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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영적인 삶" - 2008.7.6,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08-07-06 조회수504 추천수2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8.7.6 연중 제14주일                                          
즈카9,9-10 로마8,9.11-13 마태11,25-30

                                                            
 
 
"영적인 삶"
 


여러분은 영적인 삶을 살아가십니까?
육적인 삶을 살아가십니까?

딱 부러지게 대답하기 힘들 것입니다.
 
영육이 하나인 인간이기에
영적인 삶을 살기도 하고 때로는 육적인 삶을 살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바로 영적 인간임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보이는 의식주만으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인간입니다.
말을 바꿔 봐도 그대로 통합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고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고 희망으로 살아갑니다.”

애당초 믿음, 희망, 사랑을 추구하는 인간입니다.
믿음, 희망, 사랑의 원천인 하느님을 찾는 인간입니다.
 
믿음, 희망, 사랑, 하느님, 삶의 의미,
모두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자살하는 동물은 아마 사람 하나뿐일 것입니다.
삶의 의미를 잃고 무기력증에 빠져 살다가 절망하여 자살하는 이들,
역설적으로 인간이 얼마나 영적인 지 보여줍니다.


영적인 것에 기초하여 인생의 집을 지어야 반석위에 인생 집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 위에 보이는 인생 집을 지어야 맞는 것입니다.
 
믿음, 희망, 사랑의 하느님 반석위에 인생 집을 지으라는 말씀입니다.
 
반대로 보이는 것들,
지위, 명예, 재물, 권력 등 우상 위에 짓는 집들,
그대로 모래위의 인생집들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허영과 무지, 교만으로
이런 우상들 위에 인생 집을 짓다 낭패를 보는 지요.
 
과연 여러분은 하느님 반석위에 인생 집을 짓는 슬기로운 영적 삶입니까?
혹은 헛된 우상위에 인생 집을 짓는 어리석은 육적 삶입니까?

온통 보이는 것들에 밀려 영적인 것들은 사라져가는 현실입니다.

영적인 것이라면 웬 지 낯설어들 하고
심지어는 거부감까지 갖는 이들도 있습니다.

육체는 비만인데 영혼의 영양실조 환자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늘어가는 음식점에 줄어가는 서점입니다.
영적인 측면이 빠져버리고 육적인 것만 남으면
그대로 욕망의 짐승들입니다.
 
점점 그런 추세의 천민자본주의 시대가 아닙니까?

영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무려 오늘 2독서에 보면 영 또는 성령이란 단어가 6번 나옵니다.
바로 영적 인간임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입니다.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에 따라 살도록 육에 빚을 진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

저절로 영적 삶이 아닙니다.
부단히 하느님을 찾는 노력 있어야 영적 삶이지
냉담하면 곧장 육적 삶으로 전락합니다.
 
살아있으나 실상 죽어있는 육적 삶의 사람들 얼마나 많은지요?
 
성령에 따른 영적 삶이 진정 살아있는 삶입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기도, 미사, 성독, 노동 등 수행의 노력입니다.


영적인 사람들,
보이는 세상 것들 위에 인생 집을 짓는 게 아니라
하느님 반석위에 인생 집을 짓습니다.
 
세상 보이는 것들을 거처로 삼지 않고
하느님을, 예수 성심을 궁극의 거처로 삼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거처는 아버지였음이 단박 들어납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아버지란 호칭이 얼마나 자연스럽습니까?
예수님의 궁극의 거처인 ‘아버지’,
예수님께는 너무나 자명한 현실이었습니다.
 
무려 복음 전반부에 아버지란 정다운 호칭이 8회 나옵니다.
하늘나라의 신비를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는 아버지를 직관한 예수님이십니다.
 
완전히 아버지와 하나 되셨기에
오늘도 친히 아버지의 품이 되어
세파에 지친 철부지 같은 우리를 이 거룩한 미사에 초대해 주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갈 곳이라곤 여기 수도원뿐이라 고백하는 분들 많습니다.
나이 먹어 갈수록 갈 곳은 많은 것 같은 데 갈 곳은 없고,
만날 사람은 많은 것 같은 만날 사람이 없다는 사실,
바로 예수님이 우리의 궁극의 거처이자
만나야 할 분이라는 진리를 암시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예수성심 안에 비로소 안식이요 평화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예수 성심의 품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시간이자
온유와 겸손의 예수성심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모든 공동전례기도, 개인 묵상이나 피정, 성경독서 시간 역시
예수 성심 안에서 안식을 누리며 겸손과 온유를 배우는 시간들입니다.
 
더불어 우리의 무거운 짐과 불편한 멍에는
주님의 가벼운 짐과 편한 멍에로 바뀌는 은총의 시간들입니다.


영적인 사람들, 기쁨과 평화의 사람들입니다.

요즘 같이 팍팍한 시대,
이웃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아마 주님의 기쁨과 평화일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 예수성심 안에 거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쁨과 평화입니다.
 
하느님은, 예수성심은 기쁨의 샘이자 평화의 샘입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이나 평화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이요 평화입니다.
 
이 주님의 기쁨과 평화가 있어 가능한 수도공동생활입니다.
 
1독서를 보면
주님께로부터 기원하는 기쁨이자 평화임을 즉시 깨닫게 됩니다.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딸 시온이나 예루살렘이 상징하는바 우리 믿는 모두들입니다.

왜 기뻐하며 환성을 올리라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오시기에,
주님 함께 계시기에, 기뻐하며 환성을 올리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 같기도 합니다.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그분은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하시라라”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이요 평화의 선물입니다.
주님의 기쁨과 평화로 우리를 충만케 하시어
당신의 기쁨과 평화의 사도로
각자의 삶의 자리로 파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영적인 삶입니까? 육적인 삶입니까?

저절로 영적인 삶이 아닙니다.
끊임없는 수행의 노력이 없으면
저절로 본능적 육적 욕망으로 기우는 육적 삶입니다.
 
마침내 영혼은 사라지고 육신만 남아있는
살아있으나 실상 죽어있는 삶입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기도와 미사와 성경묵상, 노동의 수행으로
우리를 부단히 하느님을 향해 업그레이드 시키는
영적 삶에 충실해야 합니다.
 
말 그대로 평생 영적 전투의 삶입니다.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따라 살면 살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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