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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박병규 신부님 요한 묵시록 해설 제20강 하느님의 백성/ 선택된 이들의 무리인 교회(요한 묵시록 7장)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3-12-22 조회수465 추천수1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요한 묵시록 해설 제20강 하느님의 백성,

                        선택된 이들의 무리인 교회(요한 묵시록 7장)

 

+ 찬미 예수님

한 주간 또 잘 지내셨습니까? 네, 그래요.

우리 요한 묵시록을 계속해서 우리가 한번씩 읽어보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가 총 정리를 한번 해 볼까 합니다.

 

강의 전반부에는 우리가 요한 묵시록을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라고 봤습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의 요한 묵시록 접근하는 어떤 마음가짐이라고 할까요?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복음. 기쁜 소식이죠.

 

왜 그 무시무시한 장면들이 펼쳐지는데 왜 기쁜 소식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부활 사건 그것이 우리가 현실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있어서 조금 더 부활의 희망과 기쁨이 되도록 그렇게 이끌어 주는 것이

바로 요한 묵시록의 주된 어떤 목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 묵시록의 무시무시한 장면을 우리가 6장을 지난 시간에 봤는데요.

그 어려움, 죽음도 있었고, 전쟁 뭐 기근 뭐 그러한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또 

특별히 다섯 번째 봉인을 탁 뜯었을 때 제단 아래에 있는 영혼들이 외치지 

않습니까? 우리들의 피의 복수를 언제까지 미루시렵니까? 

 

그만큼 어렵다는 거죠.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가 이제 요한 묵시록이 어느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고 가는가? 오늘 바로 7장에서 그 복음, 기쁜 소식을 한번 

더 살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강의는 기뻐야 되요. 내가 구원의

자리에 대해서. 우리가 구원의 자리가 뭔가? 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내용을 7장에서 볼 것입니다. 

 

우리가 이 7장의 내용은 계속 요한 묵시록에서 반복이 됩니다. 궁극적으로 21장,

22장의 천상 예루살렘까지 연결이 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요한 묵시록은

하나의 처음 이야기가 이렇게 우리 소설의 이야기처럼 자꾸 이렇게 뭐 기, 승, 전,

결입니까? 그런 단계별로 넘어가서 뭔가 결론을 도출하는 그런 책이 아니라,

미리 이미 결론이 났고 그것을 약간 다른 관점에서 계속 본다.

 

크게는 일곱 개 봉인, 일곱 개 나팔, 일곱 대접. 그래서 그런 어떤 약간 다양한

측면에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살펴보는 책이다. 그래서 7장에 봤는 내용이 천상

예루살렘 21장, 22장에서 또 나오고, 7장에 봤던 내용이 또 일곱 나팔, 다 불고

나면 거기 또 나오고, 또 일곱 대접이 끝나서 또 나오고, 하여튼 그런 어떤 약간

반복되지마는 그 똑같은 내용의 반복이 아니라 관점이 약간 다르게 해서 새로운,

구원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는

거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서 우리가 받은 그 구원의 기쁨을 다양한

관점에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 하시다보면, "아우 저 자매, 저 형제님 뭐 은총을 받았다.

하, 뭐 신앙을 가져서 참 좋다."라는 게 한결 같이 똑같은 내용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 사람은 이렇게 해서 하느님을 적극적으로 더 믿게 되고, 저분은 또 저런 삶의

자리에서 또 하느님을 찬미하고 이런 다양한 것이 요한 묵시록에도 그런 관점으로

쓰여졌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자, 우리가 6장 마지막에 지난 시간에 봤을 때 어떤 내용이 있었느냐 하면,

하느님의 분노, 진노의 날. 그래서 마지막 구절이 이렇습니다.

* 묵시 6,17: 그분들의 진노가 드러나는 중대한 날이 닥쳐왔는데,

   누가 견디어 낼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진노의 날, 이 분노의 날. 그런데 동시에 6장에서는 어린양의 분노의 날

그래서 그분들의 진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성경은 여러 필사본이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이 딱 처음부터 똑같이 한권만 쓰여져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필스본이 있는데 그분들의 진노라고 표현된 것도 있구요. 그걸 그냥 하느님의

진노로 단수로 되어 있는 필사본도 있습니다.

 

문제는 하느님과 어린양을 같이 놓느냐, 하느님만 놓느냐의 문제인데,

우리 요한 묵시록의 그리스도론적 관점에서 우리가 한번 봤습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 한분 하느님과 같다고 그죠? 그래서 어좌 한가운데에

서 있는 어린양, 살해되었으나.

 

어떻게든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로 둘려고. 왜? 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유다계 그리스도인이고 유다교 전통을 너무 많이 알아요. 너무 잘 알아요.

그래서 구약의 모세 오경, 예언서 뭐 모든 어떤 묵시문학적 요소까지 다 가지고

와서 기록을 하는데 그러한 유다이즘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는 저가가 문제는

하나이신 한분 유일하신 하느님인데 예수 그리스도도 하느님이죠?

 

어떻게 이거를 매치시킬까? 유다인들은 믿기 힘들죠?  한분 하느님이라고 했는데

그 하느님만이 계셔아 되는데 무엇이 뜬금없이 나타나가지고 요거도 하느님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 입장에서는 하느님이라고 고백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이때까지 우리가 믿어 온 구약 전통 안에서 믿어온 그 하느님이 바로 이 하느님

이라고 믿기에는 많이 어려웠던 거죠.

 

그것을 우리가 자꾸 이렇게 요한 묵시록 저자가 같이 놓으려고.

