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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4주간 - 우리는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작성자박명옥 쪽지 캡슐 작성일2012-03-20 조회수457 추천수2 반대(0) 신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우리는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찬미예수님

눈은 두 가지로 나누는데 육의 눈과 영의 눈이 있습니다.

육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면 두 가지 조건이 있어야 되는데

의학적으로 아무 이상이 없어야 되고, 또 빛이 있어야 보입니다.

 

 

성령의 빛이 있어야 영의 눈이 떠지고 맑아집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태생소경은 예수님을 만나서

육의 눈도 고치고 영의 눈도 열립니다.

 

 

그러나 육의 눈을 뜨고 난 기쁨도 잠시 시련과 박해가 만만치 않습니다.

바리사이파들이 “너 원래부터 장님이 아니었잖아!”

예수님의 치유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분명히 장님이었던 것을 알면서도

안식일에 그 일을 했다고 끌어들이려고 합니다.

 

눈 뜨자마자 인생살이가 얼마나 고달픈지

육의 눈은 떴지만 정신적인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서슬이 시퍼런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압력에 그대로 굴복했을지 모릅니다.

태생소경으로 있다가 주님을 만나서 광명을 찾은 그분은 공포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

 

이것으로 영의 눈이 떠진 사람이 어떻게 변하는지 명백하게 밝혀집니다.

영의 눈이 떠져서 영의 눈이 밝아진 사람은 두 가지의 큰 은총을 받습니다.

첫 번째, 분별력이 생깁니다.

두 번째, 담대함이 생깁니다.

 

영적으로 눈뜬 이 사람은 분별력과 담대함이 생기기 때문에 권력과 조직에 맞섭니다.

“무슨 소리를 합니까? 이분은 예언자이십니다. 저는 눈이 멀었다가

실로암 연못에 가서 눈 고쳤습니다.”

 

 

영적으로 눈을 뜬 사람은 세 가지의 열매를 맺습니다.

선의 열매, 정의의 열매. 진실의 열매

 

성령의 빛을 받아 영의 눈이 열리면

惡쪽이 아니라 죽을힘을 다해서 善쪽에서 살려고 합니다.

 

 

영의 눈이 열리면 불의와 과감히 맞서고 정의 쪽에서 살려고 애를 씁니다.

영의 눈이 열리면 진실된 것이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위선을 경계하고, 거짓을 미워하며, 진실하게 살려고 기를 쓰고 애를 씁니다.

이것이 바로 영의 눈이 열린 사람, 그리스도의 빛을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영의 눈이 열리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내 안의 어떤 어둠, 나를 영성적으로 성숙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그것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것만 아니면 영의 눈이 열릴 수가 있는데~

그리고 이 땅에서 천국을 바라볼 수 있는데 ~

바로 그것 때문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 무얼까?

 

그것을 네 가지로 요약하면 첫 번째, 죄악입니다.

죄악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내면에 잠재해 있는 악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罪라고 합니다.

죄는 내 안의 악을 물리치지 못한 결과입니다.

악을 물리치려면 철저하게 준비된 고해성사를 보아야 됩니다.

특히 모고해로부터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모고해는 거짓고해를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고해를 합니다.

정말 주님과 화해해야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심지어

어떤 이는 죽을 때까지 입을 다물고 죽습니다.

 

모고해는 지옥으로 바로 떨어지는 죄라고 성모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고해성사를 통해서 빛이 내 안에 들어오면 어둠은 물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빛을 일부러 멀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빛이 들어오면 어둠은 견디지 못하기에 내 더러운 영혼이

하느님의 빛이 들어올 때, 두려움과 물러남을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식적으로 빛을 멀리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형식적인 고해성사가 아니라 가슴을 찢는 성사를 봐야 합니다.

 

나를 영성적으로 크게 하지 못하는 원초적인 걸림돌이 죄악입니다.

