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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손수 붙잡히신 예수님/묵주 기도 49
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4-02-02 조회수465 추천수1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고통의 신비 1: 3/4]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땀 흘리심을 묵상합시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 하시면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얼굴에서 피땀이 흘러내리는 33세의 이 젊은이의 모습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하느님의 아들로서 신성과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난 인성을 가지신 구세주 예수님,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신적인 사명을 담대하게 완수하시려는 하느님의 성자이셨건만,

이 겟세마니에서 보여주신 극도의 인간적 고통을 절규하고 계시는 모습은,

친히 비천한 인간이심을 거부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더욱 마리아의 아들 인간 예수이심을 극명하게 보여 주셨다.

 

삼십 여년의 사생활과 삼 년의 그 공생활은 이제 앞으로의 이 반나절로 지상 생활을 마감한다.

이 겟세마니에서 골고타까지의 짧은 거리가

예루살렘 남쪽의 출생지 베들레헴에서부터 꿈을 키워 온 나자렛보다 더 멀리만 여겨졌다.

최초의 천지창조 때 첫째 날 을 만든 그 시각부터 지금 이 시각까지의 그 기나긴 시간보다 더 길게 여겨졌다.

그러니 예수님도 근심과 번민에 휩싸이기 시작할 수밖에.

그러나 이 수난 뒤에 올 부활의 영광을 뿌리기 위해서는 이 길은 어쩜 필수적이다.

이 처절한 수치스러움과 몸서리나는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은 기도밖에 없다.

 

사실 말이 올리브 동산이지 정확히 말해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이었다.

그곳은 예루살렘 동쪽에 놓여 있으면서 예루살렘 성과 올리브 산을 가르는 작은 계곡이다.

거기에 정원이 하나 있었는데 그 이름이 겟세마니인 것이다.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계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여러 번 거기에 모이셨기 때문에, 그분을 팔아넘길 유다도 그곳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유다는 군대와 함께,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보낸 성전 경비병들을 데리고 그리로 갔다.

그들은 등불과 횃불과 무기를 들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닥쳐오는 모든 일을 아시고 앞으로 나서시며 그들에게, ‘누구를 찾느냐?’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요.’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다.’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나다.’하실 대답 하실 때,

그들은 뒷걸음치다가 땅에 넘어졌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누구를 찾느냐?’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요.’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다.’라고 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들은 가게 내버려 두어라.”

이는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사람들 가운데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라고

당신께서 전에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아무 무기도 없이 오직 말씀으로 나다.’라고 하셨다.

그 한 말씀에 사납고 증오에 찬 무기까지 든 이를 뒷걸음치게 하면서 넘어뜨렸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는 모습이다.

빛이신 그분 안에 하느님이 함께하시고 언젠가 심판하러 다시 오실 그 모습이 드러나시기 때문일 게다.

그렇다. 그분은 재판관으로 다시 오시리라.

지금은 비록 죽기위해 이 낙원이 아닌 정원에 계시지만

예수님은 아담이 쫓겨난 그 낙원으로 다시 들어가실 것이다.

지금도 그 예수님은 우리 곁에서 나다.’라고 일깨우신다.

이 말씀에 죄의 구렁텅이 문전에서 우리는 뒷걸음치고 넘어진다.

때로는 속된 것이 좋아 말씀을 저버리기도 한다.

 

그때에 시몬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칼을 뽑아, 대사제의 종을 내리쳐 오른쪽 귀를 잘라 버렸다.

그 종의 이름은 말코스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그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그리고는 그의 귀에 손을 대어 상처를 치유해 주셨다.

종의 이름까지, 아니 그의 오른쪽 귀라는 것까지 상세하게 기록한 것으로 봐서,

이 일은 참으로 복음사가에게는 매우 의미가 있는 상황으로 비쳐졌을 게다.

그 죽음을 목전에 두고 원수의 상처를 치유해 주시는 스승의 그 모습을 영원히 잊을 수 없었으리라.

베드로 사도의 성급함으로 하마터면 목까지 벨 뻔한 말코스’,

그의 이름의 의미는 다스리도록 예정된 자라는 뜻이란다.

그는 예수님 때문에 상처를 받았고 예수님께 치유도 받았다.

그의 귀는 이제 새로운 복음을 들을 것이고 종의 신분에서도 해방될 것이다.

아마도 예수님의 치유를 받은 그는 이제 그의 이름대로 다스리도록 부름을 받았을 것이다.

 

제자의 배반에 대한 보복으로 칼을 휘두르는 것도 용납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은

말코스의 상처 안에서 상처를 입었을 게다.

그렇지만 자비로 온전하게 치유해 주셨다.

말 한 마디로 하늘의 천사를 불러내려 보복도 할 수 있었지만 칼을 거두게 하셨다.

폭력의 칼대신 성령의 칼을 뽑으신 게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그 무리에게도 이렇게 이르셨다.

너희는 강도라도 잡을 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러 나왔단 말이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지만 너희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예언자들이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는 당신께서 스스로 내어주지 않는다면

그들이 결코 당신을 잡아가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다.

다시 말해 그분을 붙잡는 것은 그분께서 기꺼이 따라가지 않으면 불가능함을 의미하며

그분 스스로가 붙잡혀 주심을 드러낸 것이다.

그때에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

예수님은 이 모습에 분명히 말씀하셨다.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는 너희가 나에게 손을 뻗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이 권세를 떨칠 때다.”

이는 일시적으로 사탄이 승리하는 때이고 어둠의 권세가 위력을 떨치는 때임을 의미한다.

 

어둠의 자식들이 휘두르는 폭력에,

인성을 바탕으로 한 이 모든 고통은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물려 받으셨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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