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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7 주님 부활 대축일 낮 미사...독서,복음(주해)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4-16 조회수1,343 추천수1 반대(0) 신고

주님 부활 대축일 낮 미사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화답송 후렴). 주일이 한 주간의 절정이듯, 주님 부활 대축일은 전례주간의 절정을 이룬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신앙의 핵심이다. 예수님께서는 죽음과 악의 세력을 이겨 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큰 기쁨이며 희망이다. 주님 부활 대축일은 하느님의 권능과 주님 부활의 은총에 감사드리는 날이다,

 

 

1독서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0,34.37-43
그 무렵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여러분은 37 요한이 세례를 선포한 이래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온 유다 지방에 걸쳐 일어난 일과,
38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신 일을 알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39 그리고 우리는 그분께서 유다 지방과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40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41 그러나 모든 백성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증인으로 선택하신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42 그분께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심판관으로 임명하셨다는 것을
백성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우리에게 분부하셨습니다.
43 이 예수님을 두고 모든 예언자가 증언합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해

34

입을 연다라는 표현은 장중한 선언에 앞서 나온다.

 

37

루카는 예수사건이 요한의 세례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 사건은 갈릴래아에서부터 시작하여 유다 전체를 거처 예루살렘에서 끝나게 된다.

 

38

하느님이 예수를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부으셨다는 표현은 루카 4.18을 반영한다. 공생활 시작과 더불어 소개된 예수의 나자렛 첫 설교는 이사 58.661.1을 바탕으로 예수의 선교활동 전체를 조명하는 청사진을 제시한다. 성령과 능력의 연설에 대해 루카 1.17;4.14; 24.49; 사도 1.8 참조. 복음에서 예수의 능력은 치유행위에서 드러난다.

 

선을 베푸는 이라는 표현은 루카가 헬라 통치자들을 가리키는 칭호. ”은혜를 베푸는 자에서 영감을 받아 사용한 것 같다.

 

하느님의 인도와 보호를 가리키는 칠십인역의 표현. 이 표현은 소위 양자 그리스도론을 부여하는 일반적 인물묘사에 해당한다. 양자 그리스도론이란 하느님이 인간 예수를 당신의 양아들로 채택하셨다는 학설이다. 하느님이 예수와 함께 계시다는 생각은 2.22에도 반영된다.

 

39

베드로는 세례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예수의 삶을 목격한 열두 사도의 한 사람으로서 증언한다. 유다인들의 지방 안에는 갈릴래아도 포함된다.

 

십자가 처형 묘사는 5.30(신명 21,23)과 유사하다.

 

40

죽음과 부활에 대한 캐뤼그마적 발언은 2.22-24; 3.13-13; 40.10과 비슷하다.

 

41

사도들은 예수께서 하신 일과 그분에게 닥친 일의 증인이다. 그들의 증인 자격은 하느님이 미리 선정하여 부여하신 것이다. , 하느님은 예수 사건에서처럼 제자들의 증인 자격에서도 주도권을 행사하신다.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식사를 했다는 전승. 루카 24.30-31; 36-43; 사도 1.3-6.

 

42

예수를 심판자로 보는 생각은 루가복음 여러 대목에 암시된다.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심판자는 만민의 주님이라는 묘사와 연결되면서 루카의 보편적 구원관을 시사한다. 이 표현은 초대 그리스도교 안에 일반화에 있었다. 부활하신 예수를 심판자로 세우신 분도 하느님이다. 인간으 보편적 구원을 주도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여기서도 강조된다.

 

43

성서 말씀, 특히 예언자들의 말씀이 성취된다는 생각은 루카복음과 사도행전의 중심주제 가운데 하나다. 이 대목은 루카 24.44-47과 매우 유사하다. ”죄의 용서는 루가가 즐겨 쓰는 용어다.

 

 

2독서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입니다. 3,1-4
형제 여러분, 1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2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3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4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해

1

1절 앞부분은 2.20 앞부분과 병행구다. 의미론적으로 볼 때 1절은 2절과 병행어다.

 

함께 일으키셨다면”; 내용상 2.13을 연상시킨다. 2.13은 세례와 직결된다. 물론 벌써 이승에서 저승으로 옮아갔다는 말은 아니고 믿는 이의 구체적인 삶이 세상에 나타나야 할 새로운 삶으로 변했다는 말이다.

