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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생활묵상 : 마음의 눈으로 본다면.......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6-22 조회수923 추천수1 반대(0) 신고

 

3년에 걸쳐서 마음속에 화두로 삼고 고민하고 묵상한 주제가 있습니다. '마음의 눈'입니다. 눈이라는 것은 인체에서 시각을 담당하는 기관입니다. 눈이 없으면 앞을 볼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은 눈을 우리는 육체의 눈이라고 해서 육안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우리는 흔히들 '육안으로 보면'과 같은 표현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냥 눈으로 보면 해도 될 법한데 왜 굳이 육안이라고 하는 표현에서 '육'이라는 신체와 육체를 상징하는 육을 사용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진다면 의외로 이 화두에 대해 쉽게 접근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마치 이런 것과 같습니다. 남자만 출입 가능하다고 하는 표지를 보면 그 표지에는 여자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여자는 출입이 불가능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육안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육체에 있는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볼 수 있는 눈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 '영안'이 있습니다. 바로 영적인 눈입니다. 비슷한 유개념이지만 조금은 성질을 달리 합니다. 과연 마음의 눈이라는 게 존재하는 것일까요?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존재할 것이며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제가 이 화두에 대해 오랜 시간 동안 묵상하면서 그 해답을 찾기 위해 힌트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한 게 바로 '할머니와 아가씨'입니다. 제가 성이 남자라서 남자의 시각으로 바라봤을 때 이걸 소재로 삼으면 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정답이라고는 말하기는 어렵지만 제 기준에서는 거의 정답에 가까운 해답을 찾았습니다. 이런 화두에 대해 이렇게 표현을 하면 어떨까요? 마음의 눈으로 보면 할머니도 아가씨처럼 보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육안으로는 절대 할머니는 할머니지 아가씨처럼 보일 수 없습니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말입니다. 그럼 마음의 눈으로 보면 할머니가 아가씨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게 가능할까요? 가능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게 가능하다는 결론을 최근에 내렸습니다. 왜 이런 결론으로 도출이 됐는지 차근차근 한번 제가 생각한 것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제가 예전에 언급한 몇몇 글에서 언급한 자매님이 계십니다. 한 분은 어머니 같기도 하고 때로는 옆집 누나 같기도 하다고 한 분이 계십니다. 올해 그분 연세는 일흔 셋입니다. 또 최근에 올린 글에서 사랑하는 누나라고 하며 올린 글에서도 물론 직접 누나라고는 한 번도 불러보지는 못했지만 글에서만이라도 누나라고 부를 수 있었던 사례에서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았던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바로 그 해답은 사람 마음 속에 있는 따뜻한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 사랑의 마음은 강력한 마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마력일까요? 사람의 육안을 흐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육안이 육안으로서의 기능을 잘 하지 못하게 하는 그런 마력을 지닌 강력한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건 나이와 국경, 인종을 초월해서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게 가능할 때만이 우리가 생각하는 마음의 눈으로 보게 되면 할머니도 아가씨로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일종의 마약과도 같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마약에 중독되면 마약에 중독이 된 자신을 잘 모르듯이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비록 연세는 많으시다고 한다고 해도 그분 속에서 나오는 따뜻한 미소와 따뜻한 마음 이런 게 어우러져 나온다면 처음에는 그냥 밋밋한 감정 표현처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이게 처음에는 한두 번 이렇게 시작되었지만 이게 만약 지속 가능하다면 조금 전에 표현한 것처럼 은근히 마약처럼 중독이 되는 것과 같은 원리인 것 같습니다. 쉽게 표현하면 중독이 되기 전에는 만약 그 대상이 할머니라고 한다면 그땐 할머니로 보일 수 있을 겁니다. 

 

차차 중독이 되면 마치 술에 취한 사람이 술에 취할 땐 술에 취한지도 모르는 것처럼 우리의 눈도 마치 그처럼 그렇게 된다면 그땐 물론 원판의 모습은 할머니이지만 그분의 따뜻한 마음과 사랑스런 표정에 매료되면 그땐 우리가 우리의 육안으로 그런 분을 보더라도 육의 눈은 육의 눈으로서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이 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마음의 눈이 작동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결론으로 도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비록 할머니의 모습을 육안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눈에는 시각적으로 연로하신 할머니의 모습이 잔상에 남아 할머니로 인식이 되겠지만 마음의 눈은 이미 그런 인식하는 인식 그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게 막기 때문에 우리의 눈에는 비록 할머니의 모습으로 보인다고 해도 그게 할머니로 인식을 하지 못하게 하는 마력(마술적인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언어유희가 되겠지만 어쩌면 이 마력은 그분에게서만 나오는 독특한 매력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만약 이런 게 가능하지 않다면 절대로 할머니와 같은 분을 보고서 조금 양보해서 젊은 아주머니 정도까지는 봐줄 수 있지만 아가씨 정도까지 보여질 수 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입니다. 이런 논리로 접근해서 추론한다면 할머니가 아가씨로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아가씨처럼 보여질 수 있다는 것은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달리 표현하면 이렇게 말해도 될 것 같습니다. 

 

비싸고 고급 화장품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 속에 있는 순수하고 따뜻한 사랑의 마음이 지속적으로 나오기만 한다면 그 마음이 상대방의 육안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마음의 눈이 작용해서 자신의 몸이 그렇게 보여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할머니와 아가씨를 소재로 해서 비유를 들었지만 이 비유를 신앙의 눈에 다시 비유를 한다면 신앙의 눈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연로하신 할머니의 모습이 아리따운 아가씨처럼 보일 수 있듯이 우리도 신앙의 관점으로 신앙의 눈으로 보게 되면 예를 들어 아름답지 못한 것도 아름답게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신앙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밑바탕에 당연히 필요한 것은 '사랑'일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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