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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펌]고통과 눈물로 점철된 아델라님의 일생
작성자최익곤 쪽지 캡슐 작성일2008-05-19 조회수606 추천수8 반대(0) 신고
 
 



 




    정성을 다해 침묵집 운영자로 계셨던 아델라님이 세상을 떠 난지 벌써 1주년이 되었군요. 바로 앞에 나타날 것만 같고 금방이라도 전화할 것만 같은 시간이었는데 벌써 기일이 되 었습니다. 2007년 5월 20일 주님승천 대축일에 49세의 아까 운 나이로 하늘의 부르심을 따라 많은 교훈과 사랑을 남긴 채 우리와 아쉬운 이별을 하였습니다. 그토록 열심히 살고 갖은 고초를 다 겪으면서도 자식들 뒷 바라지와 가정을 지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고 주변사람 들의 갖은 중상모략으로 이중고를 겪으면서도 한마디 내색 도 하지 않으면서 살고자 했으나 밀려오는 암세포의 공격과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아델라님은 지금 은 행복하게 지내고 있을 것입니다. 엇그제 일이 벌써 1년이 됨을 보면서 이렇게 빠르게 흐르는 것이 세월이고 우리도 그렇게 세월에 실려 떠 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분명한 것은 어찌 살든 하느님 의 뜻에 맞게 살아야만 하는것이 우리들의 영원한 행복의 길 에서 멀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제는 볼 수도 이야기할수도 없고 우리 님들과 함께 할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지만 왜 이리도 가슴에 아픔으로 남을까요 너무 오랜 시간동안 아델라님의 인생의 아픔에 동감하여 왔 었기 때문일 것이겠지요. 살아생전에는 희망도 있었고 아픔속에서도 잘 참으라며 격 려도 하고 앞으로는 좋은 나날들도 있을 것이라는 장담까지 하였지만 이제는 침묵집에서 아델라님의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아마도 그토록 사랑했던 우리 님들을 위해 하느 님께 전구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천국에서 그토록 가슴조리며 아파하지 않아도 되고 시기와 중상모략을 받지 않아도 되고, 암의 고통으로 온몸이 타들어가는 아픔을 겪지 않아도 되지만 육정으로 이별하는 슬픔은 아직도 아련히 남아 있기만 합니다. 아델라님 아들은 제게 자주 연락하며 모든 일을 상의하고 저 의 충고를 듣고 잘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아들이 가 끔씩 이불을 끌어않고 밤에 소리 없이 운다고 아델라님 남편 이 말할 때는 남의 아픔같지 않고 내 아픔처럼 느껴지니 언제 쯤이면 아들들이 엄마의 슬픔을 잊을 수 있을지 생각이 깊어 집니다. 큰 아들 역시 어머니의 그림움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삭히 는 모습을 여러번 보았고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픕니다. 분명 아델라님은 천국에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가 받은 고통이 너무 컸고, 세상에서 너무나 부족하게 살았 으며 희생과 봉사와 보속을 너무나 많이 했기 때문이며, 마지 막을 하느님안에서 안전하게 마무리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델라님은 세상을 떠나신 후에도 여러 회원님들과 지인들 그 리고 사제들이 미사를 봉헌하는 것을 보면서 아델라님이 세상 에 남겨둔 사랑의 봉사와 희생의 가치를 알게 됩니다. 앞으로도 아델라님을 위한 기도와 그 가족들을 위한 기도 자주 바쳐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아델라님은 침묵가족들을 위해서 분명 천국에서 하느님과 성모님께 전구할 것이리라 믿습니다. 1년 동안 많은 희생과 기도를 통해 아델라님을 사랑하셨던 우리 님들, 특히 아델라님 가족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지금까 지 보여주고 계신 우리 님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지 금도 마음에 아픔이 깊이 남아 있지만 아델라님의 큰 사랑과 희생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천국에 있으리라는 믿음이 저에게 위안을 주고 있습니다. 지금 보여지는 영상테이블은 아델라님이 고통중에서도 우리님 들에게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모든 아픔을 억누르며 작 업하셨던 테이블로 세상을 떠나기 20일전의 테이블 이었습니다. 마치 하트모양과 꽃이 뿜어져 나오는 모습들이 마지막임을 알 고 사랑을 전하는 듯 합니다. ♬ 흐르는 곡 : 잊혀진 계절 ♬
 

 


 

