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6월 1일 야곱의 우물-마태 7, 21-27/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8-06-01 조회수476 추천수4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마태 7,21-­27)
 
 
 
 
“인생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합니다. 냉철한 머리보다 따뜻한 가슴이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가장 먼 여행이 있습니다.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입니다. 발은 실천입니다. 현장이며 숲입니다.”(신영복, 「처음처럼」)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말씀을 매우 절묘하게 꾸미고 구성해 긴 설교를 만들었습니다. 유다교에서 구원의 방편으로 율법을 강조하였듯이 마태오복음서는 산상설교를 구원에 이르는 지름길로 제시합니다. 긴 설교에서 한결같이 강조하는 것은 기도와 실천의 일치입니다. 그분의 설교를 듣노라면 부끄럽고 당황스러워 당장 달라지지 않고는 스스로 견디기 어려울 만큼 우리 삶의 밑바닥까지 온통 뒤흔들어 놓습니다. 참행복 선언으로 시작된 산상설교는 최후 심판의 전망을 제시한 오늘 말씀으로 마무리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21ㄱ절) 여기서 ‘주님’은 심판자로 등장합니다. 그래서인지 매몰차게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과 병행하는 루카복음 6장 46절은 좀 다르게 전합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루카가 단순히 언행이 일치하지 않음을 탓한다면, 마태오는 한 발 나아가 그런 실천이 따르지 않는 믿음으로는 하늘나라를 놓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자부한다면 그건 자만이고 착각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은 과연 무엇일까요? 어떻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잘 사는 길일까요?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열쇠는 무엇일까요?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22절) 누군가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신이 그의 ‘종’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종은 자기 힘으로는 소유도 계획도 의지도 지닐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 종이 주인 이름으로 무엇인가를 벌인다면 그것은 주인과 상관없을 뿐더러 주인을 능멸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예언이나 구마, 치유가 예수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또한 방 안에 앉아 감성적인 열정에만 머물러 하느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계속 부르는 것이 기도는 아닙니다. 그것만으로는 차별과 증오와 불의로 가득 찬 인간세계의 상황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행동과 실천이 없는 기도와 전례를 달가워하지 않으십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21ㄴ절) 하늘나라는 특별한 영적 은사나 공동체의 믿음 고백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믿고 말한 바에 따라서가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한 것에 따라 심판을 받습니다(마태 25,31-­46 참조). 하늘나라에 들어갈지 말지 판가름하는 심판은 행위에 대한 심판입니다.
 
예수님과의 개인적 친분에 따라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 능력과 마귀 쫓는 능력으로도 평가받지 않습니다. 그 기회는 제자들이나 아직 제자가 아닌 이들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돌아갑니다. 교회에 속하는가, 속하지 않는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믿음이 구원과 심판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23절) 우리는 예수님의 절대적 주권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독차지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행동에 대한 그분의 판결만이 있을 뿐입니다.

 
집 짓는 자들에 대한 비유 말씀은 산상설교의 대미를 장식합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24절) ‘반석’은 곧 예수님의 메시지고, ‘집’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삶을 상징합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므로 그분의 메시지에 응답할 것입니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25절) ‘비·강물·바람’은 타락한 세상에서 겪는 시련과 핍박을 가리킵니다. 노아 홍수와 같은 마지막 심판 때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들은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공동체는 어떤 시련이 닥치더라도 바위 위에 세워진 집처럼 굳건합니다. 귀에서 시작한 예수님의 복음은 손과 발을 통해 완성되어야 합니다.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종말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똑같이 듣고도 실행하는 사람이 있고 실행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26절)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관심거리에만 몰두합니다.
행동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27절) 실천 없는 믿음은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금방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정의 또한 실천이지 이론이 아닙니다. 올바른 이해가 올바른 행동으로 옮겨갑니다. 살다 보면 어려운 때가 수시로 닥칠 텐데 그럴 때마다 결심이 쉽게 흔들려 물러서거나 도망치게 됩니다. 듣기만 하는 공동체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결실을 맺지 못합니다. 귀만 커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정죄의 말씀인 데다 비와 폭풍과 재난의 선고로 끝납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중요한 말씀을 심판에 대한 경고로 마칩니다. 예수님의 심판 사상은 인간적 비판을 금지하고 사랑을 가능케 하는 바로 그러한 심판 사상입니다(7,1­2).

 
말씀을 듣고 있던 군중도 놀라 자빠집니다. 가히 혁명적입니다(28절).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습니다. 실천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29절). 말만 앞세우는 율법학자들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의 귀한 말씀은 머리와 가슴, 입이나 귀가 아닌 우리의 손과 발을 통해 빛날 것입니다.
강지숙(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