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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9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독서,복음(주해)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4-18 조회수1,074 추천수1 반대(0) 신고

1독서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십시오.>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2,36-41
오순절에, 베드로가 유다인들에게 말하였다.
36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
37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38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39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과 또 멀리 있는 모든 이들,
곧 주 우리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이에게 해당됩니다.”
40 베드로는 이 밖에도 많은 증거를 들어 간곡히 이야기하며,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 하고 타일렀다.
41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인 이들은 세례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날에 신자가 삼천 명가량 늘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해

36

이스라엘 백성을 이스라엘 집안이라고 한다. 베드로는 성령강림사건을 계기로 유다인들이 십자가형에 처한 예수가 주님이시오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라는 사실을 똑똑히 인식할 것을 요구한다. 모든 인간은 자신들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위엄 앞에 응답을 요청받는다.

 

37

37-40절에서 보는 바와같이 선교설교는 으레 회개의 촉구로 끝맺는다. 회개는 하느님을 등진 인간이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감을 뜻한다. 회개의 뜻을 드러내는 종교예식이 세례다. 회개와 세례의 결과는 죄사함과 성령강림이다. 요즈음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푼다. 그러나 초대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다. 관련구절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2.38: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8.16: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19.5: “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10.48: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도록 명했다.”

 

39

루카는 앞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한 바 있다. 이제 39절에서는 이를 부연하여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약속을 받으리라고 한다. 청중 편에서 보면 유다인들만을 생각하고 한 말이겠지만, 사도행전 전체를 보면 이방인들까지 포함한 말이다.

 

40

이 사악한 세대는 신명 32.5와 시편(LXX)77.8에서 따온 표현이다. 필립 2.15에서는 악하고 비뚤어진 세대라고 한다. 비슷한 표현이 마태오와 루카 복음서에 나온다.

 

41

오순절에 베드로가 예루살렘의 유다인들에게 한 선교 설교의 성과가 엄청나서 큰 교회가 창립되었다고 한다. 원래는 120여 명이 성령을 받았는데, 이제 추가로 3,000명이 늘어났다. 그리하여 부활,승천하신 예수를 받드는, 하느님의 새 백성이 탄생했다. 이 초대교회의 구성원들은 스테파노가 순교한 뒤에 사방에 흩어져 복음을 전하는 일꾼들이 된다.

 

 

 

 

 

 

 

 

복음

<제가 주님을 뵈었고, 그분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1-18
그때에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12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4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15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18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해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나타나시다

이 대목은 앞 대목(1-10)에 연결되어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무덤에서 체험한 두 천사의 발현과 부활한 예수의 발현 장면을 보도한다. 일반적으로 첫 장면을 더 오래된 전승으로 여긴다. 이 내용은 특히 루카복음의 전승과 맥락이 같다. 이에 비해 둘째 장면은 마태오복음과 상통한다. 서로 다른 이 두 장면이 막달라 마리아가 뒤로 돌아선다는 묘사로 연결된다. 내용상 첫 장면은 빈 무덤에 대한 증인의 역할만 할 뿐 별다른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는 반면, 둘째 장면은 부활한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만남과 대화가 보도되어 부활발현사화의 절정을 이룬다. 저자의 최대 관심사가 반영된 셈이다.

 

11

현 문맥에서는 막달라 바리아가 다시 무덤으로 돌아왔다는 말도 없이 매끄럽지 않게 연결되어 있으나 원래는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찾아간 내용에 직결되었으리라 여겨진다. 마리아가 울고 있었다는 표현은 지속적으로 오래 슬픔에 잠겨 있었다는 뜻으로서 예수의 죽음보다는 시신이 없어진 데 대한 슬픔과 걱정을 가리킨다.