아델라님의 일생
    다음의 내용은 제가 아델라님을 14년간 보아오면서 보고 듣고 대 화를 나누었던 것들 중에 아델라님의 힘든 삶의 중요한 것들을 기 억을 더듬어 옮긴 내용입니다. 년도와 년수는 기억이기에 틀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기억을 더듬어 정리한 것입니다. 아델라님은 남편과 아들 둘입니다. 큰 아들은 대학을 다니다 군대까지 마쳤고, 작은 아들은 대학 1학 년을 마치고 지금은 휴학중에 있으며 곧 군대에 갈 예정입니다. 이 제 다 키운 아들들이지요. 큰 아들은 6개월전 어깨 인대를 다쳐 6시간의 대수술을 받고 지금 도 치료 중에 있는데 영구히 장애가 남을 것이라고 언젠가 아델라 님이 제게 이야기 하면서 무척 속상해 하셨지요. 아델라님의 남편은 목수였고, 지역 공사를 도 맡아서 할 정도로 기 술이 좋았으며 건축에 있어서는 아주 탁월한 실력가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20년전 어느날 갑자기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가 검사해보니 뇌에 혹이 생겨 그 즉시 수술로 종양을 제거했지만 이 후로 아델라 님의 남편은 정상인이 되지 못했습니다. 외모적으로는 멀쩡한데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상식밖으로 하였 고 나가면 무조건 술이 고주망태가 되어 매일같이 쓰러져 집에 데 려와야만 하는 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는 아델라님 남편의 사 고방식이 잘못 되어서가 아니라 뇌 수술후 남편분의 정신상태가 불 안정해서 오는것이었기에 나무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욱 마음 아파했고 하소연 할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몇년이 흐르자 아델라의 몸과 마음은 지칠대로 지쳐만 갔 습니다. 이때부터 아델라님의 불행은 깊어만 갔습니다. 자연 우울 증이 왔고 남편구실 못하는 것은 제외하더라도 속상한 일들의 연 속이었으며 생계 마저 막막하기만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우울증이 깊어져 심각한 지경에까지 이를 즈음 저에게 큰 동서가 데려와 상담과 침 치료를 받게 된것이 아델라님과 만남이었으며 그것이 14년 전의 일이었는데 이때 아델라님은 세례 받은지 얼마 안된 초보 신자였습니다. 후에 말하기를 도무지 마음을 잡을 수 업 어 성당에 다니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저와의 계속적인 대화가 도움이 되었는지 삶의 의욕을 다시 찾게 되었고 신앙생활도 꾸준히 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생 활고는 어쩔 수 없는지라 두세평 되는 가게를 얻어 분식집을 하기 도 하였고, 김밥판매도 하였으며, 곱창장사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아델라님의 사정을 아신 본당신부님은 식복사로 생활하도록 하면 서 건강도 챙기고 신부님의 사랑도 받았습니다. 워낙 음식솜씨가 좋아 본당 신부님은 세상에서 가장맛있는 음식이 아델라가 해준 음식이라며 외식자리가 있어도 사제관에 오셔서 식사를 하시곤 하였다고 합니다. 제게도 가끔 음식을 가져왔는데 정말 맛있었습니다. 사제관에서 식 복사를 하는 제 여동생은 아델라님의 음식솜씨를 알았기에 자주 아 델라님에게 음식만드는데 조언을 구하곤 하였습니다. 아마도 아델라님이 사제관에서 생활하였던 시간이 가장 따뜻한 위 로와 사랑을 받으며 살았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변의 신자들은 아델라님을 모함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신부님이 불쌍하고 가엽다고 챙겨주던 모습을 질투한 것이었습니 다. 그도 그럴것이 신부님은 아델라님이 항상 잘 먹도록 배려해주었 고 열심히 먹지 않으면 당신이 화를 내실 정도였으니 신자들의 질투 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결국 신자들의 싸움으로 번졌고 그 와중에 아델라님은 신부님을 위 해 사제관을 나올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에서 부터 지니고 있던 간염이 악화되어 잘되던 곱창집을 처분하면서부터는 더욱 힘들어져 가기만 하였습니다. 간염수치는 높아만 갔고 그나마 있는 작은 돈으로 병원을 다니는데도 치료비마 저 감당하기 힘든 상태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럴즈음 아델라님을 키워주신 어머니가 노인 요양원에 있었는데 병 세가 악화되어 매일 요양원을 드나들며 어머니를 시중들고 있었습니 다. 