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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0 사순 제4주간 수요일...독서,복음(주해)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3-29 조회수1,103 추천수1 반대(0) 신고

1독서

<땅을 다시 일으키려고 내가 너를 백성을 위한 계약으로 삼았다.>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9,8-15
8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은혜의 때에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내어 백성을 위한 계약으로 삼았으니
땅을 다시 일으키고 황폐해진 재산을 다시 나누어 주기 위함이며
9 갇힌 이들에게는 나와라.’ 하고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모습을 드러내어라.’ 하고 말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가는 길마다 풀을 뜯고 민둥산마다 그들을 위한 초원이 있으리라.
10 그들은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으며
열풍도 태양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리니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분께서 그들을 이끄시며
샘터로 그들을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11 나는 나의 모든 산들을 길로 만들고 큰길들은 돋우어 주리라.
12 보라, 이들이 먼 곳에서 온다.
보라, 이들이 북녘과 서녘에서 오며 또 시님족의 땅에서 온다.
13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 산들아, 기뻐 소리쳐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14 그런데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15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고 한다.

 

 

 

 

 

 

 

복음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7-30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17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8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20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리고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시어,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21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22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23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26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27 아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심판을 하는 권한도 주셨다.
28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29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30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해

17

예수 자신은 안식일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이 안식일에도 일하시니 자신도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일치하여 일할 따름이라고 대응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일치하여 함께 일한다는 계시 말씀은 19절에서도 거듭된다. 하느님과 동등한 예수의 정체, 곧 안식일 법을 능가하는 예수의 정체가 시사된다. 예수의 이 방어는 안식일 법에 대한 유다인들의 사고를 배경으로 할 뿐(7.22-23 참조). 모세의 법(창세 2.2-3;출애 20.11; 31.17)에 상치되는 언급은 아니다.

 

18

원문(반과거형)에 따르면, 예수를 죽이려는 유다인들의 원의가 지속적이었음을 뜻한다.(18,59;10.31 참조).

 

유다인들이 예수를 죽이려 한 이유가 안식일법 위반뿐 아니라 독성죄로 언급된다. 신성모독이 예수를 죽이게 된 결정적 이유로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에서 모두 언급된다. 예수의 안식일 법 위반은 구체적 행동이 아니라 유다인들의 안식일법에 대한 예수의 근본적 태도를 가리킨다. 예수를 죽이고자 나선 유다인들의 근본 이유는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과 동등함을 자처하는 데 있다. 이것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한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전제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예수에 대한 당시 그리스도인과 유다인의 대립상이 다소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들의 권한

이 대목에서는 예수의 자기계시 전승을 토대로 저자의 깊은 신학사상이 반영된다. 이 계시 말씀은 아버지아들이 일치하여 함께 일한다는 말로 시작하고 끝맺는다. 이미 17절에서 간단히 예시된 아버지아들의 이 결속관계가 이 대목의 주제다. 표현상, 19-23절에서는 아버지아들상호관계가 객관적 문제로 언급되고, 27-29절에서는 서술어가 하느님의 아들에서 사람의 아들, 종말론적 관심도 현재에서 미래로 바뀌는 것이 두드러진다.

 

적어도 이 두 대목은 전승자료에 근거한 것 같다. 내용상 아들로서 예수의 자기계시가 하느님께 대한 예수 자신의 태도에서 신학적으로 밝혀진다. 이것이 예수의 계시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진 하느님의 계시 전체를 이해하는 기초가 된다. 그리고 아들안에서 하느님의 구원과 심판이 현재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관점아래 종말론적 미래가 현제적으로 언급된다. 이른바 아들 그리스도론에 따라 현재적 종말론이 언급된다. 그리스도론과 종말론이 내적으로 결합된 점이 특징이다.