 

12

흰옷 입은 천사들의 발현은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계시에 대한 묵시문학적 관념이나 표상으로서 많이 언급되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설제적 증거의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여기서는 부활 메시지를 전하는 공관복음과 달리 두 천사가 예수의 시신이 놓인 곳을 가리키면서 시신이 무덤 안에 없다는 것을 증거해줄 뿐이다. 따라서 천사의 입을 통한 빈무덤 사건의 설명이나 천사의 발현 자체와는 거리가 먼 묘사다. 두 천사를 보고 막달라 마리아가 전혀 놀라지 않은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13

천사 발현에서 볼 수 없는 어색적 장면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천사에 대한 두려움이나 놀라움도 없이 보통 사람 대하듯이 대화를 나눈다. 천사의 물음은 상황에 알맞은 내용으로서 또한 부활한 예수의 입에서도 반복된다. 막달라 마리아의 대답도 시몬 베드로와 애제자에게 알린 내용의 반복이다. 이것은 부활한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상봉 장면을 전제로 한 서술로 볼 수 있다. , 부활한 예수 자신이 부활의 신비를 계시한다는 그리스도론적 관점에 역점을 둔 것이다.

 

14

막달라 마리아와 천사의 장면에서 부활한 예수와의 상봉으로 장면이 바뀌는 일종의 서술적 기교다. 이것은 천사와의 상면 장면이 이야기 전개과정에서 인위적으로 삽입되었음도 시사한다.

자기계시의 발현에 대한 부활한 예수의 주도권이 시사된 듯하다.

 

15

부인은 원문에 따르면 여자에 대한 자연스런 일반적 호칭이다.

없어진 예수 시신에 대한 슬픔과 걱정, 그리고 그 시신을 찾기에만 여념없는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을 시사한다.

 

선생님아저씨라 부르는데 원문에 따르면 남자에 대한 정중한 호칭이다. 문맥에 따라 선생님으로 의역했다.

 

예수의 시신을 혹시 다른 무덤에라도 옮겼는지 묻는다.

 

16

원문에는 마리아대신 마리암으로 되어 있다. 마리아로 표기된 일부 고대 사본도 있지만, 마리암이란 세족 계통의 표현이 더 원전에 가깝고, 랍부니라는 존칭에도 상응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예수의 이 부름은 평상시 마리아가 듣던 바로 그 음성이었을 것이다. 모자가 양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는 것을 연상시킨다. 부활한 예수는 믿고 찾는 자에게 자기 자신을 알아보도록 계시한다는 신학적 의미도 시사된 듯하다.

 

돌아서서는 마리아가 자기 자신을 온전히 예수에게 향한다는 의미도 함축되어 있다. 일부 사본에는 그분을 알고서”.

 

라뿌니는 여기서 히브리어는 다른 대목에서처럼 아람어를 가리킨다. 라뿌니는 아람어로서 나의 선생님이란 뜻이다. 랍비와 병용되지만, 좀더 정중하고 엄숙한 의미가 있다. 평상시 듣곤 했던 예수의 음성을 통해 부활한 예수를 알게 된 마리아도 이제 평상시 사용했던 존칭으로 응답한다. 양들이 자기네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따라가는 것을 연상시킨다. 부활한 예수는 마리아에게 바로 지상 예수와 다를 바 없었다.

 

다만 새로운 방신으로 부홀한 예수와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뿐이다. 마리아는 전인적으로 신뢰와 믿음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을 부르는 부활한 예수를 알아볼 수 있는 그런 믿음의 만남도 체험할 수 있었다는 신학적 의미가 시사된 셈이다.

 

17

붙잡지 말고 놔두라는 이유는 우선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의 부활을 알리도록 하는 데 있다. 지체하지 말고 어서 제자들에게 가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반면에 부활 실재는 인간의 범주를 초월한다는 것을 뜻한다. 만짐은 인간 실존 확인의 기준이기 때문이다. 부활한 예수는 현세에 맞는 인간적 방법으로 감지될 수 있는 그런 실재가 아니라, 다른 차원의 신앙 안에서 만나고 체험하는 실재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버지께로 올라가야 한다는 예수의 말에서도 반증된다.

 

마리아가 부활한 예수를 붙잡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 말로서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구절이다. 아직 부활한 예수가 지상과 하늘 사이에 떠 있는 듯 오해할 수도 있고, 마리아가 부활한 예수를 예전처럼 지상에 머물도록 하고자 했다는 오해도 일으킬 수 있다. 그리고 예수가 부활하는 것, 아버지께로 올라가는 것,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 서롤 분리된 별개의 일로 오해할 수도 잇다.