그래서 여기 필사본이 뭐 그분의 진노, 하느님의 진노, 혹은 그분들의 진노

이렇게 다릅니다마는 우리 요한 묵시록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봤을 때는 그분이나

그분들이나 같은 하느님이다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자, 하느님의 진노의 날, 그분들, 하느님과 어린양의 진노의 날, 이건 우리 구약

전통에서 하느님의 심판이 시작되는 것이죠. 심판이 시작되는 고유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누가 그 분노를 견디어 낼 것인가?

 

자,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라면은, 신앙을 가진 이들이라면은 어때요? 분노가 오든, 진노가 오든

뭐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 기뻐해야 되요. 왜?

 

마르코 복음 13장에 보면, 그날이 닥치면 뭐 이렇게 험난한 고통들이, 전쟁이,

서로가 막 시기하고, 질투하고, 서로 고발하고 이런 모습들이 펼쳐집니다.

그날이 오히려 우리는 기뻐해야 됩니다. 왜?

 

심판 다음에 뭐가 있는데요. 구원을 외칩니다.

정말 우리 구원의 날이 도래하기 때문에 그 심판, 진노의 표징은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희망의 표징으로 돼 버립니다. 그래서 이 닥쳐온 분노를 누가

견디어 낼 수 있겠느냐?라고 외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6장에 보면,

 

* 묵시 6,15-17: 그러자 땅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장수들과 부자들과 권력가들,

   또 종과 자유인도 모두 동굴과 산 바위틈에 몸을 숨기고, 산과 바위를 향하여

   말하였습니다. "우리 위로 무너져,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얼굴과 어린양의

   진노를 피할 수 있도록 우리를 숨겨 다오. 그분들의 진노가 드러나는 중대한

   날이 닥쳐왔는데, 누가 견디어 낼 수 있겠느냐?

 

여기서 땅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장수들과 부자들과 권력가들, 또 종과 자유인도

모두라는 표현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다양한 어떤 사회 계층을 이야기 하고

있죠? 이 사람들이 다 몸을 숨겨요. 왜?

 

진노의 날 보면 우리 믿는 이들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아까 제가 기쁨, 희망이

펼쳐지는 메세지라고 그랬으니까, 달려나와야 되겠지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숨어요. 바위여, 산이여 나에게 무너져 나를 숨겨 다오. 왜?

 

그거 못 견디겠으니까. 이런 사회 계층 쭉 나열하는 사람들은 결국 어떤 의미에서

땅의 주님들이라고 우리가 평할 수 있습니다. 땅의 주님들. 묵시 문학에는 땅은

불행의 장소이다. 그래서 그 불행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 믿음이 없는 사람들,

이 사람에게는 피하고 싶은 거예요.

 

자, 오늘 제가 이렇게 6장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것은 7장에서는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이 땅의 주민들과 다른, 그래서 이 하느님의 진노의 날, 하느님과

어린양의 분노의 날 이날을 기쁜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의 모습은

7장은 바로 연결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봉인을 뜯으면서부터 하나, 둘씩 뜯으면서 고통을 이야기 했고, 참을 수

없는. 언제까지 이 피의 복수를 미루시렵니까? 이렇게 쭉 나오다가 결론 마지막

여기의 결론 부분에 있어서 우리가 일곱 째 봉인 뜯기 전에 결론 부분이 뭐냐 하면

구원의 자리, 구원 받은 이들은 어떤 것인가?

 

누가 하느님의 진노의 날에 견디어 내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인가?
이 어떤 구원 받는이의 정체성에 대해서 우리가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7장 1절을 보면요.

 

* 묵시 7,1: 그다음에 나는 네 천사가 땅의 네 모퉁이에 서서 땅의 네 바람을

   붙잡고서는 땅에도 바다에도 그 어떤 나무에도 바람이 불지 못하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 4가 반복이 됩니다. 네 천사, 네 모퉁이, 네 바람.  바람도 숫자가 세어져요?

한 바람, 두 바람, 세 바람... 예, 안 되죠? 이 4라는 숫자가 계속 반복 되는 것.

4는 무엇이라고 그랬죠? 의미가? 세상이라고 묵시 문학적인 표현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4라는 숫자가 뒤에 천상 예루살렘에 가보면 네모 반듯

하다고 합니다.

 

요한 묵시록 안에서 세상 전체를 의미하지마는 4라는 숫자가 전체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인가? 완전하다는 느낌, 모든 것이기 때문에 충만하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래서 천상 예루살렘 성전도 네모 반듯해서 길이와 너비가 똑같다.

 

* 묵시 21,16: 도성은 네모 반듯해서 길이와 너비가 같았습니다. 그가 잣대로 도성을

   재어 보니,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똑같이 만 이천 스타디온이었습니다.

 

완벽한 것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천상 예루살렘 나중에 우리가 한구절 한구절 보겠지

마는 이거는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도시가 나옵니다. 그 측량해 논 고것대로 도시를

해 보면요 수백키로인데 뭔 도시가 그렇게 길이 넓이가 수백키로 되는 도시가 어디

있습니까? 한 나라면 몰라도 그죠?

 

이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최대한의 완벽한 도시. 왜? 느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고, 완벽하시고, 완전하신 분이시니까 그분이 주시는 하느님과의

어떤 일치, 그 자리는 완전해야 되는 것이죠. 그래서 여기 네 천사, 땅의 네 모퉁이,

네 바람 이렇게 있다는 것에 우리가 완전함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것.