 

19

아들은 예수 자신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일종의 그리스도론적 칭호다. 이런 의미로 요한복음에서는 18회 정도 언급되는데, 그 가운데 8회가 19-26절에 나온다. “아들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란 말은 예수의 계시 말씀과 유다인들에게 대답한 말 가운데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수의 말씀과 행동은 오로지 아버지 하느님과 일치하여 함께 일할 뿐임을 뜻한다. 특히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본다란 말은 아들의 계시 말씀과 행동이 아버지와 일치된 인격안에서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이와같이 하느님과 예수와의 깊은 결속관계가 아들개념으로 설명된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일한다는 것이 똑같이 함께 한다는 뜻으로 아버지와 동일한 권한이 아들에게도 있음을 시사한다. 이 구절은 17절과 같은 내용이고, 21-22절에서 구체적으로 설명된다. 이와같이 19절의 계시 말씀은 하느님이 예수 안에서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을 계시하고 구원행위를 구체적으로 펼치신다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20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행동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그 충만한 사랑으로 당신 친히 하시는 모든 것을 보여줌으로써 가능하다는 뜻이다. 특히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요한복음에서 아가판이란 동사와 함께 언급된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는 필레인 동사로 표현된다. 아마도 인격적 사랑을 강조하려는 저자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보여준다란 말은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본다란 말에 상응한 표현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여준다는 것은 아들로 하여금 행동하도록 충동과 힘을 준다는 것을 뜻한다.

 

이보다 더 큰 일은 문맥상 안식일에 이루어진 병자 치유와 비교하여 죽은 이를 살리는 것과 심판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믿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을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보다 더 큰 일은 예수 자신이 참된 생명의 힘을 가지고 있음을, 특히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하느님의 심판이 예수를 통해 이루어짐을 가리킨다.

 

요한복음의 전체 맥락에서 보면 태생소경 치유와 라자로의 부활과도 관련된다. 믿지 않는 자들의 당황이나 심판이 그 사화들에 언급된 것도 유의할 만하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큰 일1.50; 14.12에도 나온다. 그러나 각 문맥에 따라 그 의미를 살펴봐야 한다. 1.50에서는 앞으로 볼 예수의 표징, 14.12에서는 들여높여진 자가 행할 일들을 가리킨다.

 

21

죽은 이들을 일으키어 살게 하시는 것심판하는 것과 함께 아버지께 유보된 것으로 명시된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시고자 한 이보다 더 큰 일이다. “그렇게로써 아버지께 유보된 일을 아들도 행할 수 있고, 아버지와 동일한 권한이 아들에게 주어져있음이 강조된다. “자기가 원하는이란 표현도 아들의 임의가 아니라 권위나 권한을 뜻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만을 실행하기 때문이다(6,38-40 참조).

 

22

21절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말로서 아버지는 당신이 직접 심판하지 않고 아들에게 그 권한을 주셨다는 내용이다(8,15-16 참조). 예수 자신이 하느님과 동일한 품위와 그런 최고의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계시한다.

 

23

문법상 22절에 직결되나 내용상 21절과도 관련되어 있다. 아버지는 아들의 권한 행사에 참여하여 당신 자신처럼 아들도 모든 사람이 공경하게 하시기 때문이다.(8.50.54 참조).

 

아들 공경이 곧 아버지 공경임이 아들은 아버지로부터파견되었다는 말로 더욱 명시된다. 파견된 분 안에서 파견하신 분을 공경한다. 따라서 하느님 공경은 공경 없이는 불가능하다.

 

24

사람들은 아들 안에서 아버지의 말씀을 듣게 되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죽은 자들을 살리는 능력을 주셨으므로, 아들의 말은 그를 믿는 자를 살린다. 예수의 계시 말씀은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힘이 있다. “듣는다란 믿음을 가지고서 들음이고,“듣는다란 아들의 말을 들음으로써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께 신뢰함이다.(3,33-34 참조).

 

믿는자. 곧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는 단죄된 분노의 심판 또는 죽음의 운명에 놓이는 심판에 예속되지 않는다.

 

심판에 예속됨은 생명에서 벗어난 죽음을. 부활은 심판에서 빠져나옴이다. 아들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은 사람은 이미 새로운 삶의 영역으로 옮겨간 사람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생명에 새로운 실존으로 참여한 변혁이 이루어진 삶이다.

 

25

죽은 자들을 일으켜 생명을 줄 때가 온다는 것은 약속이요, 그 때가 이미 왔다(“바로 지금”)는 것은 그 약속의 성취다. 이 구절은 24절과 함께 살펴봄으로써 그 의미를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24절의 계시 말씀에 대해 새로운 관점으로 언급되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이 일으켜지는 종말론적 사건이 바로 지금이란 표현과 함께 현재적 관점으로 언급된다. 죽은 자들을 일으켜 생명을 주는 아들의 목소리를 지금 실제로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죽은 자들이 일으켜지는 때가 이미 온 셈이다.

