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새것과 옛것을 꺼집어 냄 [영 움직임의 식별]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08-07-30 조회수557 추천수4 반대(0) 신고

 
옹기장이는 진흙을 손으로 빚어 옹기그릇을 만드는데, 옹기그릇에 흠집이 생기면 자기 눈에 드는 다른 그릇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그 일을 되풀이하였다. ... “이스라엘 집안아,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 옹기장이처럼 너희에게 할 수 없을 것 같으냐? 이스라엘 집안아,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처럼 너희도 내 손에 있다.” <목요일 독서>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 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목요일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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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차적 원인>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처럼 너희도 내 손에 있다. <독서>
<이차적 원인>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복음>
 
 
성 이냐시오는 여러가지 영들의 움직임을 식별하기 위하여 기도에 따른 체험들을 성찰하도록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즉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이끌려지는 은총의 움직임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악신의 움직임이다. 이냐시오 영신수련의 묵상과 관상들은 항상 주님과 함께 하는 대화로 향하도록 하고 있다.
 
- 은총은 내가 진실로 원하는 것을 갖는 것이 아니고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이다. 내 스스로 은총을 야기시키지 못한다. 나는 은총을 청할 수 있고 은총을 기다릴 수 있고 은총을 받아 들일 수 있다. -
 
성 이냐시오가 우리에게 요구하도록 명령하는 것은 사물들을 느끼고 체험하게 되는 모든 감각적인 은총들이다. 영신수련의 기도에서 우리는 은총을 달라고 하느님께 계속적으로 간청하는 것이다. <네이버에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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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하신 '하느님의 은총'을 통하지 않는 <인간의 자유>는 죄악에로 다가가는 것이다. 인간은 무엇을 생각하던지 무엇을 행하던지 자신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 <인간의 자유>가 전적으로 사람의 영혼 안에서 이루어진다면 '하느님의 은총'은 아마도 그에게는 반드시 필요하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펠라지우스주의) 더 나아가서는 은총이란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자신이 야기시키게 되는 것이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자신이 정당하게 처신하고 그 결과로써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달라고 빌기만 하면 모두 얻을 수 있는 그것을 은총이라고 그렇게 속단하기 쉽다. 이런 주술적인 신심행위는 자신의 문화의식과 생활양식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정신 안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든 '샤머니즘의 침투' 때문이다. 인간이 원하는 것은 모두 다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다는 '미신화' 이다.

자신의 생각과 활동(행동)에서 벌어진 '영들의 움직임'을 그리스도 안에서 조용히 성찰하여 '은총의 움직임'과 '악신의 움직임'을 분명하게 식별하기 보다는 자신에게 명확하게 주어진 (주입된) 어떤 환상에 따라 자신에게 일어난 (벌어진) 주위의 감각들을 살피며 여전히 그 환상 속에다 자기 자신을 들여 놓는 일들을 지속적으로 반복해 나갈 때 이런 감흥적인 육정은 인간의 '영적인 탐닉'에 지나지 않는다.

하늘나라의 제자가 된 사람들(은총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그들은 새것(신약의 예언)도 꺼내고 옛것(구약의 예언)도 꺼내는 '자유의지'(집주인)를 하느님의 은총을 통하여 행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들의 '영들의 움직임'을 은총의 도움으로 식별해 낸다.

따라서 그들에게 <인간의 자유>는 선 그 자체가 된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은총'을 앞세우는 (주님을 경외함, 하느님께 불경하지 아니 함) 하늘나라의 제자들에게는 주님께서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처럼 너희도 내 손에 있다."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영들의 움직임'을 파악해서 악(령)을 물리치고자 그리스도 안에서 성찰하는 것이다. (성찰과 집중)

인간의 죄는 그리스도께서 멸망시키셨다. 인간은 '죄의 지배' (죄의 힘)에서 벗어났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가 된 우리는 이미 예수님과 함께 죽었으며 이미 죽은 사람은 죄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율법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은총의 지배' (은총의 힘)를 받고 있으므로 죄가 여러분을 지배할 수 없을 것입니다." (로마서 6, 1 - 14) 하늘나라(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의 자유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가 되어진다.

옛것(십계명, 구약의 예언)들을 꺼내기도 하고 새것(새계명, 신약의 예언)들을 꺼내기도 하는 집주인 처럼, 혹은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리는" 천사들 처럼 악(령)을 가려내서 물리치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생명(하느님의 생명)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하늘나라를 차지하는 것이다.

하늘나라의 제자가 된 율법 학자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 '율법의 완성을 이루는 사랑'의 사도 (성령의 사도)이다. '하느님의 자기 전달' (곧, 사랑)을 수취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한 몸(사랑의 지체)이 된다. 여기서 성령께서는 '사랑의 주님' 이심을 통찰하게 되며 '성령의 사도'라고 불리어 지기도 한다. '성령의 사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율법의 완성'을 이룬다.

그들은 '은총의 통로'가 되는 기도를 중시하며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이 그들의 기도이다. 기도 안에 하느님이 없다면 주술(미신)이 되며, 삶과 일치된 기도가 아니다면 영혼은 하느님으로부터의 은총을 열망하지 못한다. 세속사람들의 온갖 유혹과 시험, 잘못되고 그릇된 판단, 주위에서 일어나는 악으로부터 승리의 힘은 모두 일차적으로 하느님에게서 얻는 것이다. 

기도 속에서 '하느님의 자기 전달'은 삶의 실재가 되며, 삶 속에서의 기도는 '하느님의 자기 전달'을 나타내신다. 또다시 기도 속에서 '하느님의 자기 전달'은 삶의 실재가 된다.(시에나의 카타리나 성녀) 기도와 동시에 자기 삶에서 '영의 움직임'을 식별하는 성찰(묵상, 관상)이 없다면 기도는 반성에만 머무르게 되고 하느님과의 일치는 갈망할 수 없다.

자기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섬기는 '활동'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는 '관상'이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이 되는 것이다) 자기 안의 그리스도는 말씀(관상)과 성체(활동)이시다. 이로써 영혼은 '영의 움직임'을 그리스도 안에서 식별해 내는데 이는 주술적이지 아니하고 실제적이다. 따라서 모든 예언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옛것(구약의 예언)과 새것(신약의 예언)을 꺼집어 내어도 결코 진리는 상반되지 않는다.

실행이 없는 머리만으로 진리를 꺼집어 내게 되면 서로 상반되어 보이고 '영의 움직임'을 그리스도 안에서 올바르게 식별해 낼 수 없다. '하느님의 자기 전달'이 그 영혼에게 막혔기 때문이다. (기도가 막혔다는 의미이다) 하느님의 은총은 결코 '주술'에 의존되지 아니한다. 새것과 옛것을 꺼집어 내어 통합하는 '영의 식별'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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