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성령을 모독하는 자 용서받지 못한다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8-09-17 조회수595 추천수6 반대(0) 신고
 
 
 
 
 

<성령을 모독하는 자 용서받지 못한다> - 윤경재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마르 3,28-29)



 이 구절은 얼핏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특히 ‘신성을 모독하는 말’과 ‘성령을 모독하는 자’라는 대조법이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비교라서 서로 무엇이 다른가 하고 의문이 들 때가 잦습니다. 신성과 성령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확연하게 다가오지 않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이 말씀은 세 공관 복음서에 모두 실려 있습니다. 다만 루카 복음서에는 선행구를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라고 써 신성 모독하는 말이 예수님 자신을 모독하는 말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혔습니다. 독자들이 오해하지 않고 쉽게 이해하도록 하는 배려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죄의 개념과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하던 죄의 개념이 크게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당시 유대인들이 죄라고 여긴 것은 무엇보다 하느님께서 자기 민족에게 지키라고 내려주신 율법을 어기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613 가지의 율법조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말은 613 가지 율법만 잘 지키면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어찌 보면 지키기 어려울 것 같지만, 상당수 사람들은 이 율법을 잘 지킴으로서 스스로 의인이라고 여겼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자신만만했다는 말입니다.


  복음서에도 이렇게 경건한 사람이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마르코 복음 10,17-27에서 나오는 어떤 사람이 바로 이런 부류의 사람입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으냐?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그는 자신 있게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계명을 지켜왔다고 대답했으며 또 예수님께서도 그 점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심으로 계명만 잘 지키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확실하게 선언하십니다. 자기가 받은 재물과 사랑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고, 나아가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복음서 곳곳에 스스로 죄 없고 경건하다고 여기는 바리사이들의 행동을 지적하시는 대목이 나옵니다. 바리사이들은 실제로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또 자선이나 단식, 기도 행위도 율법에서 요구하지 않는 범위까지 넘치게 실천하였습니다. 율법에 기록된 내용은 하나도 흐트러짐 없이 지켰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지켰으니 다른 사람들도 지킬 수 있으며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선 율법에 미처 기록되지 않은 일들은 양심과 도덕에 어긋나도 아무런 죄의식이 들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소박 율법이 그렇습니다. 율법에 파혼장만 써주면 소박에 제한이 없다고 여기고 남편이 생각하기에 조금이라도 소홀하게 대접하거나 가정생활에 능력이 부족하다고 여기면 이혼장을 써주고 소박하였습니다. 심지어 유대사를 쓴 요세푸스는 자기 부인보다 예쁜 여인을 만나고서 본처가 못생겼다는 이유를 들어 소박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혼해서는 안 된다고 창세기를 들어 설명하였습니다.

 

  이처럼 율법에 따라 죄를 가르는 것은 언제나 ‘경우의 법’에 빠지게 됩니다. 이럴 경우는 죄이고, 저럴 경우는 죄가 아니라고 인간 스스로 심판하고 단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또 인간이 신성 영역을 결정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금기(타부)를 정해 놓고 옭아맨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죄를 판단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사람들이 스스로 정해놓고 그것을 지키지 못했다고 단죄하는 죄는 전부 용서받는다고 선언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의지를 예수님을 통해 선언하셨습니다. 바로 그 선언은 성령의 활동입니다. 성령은 용서와 구원을 선포하는 성령입니다.


 그런데 용서를 선포하시는 성령을 거부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용서를 거부한다는 말과 똑 같습니다. 용서를 거부하면 하느님께서는 주시고 싶어도 용서하실 수 없게 됩니다. 즉 그는 스스로 단죄하는 셈입니다.


  이런 사정을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라고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용서의 하느님이십니다. 죄악에 빠트리려 심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만 인간 스스로 용서를 거부하여 죄에 빠질 따름입니다.


  마태오 복음서 5장 다섯 개의 대당명제를 읽을 때 우리는 어떤 두려움에 빠져듭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이 요구하는 범위보다 더 엄격하게 지키라고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왜 이 지키기 어려워 보이는 말씀을 하셨는지 해석할 때 몇몇 의견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차피 인간이 제대로 지킬 수 없지만 목표를 높이 정해 놓아야 조금이나마 따라가게 되므로 이렇게 의도적으로 써 놓으셨다고 해석합니다.

  또 어떤 이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새로운 율법을 통해서 인간이 보잘것없고 무능함을 자각하고, 하느님께 머리를 숙이게 하는 계기를 주고자 이렇게 쓰셨다고 해석합니다. 오직 하느님의 은총과 영광을 믿음으로써 돌파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선언이 종말 때를 말 한 것이라서 그렇게 엄격한 잣대를 선포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참의미는 우리가 스스로 지키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말씀이라기보다 용서와 구원의 성령을 받으면 우리에게 사랑의 정신이 차고 넘쳐 저절로 이렇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어렵지 않게 이웃과 나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처럼 강제로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아 따르면 우리 안에서 용서와 사랑이 저절로 우러나와서 실천하므로 율법보다 더 어려워 보여도 아무 거리낌 없이 지킬 수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을 받아들일 때와 성령을 거부하여 모독할 때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차이는 이렇게 큽니다. 성령은 우리를 변형시키는 힘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