키워주신 어머니라는 분은 아델라님이 5살때 부모에게서 데려가 함께 살던 어머니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래 한씨 성인데 호적에 키워주신 어머니 성을 따라 어씨 성 을 같게 된 것입니다. 이 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갖은일을 다해야 했 다고 합니다. 물론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했지요.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기 전까지 갖은 일을 다했다고 합니다. 어찌되었든 시집온 이후로 키워주신 어머니가 병이들어 어머니 재 산을 모두 처분하여 요양원에 맡기게 된 것이 결국은 아델라님이 수 시로 어머니를 관리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키워주신 어머니가 임종이 가까와지자 매일 같이 간호를 하였는데 이 당시 아델라님의 간 수치는 위험수위에 있었으며 의사는 조금만 치료를 소흘히 하거나 무리하면 간경화로 발전할 수 있다고 하는 상 태였습니다. 그러나 생을 마감하는 어머니를 외면할 수 없어 어머니를 간호하기 를 한달여 한 상태에서키워주신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 다. 그러나 몸은 간경화로 발전하게 되었고 이후로 복수가 차여 주 기적으로 복수의 물을 빼주어야 했습니다만 이 역시 금전적인 어려 움때문에 힘들었습니다. 다시금 아델라님의 몸과 마음은 지쳐갔고 커나가는 아이들의 학비와 생계는 또 다른 고통을 가중시키기만 하여 이중 삼중 고통을 받으며 생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너무나 외롭고 힘든 나날의 연속이 계속되었고 제게 와서는 늘 눈물 을 흘리며 괴로움을 토로하였습니다. 그런 아델라님을 보고 있을 때 마다 무척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그런 아픔을 그 누구에게 도 전혀 표현을 하지 않았습니다. 알아주지도 않을 뿐더러 안다고해 도 도움을 받지 못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유일하게 그 지역에서 아델라님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보듬어주던 한 자매님 가족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분은 정말 큰 사랑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릴적 기억을 더듬어 형제들을 찾고 싶은 욕망이 들어 수 소문 끝에 자신이 태어났던 곳을 찾아 주변인들에게 알아본 결과 아 버지와 형제들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친어머니가 사망하신 후 아 버지가 결혼을 하여 배 다른 동생들이 둘이나 더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2000년도 경이었고 이 때 배 다른 동생, 친동생 그리고 제 부들과 조카들을 모두 만날 수 있어 큰 기쁨을 앉게 되었습니다. 제 게 자랑을 하기까지 하였고 저에게 인사시키기까지 하였지요. 혈육 관계가 아닌 함께자란 언니, 그리고 자신의 친동생2, 배 다른 동생 2 그렇게 해서 5섯명의 형제들을 찾았지만 아버지는 1년전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가막힌 일은 아버 지가 버스기사로 충주에서 아델라님이 살고 계신 광혜원을 15년간 을 운행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매일같이 충주에서 아델라님이 사는 광혜원을 매일같이 오갔지만 부녀의 만남은 이루 어지지 않은채 아버지를 찾았을때는 돌아가신지 한달밖에 안되었 다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었으니 이 어찌 기구한 운명이 아니겠습니 까! 이후로 친어머니에게서 난 바로 밑의 여동생이 언니곁에서 살고싶 다고 이사와서는 가게를 한다고 하여 아델라님 명의를 빌려 가게를 차리게 되었고 아델라님이 가지고 있던 곱창전골 노하후를 전수받 아 가게를 운영하였습니다. 여동생은 사업에 실패하여 신용불량자 라서 여동생의 명의로는 가게를 개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델라님은 자신의 명의로 가게를 운영하는 여동생에게 인 감도장은 물론, 주민등록증까지 주었고 통장까지 만들어 주었습니 다. 동생이 잘 운영하리라고 믿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여동생은 이 때부터 언니의 인감을 이용하여 사채와 대출을 수도 없이 받았고 그를 이용하여 흥청망청 쓰고 다니었습니다. 나중에 드러난 사실이 지만 약 9천만원을 언니인 아델라님 명의로 빼서 쓴 것이었습니다. 