 

모든 사람이 단죄된 분노의 심판 또는 죽음의 운명에 놓이는 심판에 예속되어 있지 때문에 죽은 자들로 표현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종말에 있을 죽은 자들의 부활이 현재의 시간으로 언급된다. “듣는다란 말이 믿음으로 청취한다는 뜻으로 그 역할이 밝혀진다. 비록 죽은 자들도 아들의 목소리를 듣게 되지만 오로지 듣는 자, 곧 계시자의 목소리를 믿음으로 청취하는 자만이 생명을 얻는다.

 

믿음으로 아들의 목소리를 듣는 자, 곧 아들의 계시 말씀을 듣고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약속이다.

 

26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가 죽은 자를 살릴 능력을 가진 이유가 설명된다. 아들도 아버지처럼 생명을 가지고 있고 또 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이미 21절에서도 언급되었고, 여기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될 뿐이다. 아들이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생명으로 무장되어 파견되었다는 뜻이 아니라,“말씀안에 생명이 있듯이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이것은 19-20절엑서 언급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시사하고, 이 관계는 한 처음에하느님과 말씀이 가지는 바로 그런 관계를 뜻한다. 따라서 아들은 믿는 자들에게 생명의 원천이다.

 

27

22절에 연결된 내용으로서 죽은 자들을 생명으로 부를 권한과 함께 심판할 권한도 아들에게 있음을 재확인한다. 24절에서처럼 여기서도 심판은 현재적 의미다. 이 심판은 세상에 파견된 아들의 말로 인해 이루어진다. 아들의 말은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힘인 동시에 믿지 않는 자들에게 심판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세상을 구원할 왔지 심판하러 온 것은 아니다. 따라서 27ㄱ절은 30절과 맥락이 같다.

 

그러나 심판이 미래적 관점으로 언급된 27-29절은 문맥상 이색적이다. “아들대신 갑자기 사람의 아들이 언급되고, “사람의 아들역할이 심판자로서 강조되어 있다. “사람의 아들은 요한복음에서 더러 언급되지만 심판자로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이런 언급은 주로 공관복음에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27-29절은 별도의 전승자료가 삽입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사람의 아들이란 칭호는 다니 7.13과 관련되나, 심판자로서의 사람의 아들은 오히려 초대 그리스도교의 전승자료, 특히 공관복음이나 사도행전에서 유래한다.

 

28

세상을 구원하러 온 예수가 사람의 아들올서 심판을 하게 된다는 사실에 놀라지 말라는 뜻이다.

 

당시 유다인들의 사고를 반영한말로서 육신 부활을 전제할 뿐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죽은 자들의 부활은 초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속한다. 현재의 관점으로 언급된 25절과 비교할 때, 이 구절은 하느님의 아들의 목소리대신 사람의 아들의 목소리, “때가 이미 왔다대신 때가 온다란 말로써 미래적 관점에서 달리 언급된다. 이 언급은 또한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확신과 맥락을 같아한다. , 종말심판은 사람의 아들또는 주님으로서 예수가 하게 될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초대 그리스도교의 전승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9

다음과 같은 번역도 가능하다. “그리고 선을 행한 이들은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부활하게 될 것이나. 악을 저지른 이들은 심판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선한 행실과 악한 행실에 따라 종말 부활의 의미가 각기 다르게 언급된다. 이런 종말심판도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확신과 맥락을 같이한다.

 

특히 심판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부활한다또는 부활하여 심판을 받는다란 말은 현 문맥상 이색적이다. 아들은 죽은 자들을 일으켜 아버지의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긍정적 부활 의미로 언급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이색적 언급은 전승된 종래 미래 종말론에서 기인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느님의 아들을 믿음으로써 생명을 얻게 되는 현재적 의미가 현 문맥의 기조이기 때문이다.

 

30

19절을 일인칭 형태로 바꾸어 간략하게 반복한다.

예수의 심판은 자기를 파견한 하느님으로부터 연유하므로 불가침이며 반드시 유효하고 진실하다는 뜻이다. , 예수의 심판하는 일이 현재적이든 미래적이든 하느님의 권위에 근거한 것으로 강조된다.

 

이와 흡사한 예수의 말이 요한복음에 더러 있다. 여기서는 예수의 계시 말씀을 정당화하고 동시에 더욱더 새겨듣도록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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