 

자, 이제 모든 것에서 그러한 자리, 공간을 배치하고 난 후에 구원 받는 이들이

뭔지를 이야기합니다. 이게 뭔가? 앞의 6장에서는, 고통의 이야기에서는 전쟁이든,

기근이든 뭐 이런 것들을 이야기할 때 하나하나 따로따로 뭔가 이야기하는,

 

그리고 하늘의 해가, 달이 없어지고 그죠? 하늘이 막 말리고 이러한 어떤 모습에서

차근차근 뭔가 하는 것 같은데 거기서 하나하나 뭔가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 같은데

7장 여기서부터는 바로 넷, 넷이라는 게 반복 되면서 네 천사, 땅의 네 모퉁이,

네 바람 이런 것을 이야기하면서 모든 것, 전체.

 

어떤 의미에서 구원이라는 자리에서 이야기할 때는 완전히 싹 다 이야기하는 거죠.

뭔가 파괴할 때는 하나하나씩 합니다. 뒤에 가서도 일곱 대접, 일곱 나팔을 할 때도

땅의 삼분의 일이라든지, 땅의 어떤 일부분, 믿지 않는 이들 뭐 이런 식으로 나오는

구원만 노래하면 전체입니다. 구원에 대해서는 소위 요한 묵시록이 통이 아주

큽니다.

 

요 대비가 확 되는 거예요. 멸망은 아주 조심스럽게. 왜?

행여나 믿는 이들이 다칠까봐. 그런데 구원을 이야기할 때는 누구든 다 와라.

뒤에 가면  어떤 문장까지 있느냐 하면,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천사가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여기는 뭐 좋은 이, 나쁜 이, 선인, 악인 이런 구별이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는 이러한 어떤 심판의 모습, 끔찍한

모습을 피해 갈 것이고 그렇지 못한,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심판이 내려간다라는 구조로 요한 묵시록은 대비하고 있습니다. 지금 네 숫자에

대해서 머리 속에 딱 넣고요. 구원은 이렇게 요한 묵시록이 모든 이에게 열려져

있는 것이구나라는 개념을 머리 속에 넣어 두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7장 전체를 보면, 그런 이런 모든 구원인데 7장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1) 묵시 7,1-8: 12 부족

2) 묵시 7,9-17: 셀수 없는 군중, 무리

 

왜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누는가?

구원받은 이가 그런 세상 모든 이를 어떻게 구분하고 있는 것인가?

요한 묵시록은 두 부분으로 나누고 있어요.

 

첫 번째 여기서 보면, 유다 그 이스라엘 지파에서 나옵니다. 열두 부족에서.

이 12라는 숫자는 우리 너무 잘 압니다. 12가 어떤 보편적이고, 하느님 백성이고,

물론 후기 유다이즘으로 가서 이것이 세상의 모든 어떤 구원의 보편적인 어떤

숫자로 등장합니다마는 일단 출발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열두 부족이죠.

 

뭐 참고로 열두 부족은 언제 확실하게 세워졌습니까? 야곱의 아들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하지마는 실상 열두 부족이 생겨난 것은 솔로몬 때에 행정 구역을

나누면서입니다.

 

사실 이집트를 떠나서 광야 생활을 하고 가나안에 정착한 그래서 광야를 체험한

그 부족은 세 개의 지파고 나머지 열두 부족이라는 12라는 숫자가 단일 민족,

우리가 다 처음부터 다 경험해 가지고 정착한 그런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대표

하는 것이 아니라,  12라는 통일국가, 이제 우리는 완전한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

 

처음부터 똑같이 열두 부족이 간 것이 아니라, 그래서 인제 통일이 됐고 이것은

우리의 한 나라다라는, 이제 모두는 하느님의 백성의 전체를 의미하는 숫자가

12가 되는 것이죠.

 

* 12라는 숫자: 하느님의 백성 전체를 의미

 

요것이 나중에 인제 아시리아에 망하고, 바빌론에게 망하고, 페르시아에게

망하고 뭐 이렇게 계속 지배를 받다보니까 자꾸 이렇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해 보니까 뭐야? 하느님이 우리나라만 최고로 쳐 주고, 우리만 하느님

백성인 줄 알았더니만 아, 이게 아니었구나.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주인이시고, 거기의 임금이시고, 세상 모든 이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조금 잘못하면 아시리아를 통해서, 바빌론을

통해서 우리를 벌 주시는구나. 바빌론, 아시리아 그 큰 제국도 하느님의 어떤

섭리 안에서 움직이는 나라구나라고 생각하게 되는.

 

그래서 이 12라는 숫자 자체는 모든 세상, 모든 사람 안에 하느님을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 개념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어쨌든 열두 부족의 뿌리는

이스라엘에 관련된 뿌리다. 12라는 숫자가. 그 다음에 7,9-17을 보면,

 

여기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셀 수 없는 군중, 무리라고도 되어 있죠?
군중하고 무리라는 이 단어가 이렇게 나오니까 이건 다른 소리입니다마는

빵을 만드실 때 몇 명이 있었어요? 오천 명? 장정만도 오천 명. 여자는 어디

갔어요? 예수님은 남자들만 따라다녔나?

 

이 군중이라는 단어는 왠지 저는 약간 좀 생각이 비판적인 생각이 약간 확 드는

게 우리나라 지금 상황도 마찬가지예요. 유다 사회 자체가 여자와 아이들은 숫자

에 셈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왜 성전의 구조를 봐도, 이스라엘 성전 구조를

봐도 처음에 들어가면 뭡니까? 

 

여인의 뜰, 그 다음에 이스라엘의 뜰입니다. 여인의 뜰 다음에 남자의 뜰이 나와야

상시적인데, 일관성이 있는 거 같은데 여인의 뜰 다음에 남자의 뜰이 아니라 이스

라엘의 뜰입니다. 이게 뭐냐?