천주교신자들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이 세상의 어떤 종교도 죄를 사해주는 종교는 없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예수님의 배려 때문에 사제의 입술을 통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네 죄를 사하노라!”

하는 소리를 이 귀로 똑똑하게 듣습니다.

 

인간은 심리학적으로, 감각적으로 와 닿을 때 확신을 갖는다고 그럽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위대한 심리학자입니다.

그것까지도 배려하셔서 사제의 입술을 통해서 사죄경을 외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죄악으로부터 겸손하기만 하다면 언제든지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그 무거운 짐 덩어리를 옮겨놓을 수 있습니다.

 

래서 우리는 부끄러워 말아야 됩니다.

하느님 앞에 부끄러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정작 부끄러워해야 될 것은 하느님 앞에

올바르게 죄를 고백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될 겁니다.

 

두 번째 영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하는 걸림돌, 너무 지나치게

리로만 하느님을 믿으려 하는 것일 겁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느님을 어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작은 구멍 안에 어떻게 바닷물을 다 집어넣을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머리로 하느님을 알아야 얼마나 알겠습니까?

 

그리스도교는 계시종교라고 그럽니다.

계시종교는 인간이 만든 종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스스로 '내가 어떤 존재다!' 하고 알려주십니다.

 

우리는 너무나 엉뚱한 곳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처음 입학해서 두 달 동안 라틴어공부를 하고

첫 번째 단어시험을 보는데, 시험문제 20개 가운데 한 개는

백점을 안 주기 위해서 안 배운데서 냈습니다.

그것이 ‘맷돌’ 이 라틴어로 뭐냐!

알 재간이 없었어요.

저는 어떻게 해서든지 100점을 맞고 싶은 욕심 때문에 마지막까지

교실에 앉아 있다가 간이 밖으로 나와서 시험감독신부님 수단자락을 잡고서

답 좀 가르쳐달라고 눈짓을 했어요.

 

 

시험감독 신부님이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요?

당장 퇴학감이지요.

그분께서 “몰라~” 하고 가버리셨어요.

저는 시험이 끝나고 그 신부님께 왜 좀 안 알려주셨냐고 따지러 갔어요.

“내가 네 귀에 대고 답을 알려주었잖아!”

‘mola’

 

사전을 찾아보면 어금니를 ‘몰라’

어금니가 맷돌의 역할을 하니까~

귀에다가 답을 알려주었는데도 모른거야~

 

그때 신학교에서 첫 번째 배운 교훈은

이 세상 진리는 항상 내 옆에 흐르지만 내 욕심 때문에,

내 탐욕 때문에, 내 이기적인 마음 때문에, 그것이 들리지 않고 볼 수 없을 뿐이지!

단순하게 살아갈 때는 하느님의 진리를 가슴에 끌어안을 수 있다는 그것이었습니다.

 

제가 청주에서 본당신부를 할 때 그 성당이 조립식 성당이었는데

여름에는 성당 안이 얼마나 뜨거운지, 절절 끓습니다.

여름에 성체조배를 하기 위해서 맨 뒷자리에 앉아 있는데

졸음은 오고, 온갖 분심 속에 한 시간이 빨리 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때 갑자기 성당의 맨 앞문이 열리면서 쪼끄마한 아이가 들어오더니

제대 뒤의 십자가를 한참을 쳐다봐.

그러더니 뭘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떡거리면서 나가더라 이거야!

 

저는 뒤에서 그걸 지켜보고 있다가

‘저 밤톨만한 아이가 뭘 깨달았을까?’

얼른 그 아이 뒤를 쫓아나가서 “얘, 너 이 성당 다니니?”

“아니요, 그냥 지나가다가 들러봤는데요?”

“그럼 너 아까 뭘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니?”

“아하, 그거요? 그거 더하기 표시예요.”

더하기 표시 위에 웬 아저씨가 못에 찔려가지고 올라가 있더래!

 

저는 머리가 ‘띵~’ 하면서 충격을 받았어요.

다시 성당에 가서 자세히 보니까 정말 더하기 표시야.

