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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08-09-30 조회수1,066 추천수13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08년 9월 30일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Lord, do you want us to call down fire from heaven
to consume them?”
Jesus turned and rebuked them,
and they journeyed to another village. 
(Lk.9.54-56)
 
 
제1독서 욥기 3,1-3.11-17.20-23
복음 루카 9,51-56
 
 
어제는 너무나 바쁜 하루였습니다. 사람들은 월요일이기 때문에 신부님 쉬는 날 아니냐고, 따라서 한가한 날이 아니냐고 하겠지요. 그런데 저는 어제 전혀 쉬지 못하고 아침부터 정신없이 바쁘게 보냈습니다.

우선 새벽미사를 하고서 방에 들어온 뒤 컴퓨터 앞에 앉아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신문에 쓰는 칼럼, 잡지사에서 부탁한 글, 본당 소식지 글, 그리고 레지오 훈화 글까지 A4 용지 7장에 걸치는 글을 써야만 했거든요. 그리고 이 글들을 오전 중으로 다 쓰고 난 뒤에는 곧바로 부천으로 건너가서 강의를 해야 했습니다. 아무튼 미사 후 부터 아침운동도 하지 못하고 글을 쓰는데 문득 화가 나는 것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은 쉬어야 하는 것 아냐?’

원고 청탁한 사람들도 밉고, 이렇게 월요일에 강의를 부탁한 것도 원망스럽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제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랍니다. 원고 청탁은 일찍부터 들어왔기에 미리 쓸 수도 있었지만, 게으름이 발동해서 미루고 미뤄 원고마감일인 어제에야 간신히 쓴 것이지요. 또한 강의도 수녀님께서 월요일이라면서 어렵게 부탁하셨을 때, 흔쾌하게 허락한 것이 바로 저였거든요. 따라서 남을 원망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남을 원망하고 있는 저를 보면서 한심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더군요.

바로 내게만 기준을 맞추려 했기 때문이지요. 만약 하느님께 기준을 맞추었다면,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토록 사랑하는 나의 이웃에 기준을 맞춘다면 절대로 이러한 생각을 할 리가 없을 것입니다. 바로 내 자신만을 생각하는 교만과 이기심에서 생겨난 잘못된 생각인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도 그러한 교만과 이기심을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들의 마을로 들어갔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맞이하지 않습니다. 이 모습을 괘씸하게 바라 본 야고보와 요한 제자는 이렇게 말하지요.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사실 제자들에게 이러한 힘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있다 하더라도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인 것이지요.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능력인 듯이 과시하려고 합니다. 또한 자신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단죄하려고 합니다.

바로 제자들의 교만과 이기심이 엿보이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는 달리 사마리아 사람들의 편에서 생각하고 그들을 이해하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꾸짖고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다른 마을로 가시지요.

만약 제자들의 행동에 동의하는 주님이라면, 우리들 역시 이 세상에 이렇게 남아 있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잘잘못 하나하나를 벌하신다고 생각해보세요. 벼락을 맞아도 수십 번을 맞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편에서 이해하시고 다시 기회를 주시기에 이렇게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혹시 교만과 이기심이 가득 찬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는 그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대신 주님의 마음을 내 가슴에 새겨 넣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예수님께 혼납니다.



남의 탓을 하지 맙시다.





한 걸음 떨어져 삶을 바라보면(‘좋은 글’ 중에서)

바둑이나 장기를 둘 때
곁에서 훈수를 하는 사람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의 깨달음을 얻습니다.

바둑이나 장기를 둘 때면
막상 게임에 임해 있는 사람은 볼 수 없는 수를
자신보다 더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기가 막히게 훈수 해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게임에 임하는 당사자는 긴장해 있는 상태라
상황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반면
밖에서 지켜보는 사람은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훈수를 잘 해줄 수 있는 것이지요.

삶이 보이지 않을 때는 때때로
삶에서 한 번 벗어나 보십시오.
나무 하나를 보기 위해서는 산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숲 전체를 보기 위해서는 산에서 일찍이 떨어져
보아야 하는 것처럼

어떤 일이 풀리지 않을 때나,
막막하게만 느껴질 때는 계속
그 문제에 매달려 전전긍긍할 것이 아니라
마음의 평온을 유지한 채 멀찍이에서 바라보면
생각지도 않았던 묘수가 떠오릅니다.

한 걸음 떨어져 삶을 바라보면
삶은 우리에게 소중한 힌트를 주곤 하지요.
 

 

 
Edward Elgar - Salut D'amour Op.12 (사랑의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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