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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7월 20일 야곱의 우물- 마태 13, 24-43/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8-07-20 조회수470 추천수5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예언자를 통하여 “나는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리라.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와,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마태 13,24-­43)
 
 
 
 
농사라는 것이 반드시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분명 농부는 좋은 씨를 뿌렸건만 어느 틈엔가 가라지가 섞여 자라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25절) 누군가의 훼방으로 농사를 망치게 생겼습니다. 얼른 가리지를 뽑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28ㄴ절) 밀과 가라지는 매우 흡사한데다 뿌리가 서로 뒤엉켜 자라서, 가라지를 뽑으려니 곡식까지 상하게 생겼습니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29절) 이 세상에는 선한 것과 악한 것이 뒤섞여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에도 악한 이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왜 아예 악을 없애버리지 않으시는 걸까요? 예수님은 뒤섞인 이 세상임을 인내하라고 하십니다. 밀과 가리지는 오랫동안 함께 자라다가 나누어질 것입니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30ㄱ절) 선과 악을 가르는 것이 예수님의 사명이 아닙니까? 그러나 여기서는 선한 행실과 악한 행실을 전혀 구별하지 않으십니다. 악한 사람을 제거할 권리가 공동체에는 없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수확 때 하실 일입니다. 판단할 권리는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만 있습니다.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는 세상 끝 날까지 함께 공존할 것입니다. 종말에 가서야 선과 악의 궁극적인 판가름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라면 흔히들 결백한 그리스도인들만 모인 공동체라고 생각합니다. 죄인들은 모두 추방시켜야 하고요. 그러나 예수님은 엄격주의를 반대하십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에도 마지막까지 곡식과 잡초가 함께 자랄 것입니다. 잡초를 뽑으려다 애꿎은 곡식까지 잘려 나가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작은 실수조차 용납하지 않는 완벽주의는 아무런 결실도 거두지 못합니다. 잘못을 못 봐주는 우리 영혼은 메마르게 되고 황폐한 곳에서는 좋은 것도 자라지 못합니다. 가라지를 곱게 봐줄 평상심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잘잘못을 평가하는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 몫으로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아직 잡초와 곡식을 가릴 만한 식별력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다만 가라지가 더 무성해지지 않도록 주시할 뿐입니다.

 
한 농부가 아주 작은 씨앗을 밭에 뿌렸습니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32절) 이 작은 씨앗은 단번에 3미터나 되는 큰 나무로 자랍니다. 하늘의 새들은 그 나뭇가지에 집을 짓습니다. 새들이 와서 깃들고 의지할 정도로 생명력이 있습니다. 어떤 씨앗보다도 작은 것이 큰 미래를 약속합니다.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작은 누룩도 언제까지나 작은 것으로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33절) 손가락 사이로 술술 빠져나가는 밀가루에 누룩이 스며들어 빵을 만듭니다. 누룩 덕분에 밀가루는 양식이 되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누룩을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에 스며드는 사랑의 상징으로 풀이했습니다.
 
겨자씨와 누룩은 눈에 띄지 않아 주목받지 못하는 것, 거창하거나 감동적이지 않은 것을 대표합니다. 그러나 그저 크기가 작을 뿐이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 안에 숨은 생명력은 예상할 수 없습니다. 나무가 자라고 나서야 비로소 감춰진 힘을 알게 됩니다. 대수롭지 않은 처음 모습만으로 마지막 형태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압도하는 승리자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길과 삶은 고통투성이였습니다. 약하고 덧없는 인간의 모습에 의존하셨습니다. 하늘나라도 화려하고 위엄 있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은 새들이 집을 짓고 의지할 정도로, 온통 부풀어 반죽을 채울 만큼 역동적입니다. 예수님의 작은 시작은 온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34절)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비유는 예수님의 인격 자체를 드러내 보여줍니다. 시편 78,2의 메시아적 특성이 예수님의 인격을 뒷받침해 줍니다. “나는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리라.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35절; 시편 78,2) 오래된 것일수록 더 가치가 있습니다.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은 창조주가 준비하고 감춰둔 것으로서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의 계시자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변함없는 하늘나라의 계획을 계시할 뿐 아니라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한테 보이는 감춰진 것을 계시하십니다.
 
군중을 떠나 예수님은 호숫가에서 집으로 가시고 제자들은 가라지의 비유 풀이를 듣습니다(36절). 그분의 해설은 최후 심판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39ㄴ절)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버릴 것이다.”(41-­42ㄱ절) 불구덩이에서 울며 이를 가는 행위는(42ㄴ절), 하느님으로부터 제외됨으로써 겪는 고통과 슬픔, 격노를 말합니다.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기에는 한참 늦은 시간입니다. 제자들은, 심판은 피할 수 없고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43ㄱ절) 하느님의 가족에게 모든 것은 빛이며 환호이고 기쁨입니다. 그들은 태양처럼 축복과 행복의 빛을 발할 것입니다.

 
너무 바빠서 가라지가 섞였는지, 추수 때가 가까웠는지도 모를까 봐 걱정입니다. 주변에 하도 휘황찬란한 것이 많아서 겨자씨와 누룩을 귀히 여길 줄이나 알까 모르겠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버튼만 누르면 다 되는 세상에 이토록 난해한 비유가 누구 귀에 가서 머물 수 있을지…. 그래도 귀 있는 몇 사람은 들을 것입니다. 스쳐 지나가 버리는 헛된 것 속에서 길게 멀리 내다보는 안목과 기다리는 인내를 배우는 이들이 가라지와 섞인 밀처럼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착실하게 씨앗을 심고 누룩을 집어넣습니다.
강지숙(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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