 

 

여인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는 정도로 차별이 심했다는 거죠. 그래서 이 군중

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갑자기 좀 그래요. 이 셀 수 없는 군중이 남자들만 이야기

하는 것 같아서... 조금 남녀 차별. 하루 빨리 남녀가 차별이 없어져야 해요. 우리

유다 사회를 떠나야 해요. 차별이 없는 사회에서 살아야 되요. 그런데 이 군중

안에는 여자도 들어갑니다. 셀 수 없는 군중.

 

자, 아까 위에는 열두 부족. 셀 수 있지요? 그리고 막 여기서 몇 명 뽑습니까?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구체적으로 숫자가 나옵니다. 그죠? 그런데 이 셀 수

없는 군중은 셀 수가 없어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여기에 구원의 보편적인

것을 의미하기 위해서 구원의 보편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 이 방향성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열두 부족에서 셀 수 없는 군중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럼 이것이 열두 부족은 한계적인 어떤 틀이 있는. 다시

말해서 선민의식인가? 왜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리만 구원 받는다라는 어떤

그런 개념에서 열둘이라는 것이 배타성을 지닌 숫자로도 해석을 합니다마는.

 

그러나 이 두 개를 요한 묵시록 저자는 7장에서 같이 놓고 같은 어떤 차원에서

보고 있다라는 것. 연결 고리가 되는 것. 조금 있다가 우리가 이 12라는 이 부족의

어떤 의미를 살펴 보겠는데 요한 묵시록 저자의 아주 기막힌 어떤 관점을 보게

됩니다. 구원의 보편성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차별 없는 사회를 꿈꾸는 그런

어떤 차원으로 넘어가기 위해서 요한 묵시록 저자의 노력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자, 그러면 이 두 부분에 대해서 하나하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

그 바람부터 우리가 시작을 했습니다. 그죠? 텍스트 안에서 바람부터 하나하나씩

설명을 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자, 바람은 네 바람이 있고, 이것을 천사들이 다

잡고 있어요. 네 모퉁이의 바람을 잡고 있다. 바람이 뭐길래? 뭐 머리 속에 바람

난 거(?) ^^*~~~ 이런 거 생각하지 마시고. 바람은 아주 좋은 의미입니다.

 

바람은 시편 104편에 보면, 구약의 전통에서 바람의 의미를 우리가 좀 알면

아, 왜 잡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 시편 104,4: 바람을 당신 사자로 삼으시고 타오르는 불을 당신 시종으로

                    삼으시는 분.

 

이 자연의 모든 피조물이 당신 것이죠. 그런데 이 바람을 당신 사자로 삼으신다.

당신이 하고자 하는 뭔가를 전하고자 하는 어떤 그런 도구로 바람을 인식하고

있는 시편 저자의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호세아서 13장 15절에 보면,

* 호세 13,15: 에프라임이 형제들 가운데에서 번성하여도 동풍이 불어오리니

   광야에서 차올라 오는 주님의 바람이 불어오리니 그의 샘은 마르고 우물은

   메말라 버리리라. 그 바람이 보물 창고에서 값비싼 기물들을 모조리 앗아

   가 버리리라.

 

자, 하느님께서 이 동풍, 바람을 모를? 우물을 메마르게 한다. 이 바람을 도구로

해서 하느님의 심판이 내리친다는 거죠. 자, 이 바람이 네 모퉁이에 가득, 온전한

세상 모든 것. 그죠? 바람이 지금 불어야 되는데 어떻게? 붙잡고 있어요. 어떤

나무에도 바람이 불지 못하게 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 다음에 천사 하나가 하느님의 인장을 들고 오거든요. 그리고 올라오면서 하는

말이 * 묵시 7,3: "우리가 우리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장을 찍을 때까지 땅도

바다도 나무도 해치지 마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이 분노의 날, 6장에서 시작한 분노의 날. 뭔가가 할려고 하는데 천사가

하느님의 인장을 탁 들고 오면서 "바람, 절대 꼼짝하지마. 이제 움직이지마."

뭐를 하기 위해서? 해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구원의 어떤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구약의 표징들을 가지고 와서 딱 묶어

놓습니다. 묶어 놓는데 여기서 우리가 언제까지? 인장을 찍을 때까지 땅도 바다도

아무도 해치지 마라.  자, 기간이 조금 있어요. 언제까지? 하느님의 인장을 다 찍을

때까지 요 기간을 줍니다. 저번 시간에 우리 봤죠?

 

뭔가 다 폭삭 망하게 하고, 벌을 딱 주기 전에 무슨 사건이 있다구요?

예, 침묵위 시간, 쉼의 시간이 있다는 것이죠. 왜? 회개하라고. 빨리 돌아오라고.

고 침묵, 약간의 쉼의 시간을 줍니다. 사실 이 쉼의 시간은 요한 묵시록의 어떤 고

유한 것이라기 보다는 유다 묵시문학 안에서 발견되는 것들입니다. 뭐 하기 전에?
징벌을 주기 전에, 심판을 하기 전에.

 

* 쉼의 시간: 유다 묵시문학 안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징벌(심판) 하기 전에

   주어지는 것.

 

예컨대 에녹 66장에 보면, 노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노아가 배를 만드는 시간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가 탁 됩니다. 우리 구약 성경에 어떻습니까? 그만 배 만들었죠?
실었죠? 그만 가잖아요. 그런데 배를 만드는 시간에 대한 묘사, 배를 만든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하느님께서 보시니까 세상이 다 썪은 거예요. 아니다. 쓸어버려야 되겠다. 물로.

이렇게 사시는데 의인 아나 노아만 있다. 그리고 나머지 동물들 한 쌍씩 태워서

거기에 있는 나머지 다 쓸어버리시는, 징벌의 시작 전에 배 만드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징벌을 피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는 것이지요.

