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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5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4-07 조회수1,633 추천수1 반대(0) 신고

 

목요일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말씀하십니다. 실은 영생을 말씀하시지만 표현은 죽음을 말씀하시면서 영생을 말씀하십니다. 의미는 같지만 사실 약간 미세한 다른 뉘앙스가 있습니다. 영원히 산다와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는다와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의미는 분명 같은 말씀입니다. 왜 그렇다면 이렇게 표현하셨을까를 한번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미 살면서 주변에서 죽음을 많이 보기 때문에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은 다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영원히 산다는 말은 아직까지 죽지 않고 그렇게 산 사람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애 같은 표현이지만 오히려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도 사실 그런 일이 없었지만 차라리 그 표현이 죽음이라는 것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죽음을 극복하고 초월하는 성격을 내포하는 면도 없지 않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믿기 어려운 사실이라고는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이 하는 질문을 한번 유심히 보면 그들이 가진 심리상황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예언자도 죽었고 그 예언자 중에 아브라함도 있었는데 그렇다면 그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아브라함보다도 더 훌륭하다는 말과 같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아브라함 같은 훌륭한 예언자도 죽었는데 그보다도 훌륭하지도 않을 것 같은 당신의 말은 가당치도 않은 말이지 않느냐는 그런 의미로 말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와 함께 오늘 복음 후반부에 나오는 대화를 보면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니 그들은 마치 예수님이 실언을 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건 당연한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의 말씀은 이 세상 언어로 말씀은 하시지만 그 의미는 영적인 눈으로 보지 않으면 이해를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육적인 눈으로는 당연히 실언이라고 생각할 게 뻔한 사실입니다. 

 

우리도 이 유다인처럼 그렇치 않다고 장담을 할 수가 있을까요? 우리도 전혀 그런 면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성경 말씀을 보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도 있지만 그렇다고 예수님 말씀이기 때문에 부정을 하지 못할 뿐이기 때문에 억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인식을 하면서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쉬운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있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우리의 영안이 열려야 할 것입니다. 

 

육안은 육적인 것은 잘 보지만 영적인 것은 볼 수가 없습니다. 영적인 것은 영안이 아니면 볼 수가 없듯이 말입니다. 영안이 열리는 길은 잘 모르지만 단지 묵상을 하고 추측만 할 따름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경험하고 또 지식적으로 배운 것을 바탕으로 추론을 해보면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의 영 안에 말씀이 담겨 있는 게 첫 번째 길일 것입니다. 말씀 그 자체가 영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잘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씀을 계속 담아 있게 된다면 언젠가는 자기도 모르게 그 말씀이 자신의 영혼을 지배하게 된다는 것을 경험하게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경험을 아주 미약하게나마 해 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미약한 경험이지만 이 경험을 통해서 확실하게 느끼는 사실 하나는 있습니다. 언젠가는 말씀이 자신의 영혼을 바꿔줄 수 있다는 사실은 확신하는 바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말씀을 가슴에 담으려고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 될 것입니다. 영안이 열리는 것은 그렇게 노력하는 사람에게서 찾아오는 하느님의 축복과도 같은 것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당연하지 않을까요? 항상 모든 것을 봐도 하느님과 관련 지어서 해석하려고 하고 또 늘 말씀을 생각하려고 한다면 그렇게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예수님께서 맹인에게 눈을 열게 해 주셔서 앞을 보게 하시는 기적을 행하시기도 하는데 그와 같은 일은 당연히 해 주시리라고 봅니다.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성경 말씀은 그냥 사차원 같은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 말미에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셨다고 말하는 것을 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역시도 그렇습니다. 아마도 이 사실은 확실할 것입니다. 우리도 성경이 우리 생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영안이 덜 열렸다는 사실과 같을 것입니다. 내 영안이 열린 만큼 그만큼만 성경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활자와 글자를 보더라도 말씀을 받아들이는 수준이 다른 이유도 이런 이유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우리도 예수님 말씀을 이해하는 영안이 열리려면 끊임없이 말씀을 보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 길만이 영안이 열리는 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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