수십년 동안 지켜보았는데도 저게 더하기표시라는 걸 한 번도 느낀 적이 없었어요.

‘맞다! 십자가는 더하기 표시야!’

 

내가 하도 분심 속에서 사니까 예수님이 그 십자가의 원리를

이렇게 조그맣고 단순한 아이를 통해서 알려주셨구나!

 

 

세 번째,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는데 치워야 될 걸림돌은 교만입니다.

교만은 진리 앞에,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 태도입니다.

교만은 자기의 부족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죄인임을 부정하는 태도입니다.

 

하느님의 큰 능력이 우리에게 나타나기 위해서는

그분은 갈수록 커지셔야 되고, 나는 갈수록 작아져야 됩니다.

그래야만 은총의 물의 힘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집니다.

 

머리를 곧추세우고 하느님보다 더 키가 크려고 했던 인간들이 누구였습니까?

바벨탑을 지어서 하늘 꼭대기를 한 번 뚫어보자!

이게 바로 교만이었습니다.

 

소화데레사 성녀에게 인생의 짐이 많은 어느 자매가 가서

“수녀님, 저는 제 앞에 있는 이 환난의 벽을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이 고통의 벽이 너무나 높습니다.”

수녀님은 “자매님, 뛰어넘으려하지 말고 밑으로 기어 들어가셔요..

그게 훨씬 더 쉬울 겁니다.”

 

겸손은 고난을 이깁니다.

예수님이 큰 바보이셨고

예수님이 당신의 보혈로 이 세상 더러운 것 다 닦아 주는 걸레처럼 사셨고 밑으로...

밑으로 내려가서 비록 그 무게에 짓눌리더라도 다른 이들에게 불을 붙여주는 연탄이셨던 것, 이게 바로 예수님의 겸손이었습니다.

 

겸손치 못한 자는 영적으로 성숙이 되지 않습니다.

사제의 검은 수단은 수의를 뜻합니다.

로마시대에 시체를 쌌던 옷이 사제의 긴 수단입니다.

사제는 서품 때 땅바닥에 엎드립니다.

‘너는 이제부터 너의 스승이신 예수님의 겸손을 닮아서 시체처럼 살아라!’

 

겸손의 옷을 입고 있지만, 몸뚱아리는 머리를 쳐들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겸손하기가 어렵지요~

은총을 청해야 됩니다.

 

네 번째, 영적으로 성장하는데 걸림돌인 영적의심을 버려야 됩니다.

먼저 우리는 사도신경에 나오는 교회의 가르침을 믿어야 됩니다.

 

전능하신 천주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천주존재를 믿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셨고

예수님을 낳으신 어머니가 동정녀이심을 믿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수고수난하시고, 부활하셨다고 하는

예수님의 수난사를 믿어야 됩니다.

 

교회는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져 왔다는

교회가 되기 위한 네 가지 조건이 우리 가톨릭 안에 있다는 것을 믿어야 됩니다.

 

예수님이 세우시고, 성령이 이 세상 끝날까지 지켜주시는 교회가

우리 가톨릭교회라고 하는 것을 믿어야 됩니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이는 내 몸이요, 내 피다!’ 할 때마다

그 성체 성혈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심을 믿어야 됩니다.

 

또 우리는 주님께서 재림하시고, 또 재림을 통해서 영원한 삶이

전개될 것이라는 것을 믿어야 됩니다.

 

우리가 죽으면 살아온 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요,

또 하느님 나라를 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믿어야 됩니다.

 

우리 모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죄와 악습으로 헤맬 때가 있습니다.

머리로만 하느님을 믿으려고 할 때도 있습니다.

영적교만과 영적의심 속에서 헤맬 때가 있습니다.

 

사제인 저도 네 가지 죄를 다 가지고 살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 사순시기 동안 우리들은 기도해야 됩니다.

주님, 우리의 탁한 영을 맑은 영으로 갖게 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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