 

예, 그 다음에 바룩 2서 6장 4절에 보면, 천사가 예루살렘을 불태우려고 합니다.

왜? 여기도 뭔가 잘못 됐겠죠? 하느님의 듯을 또 거부한 것이겠죠. 그래서 천사가

예루살렘을 불태우기 전에 성전에서 사용된 뭐 여러 집기류들 있지 않습니까?

이것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고 기간이 있습니다.

 

다 태우는데, 다 태우고 뭔가 멸망의 어떤 징벌을 줘도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하느님의 의인,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그 어떤 신앙인, 믿는 이들은 안전하게

구원 할려는 그런 의지는 우리가 이 쉼의 시간, 언제까지? 인장을 다 찍을 때까지.

되게 이 모습은 보험을 들어 놓은 거 같애요. 여기 느낌이.

 

왜냐하면 인장이 다 찍을 때까지는 아까 네 모퉁이 다 잡고 있죠? 세상 모두 인장을

다 찍어야 되는데 그죠? 뭐 그렇게 큰 죄를 지어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자비의 하느님은 사라지지 않으실 거 같애요. 하느님은 자비 자체이시니까

왠만한 죄를 짓더라도 너무 죄의식에 사로잡히지 마시고 이런 자비로우신 하느님,

우리에게 구원을 어떻게든 다 주시고자 하시는 하느님. 그런 어떤 하느님에 대한

우리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자, 이 하느님의 인장을 들고 올라오는 천사가 어디서 오냐하면, 동쪽에서 옵니다.

왜 동쪽일까? 왜 동쪽에서 올라오고 있을까? 우리 왜 잘 때 머리를 어디에 두고

자고 합니까? 왜 우리 어른들 동쪽으로 두고 자라고 그러시잖아요.

 

동쪽이라는 것은 유다이즘 안에서  큰 상징이 있어요. 에덴 동산이 동쪽에 있었고,

또 바빌론에서 해방된, 누가 무슨 칙령? 누구의 칙령? 키루스의 칙령이죠.

예, 그 칙령에 동쪽에서 오리니 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 "발길이 닿는 곳마다 승리는 불러오는 이를 누가 동방에서 일으키셨느냐?"

* 주 하느님께서는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 하나를 꾸미시어, 당신께서 빚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

 

동쪽은 뭔가 해방, 기쁨, 하느님과 일치, 하느님의 희망의 메세지가 오는 곳.

그러니까 동쪽이 좋을 수밖에 없죠. 해도 뜨고. 이 다른 모든 문화권 안에서 동쪽

이라는 거는 의마가 아주 좋은쪽일 것입니다. 해가 떠오르는 방향이기 때문에.

 

해가 지는 서쪽은 뭔가 조금 싫은 거죠. 사라지고, 소멸하고 이런 느낌이 있어서

그런지. 해 돋는 쪽에서 올라옵니다. 좋은 거를 가지고 올라 온다는 거죠. 좋은

것을. 하느님의 인장.

 

자, 인장이 문제입니다. 하느님의 인장.

우리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장을 찍을 때까지라는 거예요.

인장이라는 단어가 '스프라기스'라는 단어가 요기서 사용이 됐습니다.

 

* 인장(묵시 7,21): 스프라기스

 

요것은 우리가 직접적으로 에제 9,4에 보면, 히브리 알파벳 여기는 번역을 표라고

되어 있는데 하느님의 사람, 하느님의 백성,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표가 찍힌다고 할 때 히브리 본문에 보면, 히브리 알파벳 중에 '타우'를
여기다 씁니다. 요 표를 딱 한다는 거죠. 알파벳을 찍는 거예요. 우리 ㄱㄴㄷㄹ ...

뭐 그 중에 하나를 찍는다는 거예요. 하느님의 소속, 하느님의 것이 됐다는 거예요.

 

그것을 찍는 것인데 요 표가 나중에 우리가 13장에 가면 짐승들, 악의 세력이 또

자기가 자기들 표 찍는 게 있어요.

* 묵시 23,27: 그리하여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을 뜻하는 숫자로 표가 찍힌

   사람 말고는 아무것도 사거나 팔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거기 사용되는 '카리그마'라는 다른 단어로 사용됩니다. 하느님의 '스프라기스'

여기는 '카리그마'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왜 다르게 사용되는가?

하느님의 인장이 더 좋으니까. 그런데 우리가 스프라기스라는 이 단어에 대해서

생각해 볼께요. 사도 바오로의 그 어떤 작품 안에서 보자면,

 

스프라기스가 뭐냐하면, 세례 받은 자에 관련된 단어입니다. 이것이.

그럼 여기서 하느님의 인장을, 종들의 이마에 인장을 찍을 때에라는 표현은 하느님

의 어떤 사람으로 소속된, 하느님의 벗이 되면서 동시에 세례 받은 이. 이 세례받은

이는 누굽니까? 그리스도인이예요.

 

*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장을 찍을 때: 하느님의 것이 되면서 세례 받은 이

   ( 그리스도인)

 

자, 우리가 첫 번째 아까 열두 부족 이야기에서 출발하고 있는 상황이거든요.

그 출발점에서 우리가 서 있는데 여기에서 이미 종들이 인장을 받을 때까지,

하느님의 종들이 세례를 받을 때까지, 그리스도인이 될 때까지.

 

예, 열두 부족의 이야기가 아니죠? 실제 내용은 '스프라기스'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사도 바오로가 즐겨 사용한 세례와 관련된 그런 단어를  쓰고 있다. 예, 열두 부족

이야기를 하면서 그 뒤에 이렇게 싹 스며져 있는 내용은 그리스도인의 어던 측면도

들어가 있다는 거죠. 특별히 하느님의 종들이라는 거.

