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책잔치/ 최강 스테파노신부
작성자오미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1-12-24 조회수457 추천수9 반대(0) 신고




석 달 가량의 본국 휴가를 마치고 로마에 돌아와서 맞은 두 번째 주일미사를 집 근처 양로원에서 봉헌하고 돌아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어릴 적부터 계명을 충실하게 지켜왔다는 젊은이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마르10,17)고 묻자 ‘가진 것을 팔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고 명하신다. 가진 것이 많은 젊은이는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예수님 곁을 떠나갔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그러니까 아직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의 내 방 풍경이 마흔이 된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우리 형제들에게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이 되라’고 무언의 주문을 하시면서 아버지께서 그리시고 붙여 놓았을 내 키보다도 더 컸던 ‘개미와 베짱이’ 그림이 긴 한 쪽 벽면을 온통 차지하고 있었고 나머지 벽면은 창문을 빼고는 온통 책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아버지는 책을 좋아하셔서 다독을 하신 분이셨는데 그 많은 책들을 얼마나 애지중지 아끼며 모아놓으셨는지 나는 어린 시절을 책 속에 파묻혀 지냈다. 그런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책읽기를 좋아한 나는 아주 어린 꼬맹이 시절부터 밤을 새워 책읽기를 좋아해서 자정이 가까워오면 부모님이 전등불을 강제로 꺼버리기 일쑤였다.

비단 책읽기뿐만 아니라 손때 묻혀 읽은 책들을 모으는 일도 아버지를 닮았는지 고등학생 시절에는 내가 아끼는 책을 빌려간 친구가 책을 돌려주지 않자 단호하게 친구관계를 단절했었던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이 터져 나올 만큼 유치한 행동이지만 한때는 친구보다 책이 더 소중하게 생각되기도 했었던가 보다.

손때 묻혀 읽은 책을 모으는 습관은 지금까지 여전하다. 로마에 와서 만 삼년을 보낸 지금, 처음 이 곳 생활을 시작할 때보다 부쩍 늘어난 것이 책이다. 논문 쓰는 일에 관련된 책 말고도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 받아 본 책들이 커다란 삼단 책장에 두 줄로 세워져 있고 그것도 모자라서 책 위에 책들이 빼곡히 누워있다.

가만히 차 한 잔을 마시면서 방을 둘러보는데 오늘따라 이상하게도 책장을 꽉 채우고 있는 책들이 마음에 걸린다. 책 모으기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좋은 습관이고 고상한 취미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왠지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만인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마르16,15)는 지상명령을 받은 선교사에게는 썩 어울리지 않는 습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나눔이라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이미 읽은 책을 쌓아 놓고 있느니보다 좋은 책을 주변 친구들에게 권하면서 나누어 읽는 것이 보다 큰 선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책장 앞에 서서 한 권, 두 권...... 주위 친구들에게 나눠줄 책들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이 책은 다시 한 번 보고 싶고, 저 책은 소장할 만한 가치가 너무 큰 책이고...... 두 세 차례나 골라냈는데도 책장 안은 여전히 책들로 빼곡히 채워져 빈틈이 생기지 않았다. 안되겠다 싶어서 어느 수녀님이 알려준 최후의 수단을 써보기로 했다. 책장 속의 책들을 온통 방바닥에 쏟아버린 뒤 논문을 쓰는 데 필요한 책들과 지금 당장 꼭 필요한 책들만 골라내서 다시 책장에 꽂았더니 그때서야 비로소 세 칸의 책장에 한 줄로 책이 꽂히고도 약간의 빈 공간이 생겼다.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정이 들 만큼 들은 책들을 쌓아놓고 전화로 후배신부님을 초대하여 필요한 만큼 가져가게 하기도 하고, 우연히 알게 된 어느 수녀님에게는 재미있고 가벼운 내용의 책들만 골라 한 보따리 보내기도 하고, 이탈리아 말로 된 소설책 몇 권은 청소하는 아줌마한테도 선물하고 했더니 어느 새 책 잔치가 끝이 났다.

이제 며칠 동안 방에 들어오면 책장의 빈 공간으로만 눈길이 꽂힐 것이다. 며칠 동안은 책장 속의 빈 공간을 바라보면서 아쉽고 어색해 하겠지만 이내 그 빈 공간만큼 무거웠던 내 삶이 가벼워졌다고 생각하면서 새로 들인 습관에 만족해 할 것을 나는 믿는다.

오늘은 책을 덜어냈다. 내 삶에서 가장 오랜 된 습관 중의 하나를 덜어냈다. 하지만 아직도 이 무거운 삶에서 덜어낼 것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지금 당장 내가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들이 아닌, 내 삶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모든 무거운 것들을 덜어내고 가벼운 걸음을 걷고 싶다. 혹 내일 필요할 지도 몰라 쌓아놓은 것들도 오늘 당장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사람들에게 덜어주고 나는 오늘 하루에 더 집중하며 경쾌한 가벼움을 택하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을 따르고 싶어도 가진 것이 많아서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주님 곁을 떠나간 오늘 복음 속의 젊은이의 운명이 나의 것이 될 것이니......

“너희는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해어지지 않는 돈지갑을 만들고 축나지 않는 재물 창고를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에는 도둑이 들거나 좀먹는 일이 없다.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루가12,33-34)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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