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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땅에 엎드린다는 것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8-05-04 조회수506 추천수9 반대(0) 신고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마태 28, 16-17)

 

제자들의 공동체는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살리라 언약을 맺었던 산,

참 행복의 계명을 들었던 산으로 찾아왔다.

그들을 불러주셨고 새 생명의 환희로 채워주셨던 첫 사랑의 장소, 갈릴래아.

그러나 그들은 이미 예전과는 달랐다.

 

숫자도 열 둘이 아닌 열 하나다.

그나마 어느 한 명도 온전치 않다.

스승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지울 수 없는 상처가 가슴 깊이 새겨진 것이다.

그 깊은 상처로 인해 조각나고 파손된 채로 스승을 뵙고 엎드려 절한다.

 

엎드려 절하는 이 행위는 그분을 스승으로서 맞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 알아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땅을 짚고 엎드려 절하는 이 모습은

그들의 본질인 땅에(창세 2,7) 먼저 공손히 엎드리는 행위에 다름없다.

 

그동안의 방황과 배반은 바로 인간의 본질적 한계인

흙에서 비롯된 것임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지금 두 손을 자신의 근원인 흙에

가만히 갖다 대고 겸손하게 화해하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 주님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시시때때로 다른 곳을 기웃거렸다.

작은 계명 하나를 지켰나 싶으면 어느 틈에 공명심에 사로잡혔고,

사소한 일에도 넘어지는 좌절을 무수히 겪었다.

 

신뢰한다고 하면서도 실은 전혀 의탁하지 못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차라리 그분을 몰랐더라면 하고 후회했던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아무리 좋은 것을 많이 들어도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하고 다녀도

도무지 나아지는 구석이 없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이 복음을 읽고 묵상하면서 바로 그것이 나의 본모습이고

그것이 나의 본질적인 무능과 한계임을 알게 되었다.

나 역시 흙에서 온 피조물, 부실하기 짝이 없는

‘흑사람’임을 겸손하게 인정하였다.

그것이 바로 주님을 경배하는 일의 기초가 됨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이제 기꺼이 흙에 엎드린다.

이 엎드림은 지쳐 쓰러짐이 아니요.

나의 재질이 그러하니 별 수 없다고 포기함도 아니다.

 

오히려 땅으로 점점 더 낮은 땅으로 내려가는 것을

하늘로 오르려는 시도 못지않게 기쁘게 받아들이며,

땅에서만 들을 수 있는 땅의 소리를 겸허하게 듣고자하는 엎드림인 것이다.

 

땅의 소리를 겸허하게 듣는다는 것은

그동안의 자기 자신의 부실함, 결점, 실수, 잘못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과 화해한다는 뜻이다.

왜 그렇게 못났느냐고 힐책하지 않고,

왜 더 잘하지 그랬느냐고 비난하지 않는 것이다.

 

두 손만이 아닌 더 낮은 엎드림,

땅과의 빈틈없는 밀착이 실은 필요하다.

하늘에 대한 가장 겸허한 자세, 최고의 흠숭의 자세는

온 몸과 마음을 투신하는 오체투지가 아닌가.

 

그러나 깨닫는다는 것이 늘 그에 걸맞게 살아간다는 것은 또 아니다.

걸핏하면 남과 비교하고 자기의 못난 점에 화가 치밀고 있지 않는가.

땅에 엎드린 열한 제자 중에 몇은 벌써 의심을 품고 있듯이 말이다.

 

이렇게 늘 어정쩡한 자세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분은 항상 먼저 다가오신다. 그리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능을 받았다.”

 

땅에 내려오셔서 흑사람의 허약함을 체험하시고

죽음까지 받아들이셨던 주님.

극도의 무능을 받아들인 것 때문에 하늘의 권능은 물론

땅에 속한 모든 권한까지 부여받으셨다는 것이다.

 

극도의 무능 때문에 전능을 얻은 분.

그래서 그분을 믿는 나도 자신의 무능과 한계 안에서 희망을 본다.

 

그분의 전능하신 도우심으로 제자들은 상처를 치유 받고,

조각난 공동체는 소생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새 생명을 탄생시켜

기를 수 있는 능력까지 부여받았다.

 

그렇다고 제자들이 이미 완성되었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한 치도 흙과 떨어질 수 없는,

땅을 밟고 사는, 땅의 소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분은 세상 종말까지 제자들 곁에서,

끊임없이 사랑과 힘을 불어넣어주며 함께 하겠다고 하신다.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하늘과 땅의 온전한 결합은 세상 끝 날에 그분에 의해 완성될 것이다.

땅의 온전한 하늘 됨도 세상 끝 날에서야 이룩될 것이다.

 

그러기에 나도 아직은 허물투성이의 나를 자애롭게 바라보며 살아가야 한다. 

그분이 가까이 부르시고 힘과 능력으로 채워주신 것처럼

나도 나를 보듬어주며 칭찬과 위로로 지지해주어야 한다.

 

"그동안 잘 해왔어."

"앞으로도 너를 믿고 맡길께."

"세상 끝 날까지 함께 있어줄께."

 

 

 

사진: 무덤 속에서 본 하늘: 출처는 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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