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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1 사순 제4주간 목요일...독서,복음(주해)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3-30 조회수793 추천수1 반대(0) 신고

1독서

<주님, 당신 백성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어 주십시오.>
탈출기의 말씀입니다. 32,7-14
그 무렵 7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어서 내려가거라. 네가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온 너의 백성이 타락하였다.
8 저들은 내가 명령한 길에서 빨리도 벗어나,
자기들을 위하여 수송아지 상을 부어 만들어 놓고서는,
그것에 절하고 제사 지내며, ‘이스라엘아,
이분이 너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너의 신이시다.’ 하고 말한다.”
9 주님께서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참으로 목이 뻣뻣한 백성이다.
10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마라.
그들에게 내 진노를 터뜨려 그들을 삼켜 버리게 하겠다.
그리고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11 그러자 모세가 주 그의 하느님께 애원하였다.
주님, 어찌하여 당신께서는 큰 힘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당신의 백성에게 진노를 터뜨리십니까?
12 어찌하여 이집트인들이,
그가 이스라엘 자손들을 해치려고 이끌어 내서는,
산에서 죽여 땅에 하나도 남지 않게 해 버렸구나.’ 하고 말하게 하시렵니까?
타오르는 진노를 푸시고 당신 백성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어 주십시오.
13 당신 자신을 걸고, ‘너희 후손들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약속한 이 땅을 모두 너희 후손들에게 주어,
상속 재산으로 길이 차지하게 하겠다.’ 하며 맹세하신
당신의 종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을 기억해 주십시오.”
14 그러자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내리겠다고 하신 재앙을 거두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 주님께서는 모세의 예언을 들으시고, 우상을 만들어 섬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겠다고 하신 재앙을 거두신다.

 

 

 

 

 

 

복음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31-47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31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유효하지 못하다.
32 그러나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
나는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분의 증언이 유효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33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들을 보냈을 때에 그는 진리를 증언하였다.
34 나는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너희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35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너희는 한때 그 빛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였다.
36 그러나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37 그리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를 위하여 증언해 주셨다.
너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분의 모습을 본 적도 없다.
38 너희는 또 그분의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지 않기 때문이다.
39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40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41 나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지 않는다.
42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이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받아들일 것이다.
44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45 그러나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46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47 그런데 너희가 그의 글을 믿지 않는다면 나의 말을 어떻게 믿겠느냐?”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해

예수를 뒷받침하는 증언들

이 대목은 앞서 언급된 아들의 권한을 아버지 하느님의 증언으로 명시한다. 아들 예수를 위한 아버지의 증언(31-30)과 그 증언이 불신에 대한 윤리적 재앙(31-47)에 관한 내용으로 나눠질 수 있다. 첫째 부분은 증언이란 표제어로, 둘째 부분은 영광이란 표제어(41)로 시작되는 것도 특징이다. 또한 구약성경의 하느님 말씀과 세례자 요한에 대한 유다인들의 그릇된 태도가 지적됨으로써 예수의 하느님, 곧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가 그들과 대조를 이룬다.

 

, 예수는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분, 하느님의 이름으로 일하는 분이라는 것(43)이 재확인되고 강조된다. 예수의 이러한 인격을 뒷받침하는 증인들로서 구약성경 모세. 세례자 아버지의 증언”, 예수의 일들이 언급된다.

 

31

자기 자신을 위한 증언은 신뢰 할 수 없고 유효하지 않다는 것은 일반 법정에서 통용되는 말이다. 그런데 유다인들이 예수에게 똑같은 말을 했을 때 예수는 달리 해석한다. , 자신은 참된 증인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위한 그 증언도 신뢰할 수 있고 유효하다는 것이다. 예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 또는 자신의 정당한 권한을 확증하고자 이런 법정의 말을 인용했다고 볼 수 있다(6.17; 신명 17.6; 19.15 참조).

 

32

아버지가리킨다(37).

 

아버지의 증언은 직접적 증거가 아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유다인들은 그 증언을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그 증언이 참되다는 사실이 감추어져 있다. 오로지 예수만이 그 증언이 참되고 자신을 위한 증언임을 안다. 예수는 그 증언을 자신의 말과 일 안에서 확신하기 때문이다(36절 참조).

 

33

셰례자가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자들 앞에 행한 증언을 연상시킨다. 저자가 처음부터 세례자의 증언에 중요한 가치를 부여한 것은 사실이다. 하느님이 세례자의 증언에 함께하시고 세례자가 또한 하느님의 충실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에 관해 증언했다면, 그의 증언도 진리를 위한 증언이다. 예수는 자기 자신이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서세상에 왔다고 빌라도 앞에서 밝힌 바 있다. “진리는 예수를 통해 밝혀지는 하느님의 종말론적 계시다. 예수 자신이 또한 진리(14.6). 따라서 세례자는 그런 진리 계시에 봉사함으로써 진리에 대하여 증언한자다.

 

34

예수 자신은 하느님의 증언 외에 그 어떤 증언도 필요없다는 뜻이다. 이런 맥락에서 세례자 증언의 가치가 상대화된 셈이다(36절 참조).

 

어떤 사람의 증언도 필요없는 예수 자시이 세례자의 증언을 거부하지 않는 이유는 유다인들이 구원받도록 하는 데 있을 뿐이라는 뜻이다. , 세례자의 증언이 사람들을 위해서는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자이기 때문이다(1.17).

 

35

은 예수 자신을 가리키는 표상어이기 때문에, 세례자를 등불:로 표상한다(1.7-8 참조).

