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안데스 산맥의 그리스도 동상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8-09-30 조회수882 추천수0 반대(0) 신고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 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 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버리기를 원하십니까?’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루카 9:51-55)
 
 아르헨티나와 칠레는 당시까지 한번도 전쟁을 치른 적이 없었다.
그런데 1899년 국경분쟁이 생기면서 전쟁 발발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윽고 1900년 부활절 무렵에는 양측 군대가 전선에 배치되었고,
이제 전쟁은 피할 수 없어 보였다.
 
 성주간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몬시뇰 보나벤타가 간절히 평화를 호소하는 설교를 했다.
이 소식이 칠레에 전해져 그곳의 한 주교가 이 평화 메시지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두 나라의 주교가 부활 주일에 양국간의 평화조성에 앞장서기로 합의하였다. 
그 메시지가 점점 확산되어 드디어 양쪽 정부는
국민들의 성화에 못 이겨 영국 에드워드 왕의 중재안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윽고 조약이 체결되어 전선에 배치된 총포가 아무 소용이 없게 되자,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군수 공장으로 가져가 녹인 다음
그 쇳물로 거대한 그리스도의 동상을 만들었다.
축복하는 사제가 오른 손을 내밀고 있는 모습을 하고
왼손은 십자가를 들고 있는 이 동상이 오늘날 ‘안데스 산맥의 그리스도 동상’이다.
 
 이 거대한 동상은 해발 39,620여 미터 높이에 있는
안데스 산맥의 국경선 가까이에 놓기로 했다.
이 동상은 철로가 끝나는 지점까지는 기차로 운반되었다.
그리고 그곳부터는 노새들이 끄는 포차가 이용되었다.
산꼭대기까지 마지막 남은 가파른 오르막 길은 육군과 해군이 밧줄로 끌어당겨 운반했다.
그리하여 이 동상은 1904년 3월 13 지금의 자리에 세워져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동상의 받침대 한 면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 산맥이 무너져 먼지로 변하기 전까지
칠레와 아르헨티나는 그리스도의 발치에서 맹세한 계약을 잊지 않으리라.’
그리고 다른 면에는
그리스도야 말로 양편을 하나로 만드신 우리의 평화이시다.’라고 새겨져 있다.
 
 그런데 이 동상이 세워지고 얼마 안 있어서,
칠레인들은 그 동상이 칠레를 향해 등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무시당했다고 거세게 항의하게 되었다.
이 때 한 칠레 신문사의 사설이 이 위기를 모면하게 했다.
그 사설은 사람들을 만족시켰을 뿐만 아니라 웃게 만들기까지 했다.
단순히 ‘아르헨티나 사람은 칠레인들보다 더 돌봄이 필요하다.’고
적고 있었을 뿐인데도 두 국민의 갈등은 깔끔하게 해소되어 버린 것이다.
 
 다른 식물을 감싸며 자라는 식물들은 줄기를 감는 방향이 정해져 있는 것이 보통인데
나팔꽃은 언제나 왼쪽으로, 초봄에 꽃 피우는 인동은 오른 쪽으로 감싸며 자란다.
그러나 드물지만 더덕처럼 오른 쪽이나 왼쪽 모두 감싸는 식물도 있다.
감싸는 방향은 지지대가 되는 식물을 왼손으로 잡았을 때
덩굴이 엄지 손가락 방향으로 자라면 왼손 방향 식물이며,
오른손으로 잡았을 때 엄지 손가락과 같은 방향으로 감아 올라 가면 오른손 방향식물이다. 
 
 일이 까다롭게 뒤얽혀 풀기 어렵거나 서로 마음이 맞지 않을 때
갈등이 생겼다고 말하는데 갈(葛)은 칡을 말하며 등(藤)은 등나무를 말한다.
그런데 칡은 왼쪽으로 꼬면서 타고 올라가고  
등나무는 오른쪽으로 감고 올라가기 때문에 이 두 나무가 동시에 한 식물을 타고 올라가면
두 나무 모두 자라지 못하며 지지대 역할을 하던 식물도 죽어 버린다.
 
 사실 홀로 일어 서지 못하는 칡 넝쿨은 반드시 필요한 햇빛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나무를 감고 올라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냥 감고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무의 목을 조르고 올라가는 것이다.
 
 우리들의 인간사도 마찬가지다.
어떤 논쟁도 한 개인이나 한 상황의 상태로 인해 일어나는 것은 없다.
대부분의 갈등은 여러 사실들에 의한 복잡한 상호작용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칡과 등나무가 한 쪽으로만 감고 올라가는 것은 논쟁을 하는 사람의 고집과 같다.
한 쪽으로만 감고 올라가지 않는다면
즉 자신의 주장만 하지 않고 남의 의견도 존중한다면 갈등이 생길 리가 없다.
그러나 고집을 굽히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의 목을 조르는 것과 같다.
 
 오늘의 복음에서도 야고보와 요한 제자는 감정에 치우쳐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을 불태우려고 한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감정을 앞세웠던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맞아 들이지 않았을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십자가 형을 받으실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유대인들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을까?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