 

하지만 이 구절은 요한복음에만 특유한 표현과 함께 저자의 설명이기 때문에 저자의 신학적 의도에 따라 그 의미를 살펴야 한다. “아버지께로 올라간다는 말은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알려야 하는 예수의 말 가운데 설명되어 있고, 저자의 의도도 그 내용에 함축되어 있다. 한마디로 부활한 예수는 제자들에게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 아버지께 올라가서 제자들에게 아버지와의 일치된 공동체를 중재해야 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이 공동체는 예수가 아버지 하느님께로 떠나감으로써 형성된다.

 

마리아는 부활한 예수로부터 부활 메시지를 형제들에게 알리도록 위임받았음을 뜻한다. 여기서 형제들은 예수가 제자들과 맺은 새로운 관계를 시사한다. ,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통해 예수와 하느님과의 관계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예수가 고별 때 약속한 바를 제자들에게 상기시키는 메시지다. 이 메시지는 한마디로 예수가 아버지께로 올라감으로 인해 제자들에게 이루어질 아버지 하느님과의 일치된 공동체를 뜻한다. 예수의 아버지 하느님이 곧 제자들의 아버지 하느님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제자들은 이제 예수의 형제들로 칭해지게 된다. 그러므로 부활한 예수는 아버지의 집에제자들이 거처할 곳을 마련하겠다는 약속을 이제 아버지와의 일치된 공동체를 중재함으로써 지키게

 

된 셈이다. 또한 요한복음에 따르면 부활한 예수는 이미 아버지께로 올라갔음을 뜻한다. 즉 예수의 죽음,부활, 들어올려짐, 아버지께로 올라감, 영광스럽게 됨은 모두 동시사건으로서 예수의 시간이란 말안에 함축된다. 여기서 표현된 시간적 구분은 다만 신학적 내용의 관점에 따른 표현에 불과한 예수, 곧 아버지께로 올라간 예수라는 뜻이다.

 

18

예수 부활발현을 체험했다는 의미다.

예수의 부활 체험에 바탕을 둔 부활 메시지의 선포를 뜻한다. 특히 한 여자가 남자들에게 예수 부활 소식을 알렸다는 점에 유의할 만하다. 아마도 예수의 십자가상 죽음에 이르기까지 신의를 지킨 대가와 관련된 듯하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도 또 다른 특혜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한복음 전체 맥락에서 볼 때, 막달라 마리아의 부활체험은 제자들에게 예수 부활 소식을 알리는 데 의미가 있을 뿐이다. 부활한 예수는 제자들에게 발현하여 성령을 주고 죄를 사할 권한과 함께 사명을 부여할 것이므로 부활한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만남은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에게 발현한 내용을 말하기 위한 일종의 서막이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성선설(性善說)과 성악설(性惡說)

성선설은 인간의 본성은 선천적으로 착하다는 맹자의 설이고 성악설은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고 하는 순자의 말이다. 그럼 생각해보자. 인류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를 만들고서 에덴동산에 살게하셨는데 선악과만 따먹지 말고 모든 것을 먹어도 좋다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으니 이에 순종만하면 인간은 이는 본성은 선으로 태어났다고 본다

 

그러나 살면서 선악과를 따먹으니 인간의 본성은 성선설에서 이에 반하여 인간의 본성은 성악설의 본성인 악이다. 원래 악한 본성인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살면서 선한 일들을 하여 악에서 선으로 간다고 볼 수 있다. 이 과정이 연옥과 같다. 그런데 사람은 선으로 태어났지만 악을 지으면서 살고있는데 회개하여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하니 이 또한 성선설이다. 그리고 세례받고 또 죄를 지었을 때 고백을 통하여 죄의 용서를 받는다하니 고백성사는 그 순간에 선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선하신 분은 하느님뿐이시라고 하신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으셨으니 본성이 성선설이 맞다고 본다. 악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선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뜻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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