 

* 이 표현은 묵시록 1,1; 2,20; 6,11; 19,2.5; 33,3

 

요한 묵시록 쭉 하면서 하느님의 종들이라는 표현은 누구에게 관련되어 있냐하면,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지칭하는 그 단어입니다. 하느님의 종들이라는 표현이.

요한 묵시록 안에서 이렇게 많이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그건 뭐냐?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사람으로 온전히 그렇게 될 때까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네 모퉁이에 네 바람을 다 쥐고 있는 천사들이 기다리고 있는 이유는, 세상 모든

이가 세례 바는 사람, 그리스도인이 될 때까지  해치지 마라. 예, 여기서 열두 부족

이야기 하기 전ㅇ 벌써 그리스도인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 묵시록의 저자가 그

표현을 그렇게 가지고 와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 묵시 7,4: 나는 인장을 받은 이들의 숫자가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들었습니다.

   인장을 받은 이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지파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지금 이스라엘 백성과 연결하고 있어요. 우리는 딴데서 뜬금없이

뚝 떨어져 있는 다른 종교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부터 믿었던 그 하느님과

똑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다. 정통성을 연결하고 있는 것이죠.

이 그리스도인을 열두 부족과 연결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 열두 부족 십사만 사천 명 숫자입니다. 십사만 사천 명이라는 거는

우리가 묵시 문학 할 때 이 숫자에 대해서 풀이를 했습니다. 그죠?

열두 부족에서 얼마씩 나옵니까? 열두 부족에서 만이천 명씩 나옵니다.

그래서 십사만 사천이 되죠.

 

자, 열두 부족 12라는 숫자 너무 잘 알죠? 보편적인 숫자다. 모든 하느님의 백성을

의미한다. 12는 그렇고요. 이 천이라는 숫자가 우리 100점 생각하시라고 그랬습니다.

완벽한 최고의 점수. 이 사람들의 생각에 최고의 숫자는 천이라는 거죠.

12: 모든 것, 완전한 것. 1000: 최고의 숫자가 12개 합쳐 가지고 십사만 사천.

 

이 얼마나 완전한 숫자입니까? 뒤에 어린양을, 14장에 어린양을 따라가는 사람들,

이 순결한 사람들, 깨끗한 사람들, 그 사람들 숫자도 십사만 사천입니다. 이거는

딱 십사만 사천만 딱 모아 가지고 고 사람들만 구원시키자는 소리가 아니라, 이

숫자에 담겨진 의미는 보편적 구원의 보편성과 또 연결되는 숫자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인장, 하느님의 종들이 받는 하느님의 인장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 받을

수 있는 그 숫자 십사만 사천 명까지가 아니라 그 숫자는 최고로 열려져 있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어떤 숫자로 구원의 보편성의 의미를 가진 숫자라고 생각

하시면 되겠습니다.

 

자, 그 다음에 여기서 인제 문제가 이러한 구원의 보편성이 이스라엘 백성 유다 지파

혹은 다른 지파, 열두 부족에서 그 관계 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왜 열두 부족과 세례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같이 놓으려고 하는가? 요거 우리가 답을 갈라디아서에서 한번

찾을까 합니다.

 

* 갈라 3,27-29: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한다면, 여러분이야말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약속에 따른 상속자입니다.

 

자,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과 연결 되죠? 이 연결되는 그스스도인은 종이든

자유인이든 어떠한 나라의 사람이든, 그리스인이든 어디든 상관 없이 하나다.

이 하나는 약속에 따른 상속자들입니다. 하느님의 약속.

 

아브라함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땅과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엄청나게 주겠다."

세상 모든 사람의 아버지로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모든이에게 주어진다.

 

* 창세 17,4: "나를 보아라. 너와 맺는 내 계약은 이것이다. 너는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같이 놓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이스라엘꺼다. 다른 나라 사람이다. 이런 관점으로

7장을 보시면 안 되겠습니다. 그죠? 처음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세례를

받은 사람은 어떠한 차별도 그 안에서 없다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자, 이제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 따라서 열두 지파는 모든 이를 의미하는구나 정도로

아시면 되겠구요. 열두 지파의 족보가, 족보라고 해야 되나요? 리스트가 차례로 쭉

나옵니다. 이 리스트를 한번 보자면요.

 

* 열두 지파(묵시록 7장) : 유다, 르우벤, 가드, 아세르, 납탈리, 므나쎄, 시메온

   레위, 이사카르, 즈불룬, 요셉, 벤야민

 

요 리스트 순서는 구약의 어떠한 리스트와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요한 묵시록 저자의 독특한 독창적인 자기만의 리스트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왜 요런가? 뭐가 차이가 있는가?

 

자, 여기서 제일 먼저 나타나는 지파는 유다지파입니다. 왜 유다지파를 제일 먼저

놓을까요? 예수께서 유다지파고 요한 묵시록 이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아닙니까? 

* 유다지파(처음 언급): 예수 그리스도는 유다 가문의 메시아

 

예수님을 최고 위에 놔야 됩니다. 그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나타난 지파 유다지파죠?
유다지파니까 제일 먼저 놓고 그 다음에 여기에 나타나야될 단 지파가 없습니다.

단이 없는 이유는 판관기 18장에 보면 단은 우상  숭배를 합니다.