 

는 무엇보다 그리스도가 있는 을 가리킨다.

 

찾으시오”. 현재 명령법으로 지금 바로 실천해야 할을 뜻하며 칠십인역이고도 계속적인 노력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2

위에 있는 것1절과 병행하지만 2절의 앞뒤 부분은 서로 반명제로 되어 있다(”위에 있는 것”-”땅에 있는 것”).

 

1절의 찾으라생각하라는 서로 보충설명하는 병행어다. 이들은 초대교회의 훈계용이다. 두 명령 모두 2.16.20-21에서와는 달리 직접 초대 공동체를 겨냥한다. “위의 것을찾고 그것만을 생각하라는 명령 내지 그 당위성의 근거는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존재한다는 데 있다.

 

하지 말라는 부정문을 통해 양측의 대립이 뚜렸해진다. “땅에 있는 것은 곧 인간적인 적, 세상 권세. 세계 내적인 것을 지칭한다. 1절에 이어 이곳 2절에서도 위에 있는 것을찾도록 명한다. 그 내용은 12-17절에서 밝혀진다.

 

3

원문에서 이 구절은 가르(왜냐하면)로 시작된다. , 골로사이 공동체가 왜 위에 있는 것을추구해야 하는지 앞 구절에서 명령한 이유를 밝힌다. “그리스도와 함께를 중심으로 볼 때 3절은 1절과 병행한다.

 

여러분은 죽었고”,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음을 뜻한다. 이제야 비로소 위에 있는 것을이 무엇인지 뜻하는지가 명백해졌다.

 

그리스도와 함께”,“하느님 안에와 더불어 공동체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하느님 안에”, 바로 여기 인간 생명이 감추어져 있다.

 

숨겨져 있다. 감추어져 있다는 수동형 과거로서 이미 이루어진 행위가 지속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공동체의 현실적 삶이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본연의 의미는 뒤따르는 4절에서 명확해진다.

 

4

이 구절은 1.18을 더 함축적으로 또한 1,15-17을 더 구체적으로 진술한다. 서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는 그리스도와 공동체 사이의 끈끈한 관계가 요약되어 있다.

 

여러분의 생명을 그리스도와 동일시함으로써 지금까지 말해온 신비에 대한 진술이 절정에 이른다. 달리 표현하면 세례받은 이들의 삶은 곧 그리스도란 뜻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 다시 살아남에 대해 참조. 다른 삶, 곧 그리스도와 함께 있지 않은 삶은 결국 위선적인 삶이다(2.20 참조).

 

나타나실”; 이 동사는 미래지향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계시된다는 말은 곧 공동체의 삶이 무엇인지가 밝혀진다는 말이다. 그 때는 아무것도 감추어진 채 있을 수 없게 된다.

 

영광 속에”; 재림의 영광. 그리스도께서 궁극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실 영광을 일컫는다. 믿는 이들의 공동체는 이미 그러한 영광의 신비에 현실적으로 참여하고 있다.(1.11.27 참조).

 

그리스도 공동체의 삶은 이미 가시적이며 감각적인 이세상 차원을 뛰어넘은 삶으로 이어진다.

세례가 이를 가능하게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세례로 그분과 더불어 죽었기 때문이다. 곧 위선적이고 가시적인 이 세상 삶은 죽음을 통해 부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현양되신 주님을 중심에 두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이에 이미 지금이라는 현실적 차원과 미래에 완성될 모습 사이에 긴장이 서려 있다.

 

 

 

복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9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4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5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9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해

1

예수가 부활한 날 곧 주님의 날을 가리키는 그리스도인들의 표현으로서 일요일에 해당한다.

예수의 부활을 아직 믿지 못한 것을 가리키는 상징적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

예수의 십자가형 선고가 이루어진 빌라도의 심문이 이른 아침에 이루어졌듯이 예수의 부활 증언도 이른 아침에 시작되었음을 시사하고자 한 듯한다.

 

막달라는 갈릴래아 호수 남서편 지명으로서 마리아의 출생지를 가리킨다.

은 무덤 입구를 막은 큰 돌을 가리킨다.

