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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벨탑 이야기 (창세11:1~9)
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3-02-17 조회수540 추천수1 반대(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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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 이야기

(창세11:1~9)

1 온 세상이 한 가지 말을 쓰고 있었다. 물론 낱말도 같았다. 2사람들은 동쪽에서 옮아오다가 시날 지방 한 들판에 이르러 거기 자리를 잡고는 3 의논하였다. '어서 벽돌을 빚어 불에 단단히 구워 내자.' 이리하여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쓰게 되었다. 4 또 사람들은 의논하였다. '어서 도시를 세우고 그 가운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날려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 5 야훼께서 땅에 내려 오시어 사람들이 이렇게 세운 도시와 탑을 보시고 6 생각하셨다. '사람들이 한 종족이라 말이 같아서 안 되겠구나. 이것은 사람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에 지나지 않겠지. 앞으로 하려고만 하면 못할 일이 없겠구나. 7 당장 땅에 내려 가서 사람들이 쓰는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알아 듣지 못하게 해야겠다.' 8 야훼께서는 사람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으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도시를 세우던 일을 그만 두었다. 9 야훼께서 온 세상의 말을 거기에서 뒤섞어 놓아 사람들을 온 땅을 흩으셨다고 해서 그 도시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불렀다.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떠나 자신이 용사가 되고 자신이 스스로의 인생에 왕이 되어 살고자 하는 인간의 죄는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에서 시작하여 카인과 라멕과 네피림과 니므롯으로 이어져 바벨탑까지 이어졌으며 그러한 바벨의 정신은 인류의 역사 끝까지 이어지게 되어 최후의 종말에 그러한 바벨의 정신으로 이 땅을 살다간 모든 세력들이 전부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러한 죄악의 세력들을 총칭하여 바벨론이라 칭하였던 것이고 하느님은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 고 성경과 역사와 인생을 통하여 우리에게 반복하여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느님께서 그러한 바벨론적 삶의 전형인 바벨탑 건립을 왜 그토록 미워하셨는가에 대한 첫 번째 항목까지 보았습니다.

 

그 ①첫 번째 이유가 본문 4절에 인간들이 스스로 하늘에 닿으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힘으로 하늘에 닿아 하느님의 지배와 권위를 폐하고 싶어 하는 죄인들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지요. 우리 인간들은 절대로 하느님의 지배를 벗어나 스스로 왕이 되어 살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인간은 원래 지어지기를 하느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지어졌기 때문에 하느님을 떠나서는 한시도 참 행복과 만족에 이를 수가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만들어 주신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의 통치에 순복하며 살 때 가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사람들 인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들은 하느님 대신 자신이 왕의 자리에 올라 앉아, 하느님 나라 대신 자신들이 일구고 발전시킨 인간의 왕국으로 하느님 나라를 대치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늘에 닿으려하는 죄인들의 마음인 것입니다.

 

본문에 나와 있는 ②두 번째로 하느님의 저주를 초래한 ‘인간들이 바벨탑을 세우려고 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이름을 내기 위함’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4절을 보세요.

 

(창세11:4) 4 또 사람들은 의논하였다. '어서 도시를 세우고 그 가운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날려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


인간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왜 나쁜 것인가요? 하느님은 왜 이름을 내려고 하는 인간들을 심판하셨을까요? 성경에서 이름이라는 것은 특히 구약에서의 이름은 단순히 호칭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의 특성과 가치와 본질과 위상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그러면 성경에서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최초의 이름의 의미를 잘 이해를 하면 우리 인간들의 본질과 가치와 위상과 특성이 어떤 것인지 잘 알수있겠지요? 인간들에게 가장 처음 주어진 이름이 아담과 하와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냥 ‘사람’이라는 뜻으로 우리 인간 전체를 그 속에 담고 있는 상징적인 이름이고요.

아담이 범죄한 후에 하느님으로부터 창세기 3장 15절의 원시 복음을 받은 후에 자신의 아내에게 주는 최초의 이름이 ‘하와’입니다. 하와는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70인 역에서는 그 하와를 생명이라는 단어 ‘조에’로 표기를 합니다. 이렇게 인간에게 최초로 주어진 이름인 아담과 하와, 그리고 그 두 이름 사이에 일어난 인간의 타락과 창세기 3장 15절을 통한 회복의 약속을 종합해 보세요. 그러면 인간에게 주어진 최초의 이름의 意味가 담고 있는 메시지가 정리가 됩니다.

전체 하느님의 백성을 상징하고 있는 아담과 하와의 이름, 즉 우리 하느님의 백성의 이름은 ‘죽어야 할 티끌 같은 죄인들에게, 아무 것도 아닌 존재들에게 하느님의 은혜로 주어지게 된 생명을 받은 자’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을 짧은 어구로 줄이 면 인간의 이름은 ‘하느님의 은혜로 생명을 부여 받은 자’ 즉 ‘하느님의 자녀’라는 뜻입니다. 자녀는 아비의 생명을 부여 받아 그 아비의 생명의 특성대로 사는자를 자녀라 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러한 생명을 부여하신 하느님의 은혜에 찬양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사건을 가리켜 ‘人子의 榮光을 얻을 때’ 라고 하시지요? 그 십자가에 하느님의 성품과 능력과 하느님의 하신일이 나타났기 때문에 그 십자가를 지시는 사랑과 용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느님 의 영광을 드러낸 분이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그렇게 아버지의 생명의 특성, 다른 말로 영생의 특성을 그 안에서 발산해 내는 자여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러한 존재로 지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인간들이 하느님의 이름을 위해 살지 않고 자신들의 이름을 내기 위해 바벨탑을 쌓은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우리의 이름을 내고’ ‘웨나아세 라누 쉠’ 이라는 어구를 직역하면 ‘우리가 스스로 우리를 위해 우리의 이름을 만들 자’ 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우리에게 이름을 주자’ 라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이름을 주는 행위는 독점적인 支配權과 所有權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창세2:19, 3:20, 왕하 23:34, 24:17)