 

* 판관 18장: 단 지파의 우상 숭배를 다룸

 

요한 묵시록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오직 하느님,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기도 바쁜데 딴데 휘청거려 가지고 넘어가면 우상 숭배, 특히 로마의 어떤 황제

숭배. 우리 일곱 개 교회에 보내는 서간을 보면 우리 다 봤지 않습니까? 우상 숭배에

대해 지극히 요한 묵시록이 강하게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다, 예수 그리스도 제일 먼저 놓고 그 다음에 단이 없다라는 것은 우상 숭배하는

것은 아무리 열두 지파라도 "너는 필요없어. 좀 옆으로 가!" 이런 식으로 해서. 왜?

옛날에 잘못이 있으니까 빼 버렸습니다.

 

그 다음에 르우벤, 다음에 보면요. 르우벤은 야곱의 아들 중에 첫 번째 장남인데요.

르우벤 다음에 보면, 야곱이 몇 명의 부인과 몇 명의 첩이 있었습니까? 두 명의 부인

두 명의 첩이 있습니다. 물론 솔로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마는.^^*~~~

 

그런데 보통 자기의 본부인의 아이를, 아들을 먼저 놓는 것이 그런데 여기도 우리

족보와 같애요. 한국에도 첩의 자식은 족보에도 들까 말까 옛날에는 그랬지 않습니까?
뭐 못 넣죠. 그죠? 그런데 여기에는요 르우벤 다음에 놓는 게 질파, 빌하 야곱의 첩의

아들을 먼저 놓습니다. 르우벤 다음에 가드, 아세르, 납탈리 ... 이렇게.

 

이게 무슨 소리냐? 왜 어떤 의미에서 본처보다 더 낮은 가치에 있는 첩의 자식들을

먼저 놓는가? 요한 묵시록 저자의 의도를 한번 보십시오. 어떤 의미에서 유다이즘

안에서 어떤 모독이 될 수 있는 차원인데 요한 묵시록 저자는 그렇게 먼저 갖다

놓습니다.

 

혈육, 피, 정말로 어떤 정통성 그것보다도 구원의 보편성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요한 묵시록 저자는 아마도 제 추측입니다. 아마도 보편적인데 무슨 혈육이 뭐가 중요

하냐? 육이 뭐가 중요하냐? 오히려 그걸 깨는, 거기에 갇혀져 있는 거를 깨는 어떤

식으로 나아가자라고 해서 그 어떤 첩의 자식들을 먼저 놓고 있는 그런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지요.

 

* 르우벤 지파 다음에 가드, 아세르, 납탈리 지파를 배치한 이유는 혈육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아주 약간 대단히 용기 있는 모습의 요한 묵시록 저자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다음에 레위는 여덟 번째 놓이게 됩니다. 그런데 유다이즘 안에서 레위 지파의

절대적 우선권은 되게 존중이 됐거든요. 레위는 일하지 말라고 다른 지파에서 도와

주고. 왜? 거룩한 지파이기 때문에. 그런데 여덟 번째로 뒤로 뺍니다. 왜?

우리 5장에서 봤습니다.

 

* 사제 가문인 레위 지파가 8번째로 밀린 이유는 모든 지파가 사제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레위 지파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가 사제의 나라에서 우리가 사제로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모든 세례 받은 이는 사제로서 활동할 수 있기에, 레위 너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너만 특권 의식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저 스스로 반성이 됩니다. 성직자 너희들만 특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 앞에.

저는 좀 이 대목에서는 아주 좀 많은 묵상도 되고 기도도 되더라구요. 요한 묵시록

우리가 성경으로 받아 읽고 있는 요한 묵시록에서 요한 묵시록 저자가 레위 지파를

뒤로 빼 버립니다. 늘 우선시하던 레위 지파를. 구약 성경에서.

 

늘 신부님, 신부님 이렇게 우선시 하고, 뒤로...

꼴찌가 첫째가 되는 그런 영광을 우리는 다 누려야 되요. 하느님 백성은 다 저마다

각각 고유한 역활이 있는 것이지 계급이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누가 하나의 특권

의식을 가지고, 누구 하나의 권위를 가지고 그쪽으로 권력이 쏠려버리면 우리는

이것을 깨야 되는 것이 우리 어떤 의미에서 가톨릭 그리스도교의 어떤 자세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요한 묵시록 저자의 모습 보십시오. 아, 되게 좀 사회 안에서 비판 의식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좀 적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예, 그 다음에 이렇게 유다, 르우벤

단, 레위 어떤 고 지파의 모습으로 이 리스트를 봤습니다. 봤는데 이 리스트는

자, 유다이즘 안에서 나온 12부족의 리스트들을 다 해체 시키고 요한 묵시록 저자의

고유한 사상이 그 안에 들어가 있다. 그 사상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구원의 보편성

을 위해서 어떠한 차별도 두지 않겠다라는 것으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 요한 묵시록 저자의 사상: 구원의 보편성을 위해서 어떠한 차별도 두지 않겠다.

 

자, 그 다음에 이러한 어떠한 차별도 두지 않는 셀 수 없는 군중에 대한 것입니다.

* 묵시 7,9: 그 다음에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그들은, 희고 긴 겉옷을 입고 손에는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서 어좌 앞에 또 어린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특별히 봐야 될 것이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서 어좌 앞에서 구원을

외칩니다. 이 셀 수 없는 군중들이. 야자나무? 자, 야자나무가 등장했습니다.

머리 속에 딱 떠올릴 때 초막절을 떠 올리시기 바랍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체험을 할 때, 광야는 고통, 어려움만의 체험만이 아니라 이집트를 떠나온,

탈출한 자유와 해방의 장소거든요. 자유, 해방. 여기서 구원을 만끽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그 과거의 역사를 체험하기 위한 것이 초막절입니다.

 

* 초막절: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해서 광야에서 자유와 해방을 맛보며

   구원을 만끽한 과거를 체험하기 위한 유다 전통

 

그 야자나무는 초막절 초막을 짓는데 치장했던 그 중에 하나구요.

