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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 몸 안에서 마찰이 있어야 영의 불이 지펴진다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8-07-14 조회수559 추천수4 반대(0) 신고
 
  

 

 

<내 몸 안에서 마찰이 있어야 영의 불이 지펴진다> ... 윤경재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4-39)



  어느 신학자가 사막의 은수사인 포이멘 노부를 찾아 왔습니다. 그는 영적 생활에 관하여, 하늘나라에 관하여,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이런 주제로 말을 꺼냈습니다. 그러나 포이멘 노부는 오랜 시간 동안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했습니다. 화가 난 신학자는 자리에서 물러나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해서 포이멘 노부를 떠나려 했습니다. 그러자 한 수도승이 스승님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사부님, 저분은 자기 고향에서 대단한 존경을 받고 덕망 높은 학자로 이름이 났습니다. 그런 분이 오로지 사부님께 가르침을 얻고자 멀리서 찾아 왔습니다. 그런데 왜 아무 말씀도 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러자 포이멘 노부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는 높은 데서 살며 하늘에 관해 말하는 사람이고 나는 땅 아래에 사는 평범한 사람으로서 세상일에 관하여 말한다오. 그가 영혼의 욕정에 관해 얘기했더라면 내가 대답했겠지요. 하지만, 그가 영적인 것에 대해서만 말해서 나는 알아듣지도 못 했다오.”


이 말씀을 전해들은 그 신학자는 깊이 반성하고 나서 다시 노부 앞에 나가 질문했습니다.

“영혼의 욕정이 나를 뒤덮으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러자 노부는 그를 반갑게 눈여겨보며 말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시간 가는 줄 모르며 끝없는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이 영혼의 욕정에 대하여 말하게 되자 비로소 대화가 진지해지고, 그들 앞이 놓인 여정의 목표인 하느님이 갑자기 그들 한가운데 계시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자주 이 세상에서 전쟁이 사라지면 평화가 오리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전쟁이 사라지는 것을 기다리려면 먼저 자신 내부에서 벌어지는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 버트란트 러셀 같은 매우 위대한 철학자들도 “만일 전쟁이 그친다면 모든 것은 좋아질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소극적인 자세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갈등과 불행의 근본 원인은 전쟁 탓이 아니라 인간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쟁은 바깥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이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내가 이 세상을 분열시키고 불과 검과 전쟁을 주러 왔음을 알지 못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매우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사실은 깊은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화는 그저 전쟁과 갈등이 없는 상태를 뜻하기에 자주 시끌벅적한 것보다는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한 현상유지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유지 상태는 과장하면 죽음과 유사할 뿐입니다. 죽음에는 전쟁이나 갈등이 없습니다. 그러나 삶도 역시 없습니다. 죽은 자는 병에도 걸리지 않고 괴로움도 느끼지 못 합니다. 그러나 약동하는 생명도 없습니다.

  여태껏 우리가 그리던 평화는 아마도 묘지의 침묵을 바랐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떤 환상을 그리고 나서 그 환상 속에 살기를 바랐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묘지의 침묵은 전혀 가치가 없습니다. 차라리 전쟁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생기와 활력이나마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묘지의 평화를 구할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에 활력과 생기를 불어 넣는 평화를 찾아야 합니다. 자기의 진정한 가치를 깨달았을 때 얻는 평화를 찾아 나서야 합니다. 그 평화는 자신만 아니라 이웃을 구할 등불이 될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평화를 샬롬이라고 부르는데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를 뜻하지 않았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샬롬이 쓰인 용례를 모두 살펴보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서 오는 결과를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샬롬이란 단어가 부귀를 말하기도 하며, 몸의 건강상태를 뜻하기도 하며, 전쟁에서 승리를 뜻하기도 합니다. 개인과 공동체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샬롬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평화는 그저 현 상황에 멈추어 뭉개는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갈등과 욕망을 잘 다스릴 때 얻어지는 생명의 에너지를 뜻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 안에서 참 생명을 찾으라는 요구입니다. 참 생명의 길은 죽음의 길을 거부할 때 얻을 수 있습니다.

  지나친 욕망은 우리를 죽음의 길로 이끕니다. 또 죽음의 세력과 타협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편하고 위기를 모면하고자 생명이 아닌 죽음의 세력과 타협해 왔던 적이 얼마나 많이 있었는지요.


  사막의 은수사 포이멘이 지적한 가르침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욕망의 갈등에 우리 식대로 타협하거나 굴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그 신학자처럼 그 갈등을 외면해버려서도 안 됩니다. 갈등하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어떻게 맺을 것이냐 고민하고 질문할 때라야 대답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어쩌면 생명으로 나가기 위한 수련입니다. 그래서 영적 교부들은 우리가 느끼는 갈등을 유혹이나 악마의 소행으로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저 마찰이라고 불렀습니다.

  만물은 마찰이 일어나야 불이 붙습니다. 원시인들이 불을 발견하고 사용한 것도 두 나무를 비벼 마찰을 일으켜서입니다. 불은 모든 것을 정화하고 변형하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불을 일으키시겠다는 것도 우리를 변형시켜 영원한 생명에 나가게 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이제부터는 우리는 스스로 의인인 척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안에 환상을 심고 그 환상을 쫓으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유혹과 갈등을 직시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갈등과 대면에서 혼돈이 오더라도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혼돈을 느끼는 것이 당연합니다. 실패를 겪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결국 승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승리를 맡아 주셨으니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 승리를 통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로 나가 참된 평화를 찾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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