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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7월 6일 야곱의 우물- 마태 10, 17-22 묵상/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샹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8-07-06 조회수447 추천수5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마태 10,17-­22)
 
 
 
 
제자들은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전하기 위해 파견되었습니다(7절). 사람들을 가르치고 그들의 아픔을 치유할(8절) 소명을 받은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처럼 이리 떼 가운데 보내집니다(16절).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장차 당하게 될 고통과 그 고통에 어떻게 맞서야 하는지를 비장한 어조로 당부합니다.

 
“사람들을 조심하여라.”(17ㄱ절) 세상은 하느님의 계획대로 돌아가 주지 않습니다. 온갖 차원의 불평등과 불의가 주변에 도사리고 있어, 예수님의 일과 제자들의 실천은 저항에 부딪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선포는 세상에 엄청난 충격을 불러올 만합니다. 부조리한 세상이 정의와 진리 앞에 발버둥치고 반발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려 한다고 제자들을 몰아세울 것입니다. 제자들은 공격과 저항을 받습니다. 어디에도 황홀한 환상 같은 것은 없습니다. 제자들은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16절) 이 상황에 맞서야 합니다. 맑은 시야와 깨어 있는 정신으로 자신들의 소명을 인식해야 합니다. 적대자들의 논리에 혹하여 넘어갈 수도 강압에 못 이겨 끌려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의와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완전한 가르침에 충실히 머무는 길뿐입니다.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17ㄴ절) 예수님이 범죄자로 고발당해 그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에게 넘겨진 것처럼, 제자들도 똑같은 일을 당할 것입니다. 스물세 명의 유지로 구성된 지방의회에 끌려가 유죄 판결을 받으면 회당에서 매질을 당하게 됩니다. 신명 25,1­3에 따르면 마흔 번까지 매질할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서른아홉 대까지만 때립니다. 바오로 사도는 유다인 회당에서 다섯 차례나 서른아홉 대 매질을 당했습니다(2코린 11,24-­25). 앞서 예수님께서 참행복을 선언하시면서 암시하신 박해입니다. 그들의 활동이 사람들한테는 범법 행위로 비쳐 죄인들처럼 법정에 끌려가 처벌받을 상황이 올 것입니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18절) 제자들은 이러한 박해를 통해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하게 됩니다. 유다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불려가 예수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복음을 선포하느라 받는 박해는 복음 선포를 위한 또 하나의 기회입니다. 그들의 ‘죄’는 법정에서 해명되어 모든 사람에게 알려집니다. 벌을 받아 고통을 당하는 것 역시 자신들의 확신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박해는 오히려 주님의 증인으로 서는 길이고 주님과 일치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증언해야 할지 걱정이 앞섭니다. 아무것도 미리 알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19ㄱ절) 주님이 무력해서 박해를 겪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때문에 고난도 겪지만 예수님께 도움도 받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19ㄴ-20절) 일찍이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비슷한 약속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가거라. 네가 말할 때 내가 너를 도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가르쳐 주겠다.”(탈출 4,12) 그들은 자기 이름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것이니, 사람들 앞에 홀로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영’을 협조자로 약속하셨으므로 그들이 용기를 내기만 한다면 그리스도를 당당히 증언할 수 있습니다. “내 도움과 내 영광이 하느님께 있으며 내 견고한 바위와 피신처가 하느님 안에 있네.”(시편 62,8) 주님은 우리를 위험에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안팎에서 박해의 그림자가 밀려듭니다. 최악의 상황입니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21절) 본성적으로 사랑으로 묶여 있어야 할 가정에 파괴와 미움이 자리한다면 이것만큼 가혹한 고통은 없을 것입니다. 이 지경에 이르면 혹시 내가 틀린 것이 아닐까, 이런 바보짓을 그만두고 다른 사람들처럼 살아야 하지 않을까,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을까 등 온갖 상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결단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예수님도 혼란과 고독 속에서 죽음 앞에 섰습니다.
평화롭고 조화로운 삶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22ㄱ절) 그 ‘이름’은 제자들이 입에 달고 다닐 이름이고 그들의 삶에 영감을 불러일으킬 이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가족들에게 버림받는 고독과 사람들의 증오심까지도 견뎌야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22ㄴ절) 예수님께 대한 충실함으로 미혹되지 않고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그분께 대한 충실은 그들에게 많은 어려움을 안겨주는 동시에 구원을 보증합니다.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미움을 받지만 그 ‘이름’이 끝까지 그들을 지켜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그분처럼 살아갑니다. 그분의 고난에 연대하지 않는 삶은 제자의 삶이 아닙니다. 제자가 되는 것도 교회가 되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겪는 시련이 나를 반대한 가족과 이웃을 구원합니다. 꿋꿋이 지킨 의로움은 하늘나라를 앞당깁니다. 예수님이 그 모범이십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5,10-­12)
강지숙(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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