여동생은 자기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했답니다. "우리 언니는 어리숙해서 내가 어떻게 하든 알지를 못해"라고 말입니다. 아무래도 이상하여 사실을 확인해보라고 하였으나 아델라님은 동 생이 가게를 운영하는데 알아서 잘 할 것이라고 하며 1년여를 방치 하고 자신은 동생 가게에서 일하는 것으로 봉급을 받고 생활하였습 니다. 그러나 여동생은 빌린돈을 다 탕진하자 벼란간 야밤도주를 하였고 이때부터 아델라님은 자신의 명의로 된 수없이 많은 대출금 독촉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채업자는 매일같이 독촉을 하였고 한푼도 없는 아델라님은 심한 모욕과 시달림, 급기야는 납치되어 살해위협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매일같이 공포스런 나날이 이어졌고 아델라님의 몸과 마음은 완전 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보다 못한 제가 각 대출회사에 탄원서와 경 위서를 작성하여 본인 서명이 아닌 대출이었음을 항의하였고 국가 기관에 탄원을 하고 경찰서에 고발을 하는등 여러 조치를 취함으로 몇가지 일들이 해결되기도 하였지만 그래도 인감이 들어가 빼도박 도 못하는 것은 짊어 질 수 밖에 없는 상태로 여태껏 지내왔던 것이 었습니다. 그래도 남편은 그런 상황에서도 부인의 아픔을 나누지도 못했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조차 모르고 기회만 닿으면 술을 먹곤 하였다고 하니 아델라님이 2중으로 받아야 하는 이 아픔을 어 찌 헤아리겠습니까! 이로 인해 흘린 눈물은 말할수도 없었고 이런 상태를 위로는 커녕 집안들은 오히려 박절하게 대했고 오히려 나가라고까지 하였으니 그 당시 그 모든 모습을 지켜본 저로서는 저러다 며칠 살지도 못하 고 죽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후로 아델라님은 신용불 량자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아델라님이 받으신 고통의 무게를 다리 에 올려놓는다면 다리가 무너졌을 것입니다. 그래도 죽을힘을 다해 6.7년을 견디어왔지만 두 아들만은 가르쳐 다시는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지 않게 하려고 무진애를 씻으며 코 리아나 화장품 판매원을 하면서 근근히 생활하였지만 이마저도 건 강이 제대로 따라주지 않아 제대로 팔지 못하였고 매월 말이면 수 금이 되지 못해 돈을 빌리곤 하였습니다. 병은 점점 깊어갔고. 1년 여를 단 한번도 병원을 가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너무나 몸이 좋지 않아 병원을 찾았는데 암이 의심된다는 소리를 듣게 되어 서울 삼성병원으로 찾 아가 검진한 결과 3Cm 크기의 종양이 혈관옆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큰 혈관 옆에 있어서 수술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된 것입 니다. 이후의 종양소식은 가끔 병원에서 색전술을 할때 아델라님이 병원에서 소식을 알리게 되어 침묵집 님들이 기도와 격려로 대화를 나누셨던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델라님은 가중되는 매일의 악조건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종양은 처음발견당시 1개에서 3개월 후에는 4개로 변했고 1년 후 임종직전에는 간의 3분의 2크기로 자라면서 복수와 패혈증으로 엄 청난 고통을 동반한 채 아델라님의 모든 삶에 종지부를 찍게 된 것 이었습니다. 아델라님은 그 많은 아픔 속에서도 절대로 표현을 하지 않았습니 다. 오로지 저에게만 이야기를 하였고 저의 조언을 들었으며 때로 는 저로부터 마음을 바로잡지 못한다고 꾸지람을 듣기도 하였지 만 언제나 마음은 함께 하였습니다. 2005년도에는 스레트 지붕이 새서 비가오면 양동이를 몇군데 놓 아야만 했고 밤이 되어 잠을 자기도 힘들었다고 합니다. 바로 옆 집에 시아주버니 부부가 좋은 집을 짓고 살고 있었고, 시아주버니 가 목수인데도 아델라님 집의 비가 새는 것은 고쳐주지 않았으니 아델라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제가 다른 사람을 통해서 고쳐주려 하였지만 창피하다고 극구 반 대하였고, 자기집의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 결사적으로 반 대하였습니다. 비가 양동이에 떨어지면 남편은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비가오니까 집에 물이 떨어지네" 하고 옆에서 텔레비젼만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집에서 2년여를 사는 것을 보다 못한 제가 건축을 하는 신자에 게 부탁하여 무조건 고쳐주라고 부탁하엿고 그분이 한시간도 되지 않아 고쳐 주어 비가 새는 것은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또 문 제가 생겼습니다. 