그래서 야자나무를 들었다는 것은 해방, 자유를 노래한다는 거죠.

 

* 야자나무를 들다: 해방, 자유를 노래함

 

그 자유를 노래하는데 요한 묵시록에 처음으로 여기서 사람들이 어좌 앞에서 구원을

외칩니다. 5장에서 어떻게 했습니까? 5장에서는 스물네 원로와 동물들, 네 생물.

거기가 외쳤는데 여기서는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셀 수 없는 군중들이 외칩니다.

 

자, 이 원로들이 여기서 외치는데 한 원로의 질문 한번 보시면, 어떻게 질문하냐

하면, 저 구원을 외치는, 찬미를 외치는 저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서 왔느냐?

요한이 뭐라고 그럽니까?

 

* 묵시 7,14: 원로님, 원로님께서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요 표현은 구약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고렇게 전통적으로 어떤 좋은 것,

영광스러운 것, 구원을 보일 때 확 이게 도대체 뭘까라고 말하기보다는 약간 뜸을

들이면서 약간 절정으로 이끌어 가는 그런 어떤 문학적인 어떤 표현이 있었는데

"아, 당신이 더 잘 알지 않습니까?"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원로가 이야기 해줍니다. 원로가 뭐라고 얘기하냐 하면,

* 묵시 7,14: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번역을 조금만 바꾸겠습니다. 현재 분사가 사용됐습니다.

환난을 겪어 낸 사람이 아니라, 환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제일 중요한 것은 그 셀 수 없는 군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요한 묵시록에서 계속 제가 반복해서 얘기했던 것. 구원의 자리가 뭔가? 구원의

보편성을 우리가 얘기했습니다. 그죠? 그런데 이 큰 환난을 겪고 있고 동시에

이들이 군중이구요. 이들이 겪고서 그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냐하면요.

어린양의 피에 자기 겉옷을 빨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 순교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순교하고 어려움에서 저항하고,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겨낼려고 그러고, 거기서 끈기있게 살아가는 사람은 우리는 요한 묵시록 안에서

어떤 사람이라고 계속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떤 사람? 승리하는 사람.

 

자, 군중이 큰 환난에 있구요. 이 셀 수 없는 군중이 7장에서. 그 군중은 겉옷을

어린양의 피 안에서 빤다는 것은 순교하는 거예요. 죽을때까지. 자, 우리 6장에서

봤을 때 다섯 번째 봉인을 뜯었을 때 제단 아래에 소리치는, 울부짖는 영혼들이

뭐라고 합니까? " 우리 피의 복수를 언제까지 미루시렵니까?"

 

* 묵시 6,10: 그런데 그들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거룩하시고 참되신 주님,

   저희가 흘린 피에 대하여 땅의 주민들을 심판하고 복수하시는 것을 언제까지

   미루시렵니까?"

 

죽음까지 각오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그분께 간절히 다가서는 그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들. 그들이 곧 요한 묵시록 안에서는 승리자다라는 그런 구조를 

여기서 가지고 있습니다. 예, 이러한 사람들이, 이 승리자들이 하는 일은 경배드리는

거예요. 이거 5장에 나왔습니다. 5장에.

 

* 묵시 7,15: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어좌 앞에 있고 그분의 성전에서 밤낮으로

   그분을 섬기고 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께서 그들을 덮는 천막이 되어 주실 것이다.

 

5장에 사제의 나라라고 그죠?

*묵시 5,9-10: 그들이 새로운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님께서는 두루마리를 받아 봉인을 뜯기에 합당하십니다.

  주님께서 살해되시고 도 주님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속량하시어 하느님께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한 나라를 이루고 사제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들이 땅을 다시릴 것입니다."

 

모든이를 당신 피로써 구속하시고, 구원하시고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사제로서

활동하는. 그래서 요한 묵시록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사제의 역활로.

그러니까 아까 열두 지파를 봤을 때 레위, 필요 없죠? 특권층이 필요 없죠?
우리 모두가 사제가 되면 되는 거예요.

 

여러분 세례 받았으니까 뭡니까? 사제직이 있는 거예요.

우리 교구 사제는 직무적으로 사제직을 수행하지마는 여러분들은 일반 여러분들의

삶 곳곳에서 여러분 역시 사제로서 하느님을 경배하고, 하느님을 섬기고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들 사제예요.

 

그래서 우리가 큰 이 환난 다시 한번 강조해 드리고 싶은 게 큰 환난이 끝났다고

해서 승리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 구원의 자리가 정말 하느님으로부터 인장을

받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그런 어려움 다 지나가고 끝나는 것이 아닌,

 

계속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그 안에서 계속 다가오는 신앙의 위협들, 신앙의 가치를

지켜내지 못하는 그런 자리, 그런 자리에서 자기 겉옷을 빠는 곧 목숨 걸고 신앙의

가치를 지키겠다라고 하는 그 사람이 곧 승리자가 되고 그 사람, 그런 모습이 곧

하느님께 경배드리는 모습이다.

 

자, 7장에 나타난 이 구원 받는 이들의 모습, 이것은 바로 우리의 어려움 가운데서도

믿음을 잃지 않는 이. 그들이 구원 받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구원이 하느님 당신께

있습니다라고 외칠 때 우리 삶 전체를 어렵든, 행복하든, 슬프든, 기쁘든 어쨌든

모든 삶의 희노애락을 다 바칠 수 있는 그런 우리가 되어야 참된 신앙이고 참된

승리자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자, 이런 마음으로 한 주간 또 살아 가시고 다음 시간에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다음 시간 예고: 여인과 용의 싸움(묵시 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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