 제30주간 마태오 22,34-40절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한다)


사랑한다는 의미는 자기만이 져야하는 짐과. 책임이 있음을 뜻합니다.

아픔도 괴로움도 기쁨도 즐거움도 더불어 나눔을 뜻합니다.

짐을 나누어지지 아니하고 사랑에 따른 책임을 지지 아니하는 사랑은 거짓된 사랑이며 입에 발린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랑에는 아픔과 눈물과 고통과 희생을 전제로 합니다.

진실한 사랑은 입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말로 단장하는 것도 아니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삶으로 표현되고 나타나는 것 입니다.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를 정도로 사소하고 겸허한 작은 친절이 모아지면 인정 있는 따사로운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길에서 거지가 구걸하고 있습니다. 돈 한 푼 쥐어주는 여학생이 있는가 하면 거지 근성을 키워주는 얄팍한 감상적인 동정심 따위는 사회혁명의 적이라고 말하는 젊은 학생도 있습니다. 사회문제가 동정으로 해결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 여학생에게 그녀의 사소한 동정심이 사회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공산주의 사회에도 GNP가 2만$를 넘어서는 사회에도 그 여학생의 인정 같은 것이 메마르면 사람 사는 맛이 없어집니다. 사랑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부유한 사람도 없고 사랑을 줄 수 없을 만큼 빈곤한 사람도 없습니다. 외로운 사람 옆에 한 시간 앉아주는 인정이 그립습니다.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그리스도교의 본질은 우리가 사랑을 통해서만 하느님과 결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모든 생생한 인식은 우리가 하느님을 우리 마음속에서 사랑의 의지로 체험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사랑의 이념이 무한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빛임을 깨닫는 살아있는 사랑의 삶이 인류 정신생활의 누룩이 될 수 있습니다.

 

첫째가는 계명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말씀은 신명기 6장5절을 인용한 것이고, 둘째 계명 <네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은 레위기 19장18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첫째계명은 이 성을 가진 자의 의무로서 다 해야 할 가장 큰 계명이며,

 

둘째계명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병행하여 이웃에 대하 사랑을 가르쳐 주신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숭고한 말씀이며, 전 성서를 간추리고 압축한 말씀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신 세 계명의 핵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라"는 계명은 이전의 모세 율법에서도 주어진 것이었어요.

"너희는 동포에게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한다. (레위기19: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계명이 "새로운"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크리스천들은 더 이상 이웃이 아니라 한 가족이라는 뜻입니다.(새로운 관계)

 

둘째,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를 사랑 하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기준)

 

셋째,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한 가족처럼 사랑할 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까지도 크리스천들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임을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새로운 결 과)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사랑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에요 그리스도인 됨을 입증하는 정체성입니다. 사랑은 인간에게 나타나는 신의 모습 중 하나일 뿐이다.

 

삶의 목적은 그 모든 곳에 사랑의 각인을 찍는 것이며, 악한 생활을 서서히 선한 생활로 바꿔가는 것이다. 즉 진실한 생활을 창조하는 것이며 진실한 생활이란 바꾸어 말하면 사랑에 의한 생활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된장 쉰 것은 1년 원수지만 배우자가 나쁜 것은 백년 원수란 속담도 있습니다.󰡓

가장 친밀한 사이가 부부이면서 때로는 원수처럼 사는 게 부부라고 하는 말도 들을 적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부부들은 그저 무덤덤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초혼의 젊은이들에게는 분출되는 호르몬과 열정과 싱그러움이 있습니다.

설렘과 감동과 가슴 적시는 사랑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의 연륜과 더불어 이러한 것들은 소멸되어 갑니다. 부부들의 삶속에서 사랑의 호르몬은 30개월이 지나면 시들해지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젊어서는 고은 정, 이쁜 정으로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이 들어서는 그것이 아닙니다.

