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마음의 순명과 행위의 순명 [게쎄마니 그리고 십자가]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08-09-23 조회수600 추천수1 반대(0) 신고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화요일 복음 말씀>

.................................................................................................................................................................

실행하기 위해서는 ㅡ 순명이 먼저이며

순명하기 위해서는 ㅡ 겸손이 먼저입니다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예수

예수님께서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 

 

흔히 우리들에게는 빨간색하면 '빨갱이'라고 의식이 도식화 되어 있습니다. 위의 성경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하며 기록하고 있습니다. 빨간색하면 빨갱이라고 상상하듯이 악마하면 흉측한 괴물로 도식화 되어 그렇게 상상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탄(악마)도 "빛의 천사의 탈을 쓰고 나타난다" (2고린토서 11, 14 참조)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 분명하게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라는 설명을 읽었기 때문에 악마의 시험인 그 목소리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에 대해 이미 정체를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서에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 하지 않았느냐?" 하고 대답하셨다. 하는 말씀을 쉽게 당연하다는 듯이 인식할 것입니다.

잠시 예수님께서 시험받으신 광야로 우리 자신들이 들어가 보도록 합니다. 우리들 중에 누구든지 그 광야 (현재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 처럼 악마의 유혹을 받는다고 자신이 악마의 정체를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말하면 빨간색하면 '빨갱이'를 연상하듯이 악마라 하면서 '흉측스런 괴물'의 존재가 자신 앞에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런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악마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면서 예수님 앞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나타난 "유혹하는 자" (마태오 4, 3 참조)는 흉측스런 괴물이 아니라 "천사의 탈"을 쓴 자 (자신의 외부 밖의, 혹은 자신의 내면 속의 어떤 존재)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말 어려운 처지에 놓였습니다. 그분께서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시기에 유혹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돌이 빵이 되게 하는" 기적의 유혹을 겪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유혹에 빠진다면 아마도 이런 내면의 음성("내적 담화")을 자기 안에서 듣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내가 주야로 굶주렸기 때문에 빵을 주시려고 하는 것이다" 말할 것입니다.

자신이 편한대로 혹은 자기 마음이 가는대로 그것이 나에게 '실존적'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이다고 여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향해서 지향해 나갈 것입니다. 예수님 처럼 "성서에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 하지 않았느냐?" 하는 진리(성경 말씀)에 대한 믿음 보다는 자신의 성향에 따라 그리고 처해진 자신의 입장에 따라 유혹을 받아 들이게 될 것입니다. (하와의 뱀, 창세기)

진리 (아버지의 말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순명을 거부하고, 순명 이전에 하느님께 대한 겸손을 지키지 않은 까닭으로 인간은 유혹에 넘어져서 결국에는 진리를 거스리게 되어 지는 것입니다. '말씀의 실행'이 있기 위해서는 말씀에 대한 순명 그리고 그 순명을 위한 하느님께 대한 겸손이 영혼에게는 참으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게시 글에서는 순명의 두가지 다른 차원에 대해 살펴 보고자 합니다.

 

게쎄마니에서의 기도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순명에는 두 가지의 차원이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게쎄마니에서 일어난 <마음의 순명> 이며 다음에는 십자가에서 벌어지는 <행위의 순명> 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통 이전에 게쎄마니에서 마음의 고통을 먼저 겪으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혹독한 고통의 과정은 <행위의 순명>이며, 게쎄마니에서의 피땀 흘리신 기도의 과정은 <마음의 순명>이다고 봅니다. 우리는 대체로 어떤 '행동에 대한 의지'에 대해서 순명(순종)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 '행위의 순명' 곧 실천(실행)이다고 하겠습니다. 이 '행위의 순명'은 이미 행동 이전에 <마음의 순명>이 벌써 있었슴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십자가 순명' 이전에 이미 겪으신 '게쎄마니 순명'에서 그분의 참다운 순명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다수 자신의 현재 상황에서 벌어지는 행동의 의지적인 측면에서 '순명의 의미'를 보고자 합니다. 하지만 행동의 의지(곧, 실행)은 <마음의 순명>이 없고서는 완전하게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게쎄마니에서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는 참다운 <마음의 순명>은 십자가에서 완전한 <행위의 순명>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자신 앞에 벌어지는 일(상태)에 대한 그것에 관하여 순종(복종)하는 것을 순명의 차원으로 보고자 하지만 '참다운 순명'의 차원은 이미 <마음의 순명>에서 비롯되어 '완전한 순명'의 차원인 <행위의 순명>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라는 일(상황)이 일어나기 이전에 마음으로부터 벌써 순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의 일을 알지 못합니다. 미래의 어떤 일이 벌어지고 난 다음, 이 일에 대한 행동의 의지에 대해서만 '순명'으로 국한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음이 따르지 않는 순종(복종)은 참다운 순명이 아닙니다. '완전한 순명'을 이루지 못합니다. 단지 앞에서는 명령에 순종(복종) 할 뿐, 뒤에서는 욕을 하고 흘뜯기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래의 일이 어떻게 될지라도 (모르는 상태에서) 오직 마음으로부터 순명하는 <마음의 순명>은 어쩌면 육신의 고통보다도 더 고통스런 일이 됩니다.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주소서" ... 미래의 십자가 고통이 어떤 형태로 당신 자신에게 닥쳐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인간적으로 두렵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당하게 되는 여러 고통에 대해 인간적으로는 "이 잔"을 피하고 싶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행위의 순명> 이전에 먼저 <마음의 순명>으로부터 달아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내면 상태를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하지 못합니다. "이 돌들을 빵으로 만들고 싶은" 유혹에 흔들리게 됩니다.

현재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어쩔 수 없이) 자기 행동으로 의지적인 힘(실행)을 드러낼 수는 있겠지만 현재 벌어진 일이 있기 전 이미 하느님께 마음으로부터 순명하겠다는 '참다운 마음의 순명'의 기도는 차마 드리지 못하고 현실적으로 피해 가기만 했던 것입니다. 이는 언제나 자신의 기도가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주소서"가 되어진 것입니다. <마음의 순명>이라는 차원에 대해 알지 못하면 유혹에 쉽게 무너지고 맙니다.

복음에서 기록된 '말씀의 실행'인 '완전한 행위의 순명'은 '참다운 마음의 순명'에서 시작됩니다. 미래의 일(상황)에 관하여 알지 못하는 이전의 상태에서 오직 [ 하느님 아빠 아버지, 제게 주어지는 시간과 상황들에 대해서 순명할 수 있도록 제게 겸손한 마음을 주시고 온유한 마음을 주시어 주님의 은총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온전하게 이룰 수 있게 저를 이끌어 주소서 ] 하는 기도가 우선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마음의 순명>은 진정 힘이 드는 '참된 봉헌'이 됩니다. 입으로 그저 할 만한 것이라면 쉽겠지만 온 전인적인 힘으로 기도 할 때면 피땀이 흐를 수 있는 고통이 됩니다. 예수님의 가시관은 그분께서 겪으신 마음의 순명에 대한 고통의 차원인 것입니다. 영혼의 <마음의 순명>에서는 유혹은 결코 이기지 못합니다.

사람들의 영혼이 유혹에 빠지고, 넘어지는 것은 <마음의 순명>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행위의 순명>에 대해 거부하고 반발하게 되며 늘 유혹 속에 갇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의 소유자, 그런 영혼이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는 '마음의 순명'을 갖추어 온갖 유혹의 음성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거짓 예언자가 여기 저기 나타나서 많은 사람들을 속일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 24, 11 ; 13>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