겨울에 보일러가 고장났는데 그것을 수리할 돈이 없어 고치지를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2006년도 겨울에는 몹시도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추운 곳에서 보일러를 고치지 못하고 전기담요 하나로 겨울을 나고 말 았습니다. 건강하지 못한 몸에 추운겨울을 맞아야 했고 몸도 추웠 지만 마음은 얼마나 추웠겠습니까? 큰 동서집과 아델라님 집은 벽 을 맛대고 있는 집이었지만 한쪽은 얼음이 얼고 있었고 다른 한쪽 은 심야전기 보일러에다 벽난로까지 불을 지피고 있었습니다. 20007년 년초 이것도 제가 아는 분을 통해 보일러를 무상으로 고 쳐서 그나마 2007년도는 근근히 추위를 모면했지만 이제는 망가진 몸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임종자들의 안식처인 성모꽃 마을의 봉사는 쉬지를 않고 계속 이어왔습니다. 죽기 20일 전에도 성모 꽃마을 주방봉사를 다녀오고서는 이제는 도저히 더 할 수가 없다며 차를 끌고 집에 오기도 힘들다고 하였습니다. 아델라님은 성모꽃마을에서도 아주 소중한 자매로 모두가 좋아했고 임종을 앞둔 자들을 위해 여러해 봉사의 생활을 계속하였습니다. 꽃마을의 운영을 위해 모금운동을 하는 신부님을 조금이라도 도와 드리기 위해 성모 꽃마을 수입사업을 위해 기증한 말린 산나물을 팔러 다니기도 하였지요. 그래서 더욱 아델라님을 성모 꽃마을 원장신부님은 아끼고 전폭 적인 사랑을 주셨습니다. 아델라가 조금이라도 힘든 기색이 보이 면 따로 불러 쉬게 하거나 치료에 도움이 되도록 조언을 주시곤 하였지요. 이것을 아델라님은 늘 감사해 했고, 행복해 했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자신이 꽃마을을 위해 노력하려고 최선을 다했
    던 것입니다.아델라님은 진정 모든 것을 다해 사셨던 것입니다. 원장신부님의 따뜻한 배려와 꽃마을 봉사자들의 친절함에 아델라 님은 마음으로부터 위안을 많이 받았던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삶 이 언제끝날지 모른다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봉사의 삶을 죽기 얼마 전까지도 계속 이어왔던 것이었습니다. 침묵집도 무척이나 사랑했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글을 올릴수 있는 힘만 있으 면 계속 글을 올렸던 것이고 그럼으로써 우리 님들의 사랑을 받았 고 행복도 이곳에서 누렸던 것입니다. 마지막 가는길에 우리 님들 이 보여주신 사랑과 기도 그리고 눈물겨운 희생은 아델라님이 선 종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아델라님은 아름다운 모범 을 보여주고 자신은 화롯불의 재처럼 이제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 이제 아델라님은 우리를 떠났고 이제는 우리 마음 안에만 있습니 다. 그러나 우리 님들을 위해서 하느님께 전구하리라 믿습니다. 늘 기도 중에 함께 하여 주십시오. 또한 우리 주위에 아델라님처럼 말없이 고통받는 이들이 수없이 많을 것입니다. 보이지 않게 고통받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위 해서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봉사하며 희생하고 많 은 어려움 속에서도 인내하며 사는 것이 우리 침묵가족들의 몫이 아 닌가 싶습니다. 여기 기록한 내용은 제가 수없이 많이 들은 내용중 극히 일부분일
    뿐입니다. 더 많은 이야기들도 많고 하나하나 고통을 겪을때의 일
    들은 참으로 어찌 표현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이번에 아델라님의 임종을 전후한 우리 침묵가족들의 놀라운 사랑과 힘을 보았습니다. 모두가 하나되어 침묵가족들의 아름다운 형제애와 일치된 사랑을 보면서 하느님께서 우리 침묵가족들과 함께 하고 있음 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진정 하느님은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야 합 니다. 오! 주님! 모든 것을 다 바쳐 자신의 삶을 산화시킨 아델라의 영혼에 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그리고 남아있는 남편과 그 자녀들의 어려 움도 돌보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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