연륜과 더불어 고은정, 미운정, 구린정이 엉키고 그러면서 연민의 정으로 살아가는 것이 부부입니다. 그래서 오래 산 부부일수록 세월의 두께만큼 감사와 긍휼(가엾게 여겨 돌보아 줌) 과 연민의 정은 그 깊이가 깊습니다.

 

 

텔레비전의 한 노인 프로그램에 여든을 넘긴 부부들이 출연했습니다.

사회자는 이 부부들을 상대로 여러 가지 퀴즈를 내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낱말 맞추기 게임이 시청자들의 폭소를 자아내게 만들었습니다.

어느 한쪽이 먼저 낱말이 적힌 글자판을 보고 상대방에게 그것을 설명해 답을 맞히는 게임이었습니다.

한 할아버지가 ‘천생연분’이라는 글이 적힌 글자판을 들고,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를 향해 그 단어의 뜻을 설명했습니다.

“우리처럼 서로 오래 잘 사는 사람을 뭐라고 하지?”

“……….”

할아버지는 답답한 듯 가슴을 치며 다시 설명했습니다.

“우리 같은 부부를 왜 이것이라고 하잖아!”

 

할머니는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웬수”

객석은 순식간에 웃음바다로 변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일단 움찔했다가 다시 진땀을 흘리며 단어의 뜻을 설명했습니다.

“그것 말고, 네 글자로 뭐라고 하지?”

할머니는 더욱 자신감을 보이며 대답했습니다.

“응, 평생 웬수”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둘 사이를 빗대어 ‘천생연분’으로 설명했지만

할머니는 할아버지와의 관계를 ‘평생웬수’로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회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 동안 부부싸움을 안 하셨나봐요?”

“예, 할머니가 내 성격을 알고 모두 받아 주었습니다. 우리는 천생연분입니다. 절대로 싸움 같은 것은 하지 않았어요.” 할아버지가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할머니의 대답은 약간 달랐다.

“부부싸움이요? 말도 마세요, 내 속 썩은 줄을 누가 알기나 하겠어요?

하느님이나 내 검게 탄 속을 아실 겁니다.”

약간은 농담처럼 들리는 이야기지만 사실은 이것이 오늘날 많은 부부들의 자화상입니다.

한쪽은 행복하다고 말하는데 한쪽은 전혀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느 한쪽이 상대의 행복과 불행, 고통과 상처에 대해서 철저히 무관심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할머니의 속이 썩는 줄도 모른 채 ‘천생연분’이라 여기며 살아온 무심한 할아버지,

인생의 고통을 아무에게도 하소연하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아온 할머니.

 

이것이 바로 남자와 여자의 특성을 너무 모르거나, 알려고 노력하지 않으며 살아온 부부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남녀가 진정 행복의 집을 건설하려면 상대방을 알아야 합니다.

남성은 여성을 알고, 여성은 남성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표현한 사랑과 관심이 상대방에게 충분히 전달됐는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이 문제 입니다.

 

더구나 평생을 함께 살아가는 부부는 나이가 들수록 상대방을 배려하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결혼생활만큼 발전과 성숙을 위한 기회를 많이 제공해 주는 곳은 없습니다.

 

갈등과 위기가 행복한 가정의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기도 하며 또한 축복의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갈등은 성패가 갈리는 경기가 아닙니다. 부부갈등은 윈윈게임(win-win game)이 되어야 한다 합니다. 갈등은 부부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갈등이 없는 곳이 있다면 그것은 공동묘지입니다. 확실하게 부부갈등이 없는 곳이 있다면 그것은 혼자 사는 것이겠지요.

 

갈등한다고 사랑이 없는 것도 아니고 사랑한다고 갈등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갈등 속에서도 깊어갈 수 있는 것은 부부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데서 올 수 있는 선물입니다.

 

성거산 성지에서 성거산지기 신부

 

성거산지기 신부님 연중 제30주일 강론

http://cafe.daum.net/sgm2008  성거산 성지 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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