 

2

다른 제자란 베드로와 함께 언급된 익명의 다른 제자와 관련된 듯하다.

 

제자들이 예수의 시신을 무덤에서 빼돌렸다는 당시 유다인들의 소문과는 달리 누군가가 예수의 시신을 무덤에서 가져가 버렸다는 뜻이다. 이 일은 다른 대목에서도 막달라 마리아의 입을 통해 반복된다. 물론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 부활을 생각한 것은 아니다. 예수의 시신이 무덤에 없다는 사실을 두 제자에게 알림으로써 급히 무덤에가서 확인토록 했을 따름이다. “우리라는 표현은 무덤에 찾아간 이가 막달라 마리아 혼자가 아님을 시사한다. 일부 사본에는

 

우리대신 나는으로 되어 있으나 본문비판의 원칙에 따라 전자에 더 신빙성을 둔다. 요한복음에는 공관복음과 달리 무덤에 찾아간 동기가 전혀 언급되어 있디 않다. 공관복음에서처럼 예수의 시신에 도유하러 간 것은 아닐 것이다. 장례 때 이미 도유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슬픔 때문에 곡하러 갔을 것이다.

 

3

원문에는 동사가 단수형태로 베드로에게만 적용되어 있다. 즉 막달라 마리아의 말에 베드로만이 즉각 반응을 보였다. 이 반응은 숨어 있던 베드로가 밖으로 나왔다는 것을 시사한 듯하다. 그리고 애제자에 관한 언급은 추가되었음도 반증하는 듯하다.

 

5

예수와 애제자의 관계가 시사된 듯하고 베드로의 권위있는 위치와 예수 부활의 증인으로서 역할, 곧 위계질서가 반영된 듯하다. 아무튼 경주로 표현되듯이 베드로와 애제자의 어떤 경쟁임은 분명하다. 아마도 저자는 애제자가 베드로에게 모든 우선권을 내주지만 베드로보다 크지도 작지도 않다고 말하고자 애제자를 전면에 내세운 듯하다.

 

7

이 빈무덤사화의 전개과정에서 돋보이는 것은 등장인물들의 눈으로 본 대상들이 점점 극적으로 고조되며 묘사된 점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입구에 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았고,“애제자는 무덤 안에 놓인 염포들을 보았으며, 베드로는 염포들수건을 보았다. 이런 묘사는 저자의 의도가 담긴 문학적 기교로 여져진다.

 

, 베드로의 권위와 역할이 반영되며 그들이 눈으로 본 대상들은 예수의 부활을 알리는 일종의 표징으로 여길 수 있다. 부활한 예수는 새로운 천상적 실존을 취했기 때문에 염포들이나 수건을 남겨놓고 무덤을 떠나간 것이다. “염포들이나 수건따로 한 곳에 개켜져 있었다는 묘사는 애제자가 믿음을 가지게 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소생한 라자로의 얼굴이 수건으로 감겨져 있었다는 묘사와 비교할 때, 예수는 소생한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부활했다는 표징적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

 

8

빈무덤사화의 절정이다. “애제자는 무덤 안에 들어가 정황을 보자 즉시 예수의 부활을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덤 안의 정황은 예수 부활의 표징이요 동시에 증언의 역할을 하게 된 셈이다.

 

9

빈 무덤 또는 예수 부활에 대한 두 제자의 불신이나 놀라움을 전제한 이 설명은 현 문맥에서 애제자의 믿음에 상충되지만 내용상 그 믿음을 역으로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와 베드로는 빈 무덤을 보고도 아직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한 것으로 언급된 맥락에서 볼 때, 이 구절은 애제자에 관한 언급은 추가된 것이 더욱 분명해진다.

 

성경은 여기서 성경 말씀 전체를 가리키고 인용된 말은 공관복음의 선포적 수난예고와 관련된 말로서 특히 루카복음의 빈무덤사화와 맥락을 같이한다. 루카복음은 예수의 수난, 죽음, 부활이 성경에 이미 기록된 대로라고 보도한다. “그들은 아직도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란 말은 후대 신학적 성찰과 예수 부활을 통해 얻게 된 새로운 성경 이해를 시사한다. 루가복음도 흡사한 말을 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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