세례자의 증언을 한번도 제대로 받아들이거나 참으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세례자가 등불이었다란 말은 잠시 동안세례자에게 긍정적으로 취한 사람들의 태도와 관련된 표현이다. , 세례자의 죽음으로 끝나버린 증언활동과 관련된 표현이 아니다. 세례자는 항상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증인이다.

 

36

세례자의 증언보다 더 중대한 증언은 예수가 행하는 일들. 곧 계시사건들이다. 일들을 예수는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았고 또 아버지와 함께 이룩한다. 일들이 예수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었음을 증언한다. 일들은 예수가 이미 이룩한 것만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따라 예수가 지상에서 이룩해야 할 것들도 총칭한다. 공관복음의 기적이 요한복음에서는 표징으로 표현된다. “표징은 행동으로 드러난 계시로서 의 또 다른 면을 묘사할 따름이다.

 

37

아버지께서도 친히 예수를 위해 증언하신다는 점이 강조된다. 예수의 일들을 통해서도 아버지께서 증언하시지만(36) 여기서는 예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몸소 증인“(32)으로 명시된다(1요한 5.9 참조).

 

시나이 산 신현사건을 인용하여 환상에 젖은 유다인들의 그릇된 생각을 지적한다. 누구도 하느님의 모습을 직접 보거나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모습목소리는 한 인격체를 나타내므로, 그들은 하느님을 모른다고 바꾸어 말할 수도 있다. 그들은 계시자를 부인함으로써 그 사실을 입증한 셈이다. 시나이 산에서 계시하신 하느님이 바로 그 계시자 안에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기 때문이다.

 

38

유다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계시자, 곧 그리스도를 믿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마저도 귀담아듣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야기한다(3.34). 하느님의 말씀은 문맥상 성경 말씀을 가리킨다(39).

 

39

예수는 유다인들이 성경을 경거하게 대하고 또한 열심히 두루 탐구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토라가 모든 구원의 원천이라고 여기는 유다인들의 사고에 일치한다(비회 17.11; 45.5; 바룩 4.1). 그러나 예수에게 오는 자만이 생명을 얻는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40절 참조). 예수만이 생명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6.35; 8.12).

 

유다인들이 열심히 두루 탐구하는 바로 그 성경도 예수를 위해 증언한다는 사실을 재확인한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성경의 각 말씀은 예수에게서 이루어지고, 성경은 바로 예수에 관해 말한다. 성경과 예수의 말씀이 일치하며(2.22), 예수 부활의 관점에서 성경의 신비스런 말씀들의 뜻을 깨닫게 된다. 예수는 성경의 핵심이요 목적이다. 이 구절은 초대 그리스도교 그리스도론적 성경 해석의 절정에 이른다.

 

40

예수의 말씀은 이요 생명인데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6.35 참조).

 

41

예수는 사람의 증언이 필요없듯이(34)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고자 하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 예수는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만을 찾는다는 것이 시사된다(7.18).

 

42

하느님의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뜻한다. 이 사랑은 하느님의 자녀됨을 드러내는 사랑이다. 유다인들이 설령 하느님을 알더라도 그들에게는 이러한 사랑이 없다는 것을 들추어낸다.

 

43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편에 있지 않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들이 아버지로부터 파견된 아들을 영접하지 않기 때문이다(23절 참조).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란 아버지로부터 사명을 받고서 파견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예수의 일들은 예수가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었다는 사실을 증언한다(10.25 참조).

 

자신의 이름으로 온다아버지의 이름으로 온다와 대칭을 이루며, 거짓 예언자들을 지칭한다(신명 18.20). “다른 이와 대칭을 이룬다. 따라서 43ㄴ절의 내용과 함께 하느님으로부터 이루어진 예수의 파견이 더욱 강조된다. , 예수만이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유일무이한 메시아임이 나는 ...”이란 표현과 함께 예수의 입을 통해 역설된다.

 

44

유다인들의 윤리적 잘못을 지적한다. , 자신들의 영광 또는 인정을 하느님을 통해 찾으면서도 정녕 하느님께 드릴 영광을 찾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백 정식에 속한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이란 표현과 더불어 더욱 거세진다.

 

45

유다인들의 생명의 율법을 준 모세에게 희망을 걸어 온 것은 모세가 구원의 보증인이요 하느님 앞에서 자기네 대변자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는 모세가 오히려 그들에게 고발자가 된다고 위협적인 말을 한다. 모세는 그들을 고발하기 위해 이미 와 있다.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자에 관한 모세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46

모세는 자신의 을 통해 예수를 위한 증인이 되었다(신명 18,15-18;요한 6.14;7.40.52 참조).

 

47

모세오경은 예수의 에 대한 증언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모세오경을 통해 예수는 약속된 메시아임을 알고 확신하게 된다는 것이다(1.45 참조).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저는 음료수를 자주마시는데 포도봉봉을 마실때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다~”라는 말씀이 생각이 나고 복숭아를 마실때는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관우,장비가 복숭아나무밭에서 의형제를 맺었다던 도원결의가 생각이 납니다. 이것이 나만의 생각인가 해서 같이 마시는 동료에게 이 말을 했더니 그도 웃으면서 그렇다고 합니다.

 

또한 고양이를 끔직히도 좋아하는 동생을 보면 가톨릭 성가 “~고양 이시며 ~”라고 나오는 성가 가사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무슨 성가에 고양이가 나오는가 해서 사전을 찾아 봤더니 고양이란 어린 양의 ()”자에 양은 큰 양인 ()”을 뚯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다보면 기도가 잠시도 멈출때가 없지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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