따라서 하느님으로부터 아담이라는 이름을 받은 인간은 하느님의 소유이고 하느님의 지배 아래 있어야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하느님의 지배와 간섭을 거부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기 위해 자기들 스스로에게 이름을 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이 지어주신 ‘하느님의 자녀’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그 이름에 맞게 하느님께 순종하며 자녀다운 삶을 살도록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주신 이름을 팽개치고 자신들 스스로 자신들에게 이름을 주고 싶어 했다는 것입니다.

英傑, 英雄, 네피림, 巨人, 有名한者 등등의 이름을 주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필로 (phillo)에 의하면 실제로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이 자기들이 쌓아 올린 벽돌에다가 자기의 이름을 써서 쌓았다고 합니다.

 

교회나 신학교 등을 방문해 보면 대부분 거기에 신학교나 교회 건축 때 많은 돈을 기부한 사람들의 이름을 딴 방들이 있습니다. 그 건물을 건축할 때 세상의 힘을 보탠 영웅들의 이름을 기록해 놓은 것이지요. 그건 이름을 내고 싶어하는 바벨탑의 妄靈인 것입니다. 

신학교나 교회에까지 이런 바벨탑의 망령들이 들어와 있으니 세상은 오죽하겠습니까? 세상은 저마다 자기들의 이름을 위해 자신의 모든 시간과 자원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그렇게 자기의 이름을 위해 탑을 쌓았다가 망한 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과 압살롬입니다.

 

(1사무 15:12) 12 이튿날 아침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러 나서자 누가 그에게 이런 말을 전해 주었다. '사울왕은 오는 길에 가르멜에다 자기의 승전비를 세워 놓고 그곳을 떠나 길갈로 내려 갔습니다.'


사울은 그 일로 왕의 자리에서 폐위를 당하고 전쟁터에서 처참하게 죽습니다.

 

(2사무 18:18) 18 그런데 압살롬은 살아 있을 때 자기 이름을 이어 갈 아들이 없다고 해서 왕의 계곡에 돌기둥을 세운 일 있었다. 그는 그 돌기둥을 자기 이름을 따서 불렀는데 그것을 오늘날까지도 압살롬의 비석이라 부른다.


압살롬이 요압에게 쫓기다가 나무에 걸려서 요압에게 심장을 찔려 죽은 후에 압살롬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그리고 있는 구절입니다. 그렇게 처참한 말로를 맞은 압살롬을 한 마디로 표현을 하면 ‘자기를 위해 기념비를 세운 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이름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소비하는 자들의 말로는 이토록 처참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온통 자기 스스로에게 영웅이라는 이름을 주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멸망당할 인간들 중에서 어떤 한 무리를 건져서 그 들에게 다시 하느님이 주시는 이름을 주실 것 이라는게 바로 福音인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2장부터 믿음의 祖上인 아브람이라는 사람을 건져내셔서 아브라함이라는 새 이름을 주시고 그를 통해 교회의 탄생 과정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묵시 3:12) 12 나는 승리하는 자를 내 하느님의 성전기둥으로 삼을 것이며, 그가 다시는 그 성전을 떠나지 않게 될 것이다. 나는 내 하느님의 이름과 내 하느님의 도성의 이름, 곧 하늘에서 내 하느님께로부터 내려 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로운 이름을 그 이기는 자 위에 새기겠다.


우리 인간들은 원래 하느님의 이름을 위해 창조가 된 피조물들입니다. 그래서 그 인간은 끊임없이 하느님의 생명력을 받아 그 생명력을 밖으로 발산해 내는 삶을 살도록 지어진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하느님을 닮은 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자들이 바로 인간인 것입니다. 그 삶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 바로 인간의 창조의 목적인 것입니다.

 

(이사 43:7) 7 그들은 내 백성이라고 불리는 것들, 나의 영광을 빛내려고 창조한 내 백성, 내 손으로 빚어 만든 나의 백성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하느님께 순종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면서 우리는 하느님 절대 아래에서 하느님께 순종할 때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올바로 인식하고 세상에 공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이런 고백을 하지요.

 

(시편 115:1) 1 야훼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소서. 다만 당신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소서. 그 영광은 당신의 사랑과 진실로 말미암은 것이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의 창조목적을 이해하고 하느님의 의중을 읽을 수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바벨탑을 쌓던者들과 누구의 이름을 위해 사는가가 다릅니다. 죄인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자신들의 이름을 위해 살지만 하느님의 백성들은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의 이름을 위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48:11) 11 내가 이렇게 한 것은 오로지 나 스스로를 위하는 마음에서였다. 어찌 나의 이름에 욕이 돌아오게 버려두랴? 어찌 나의 영광을 남에게 넘겨주랴?


이렇게 하느님의 이름만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름만이 높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백성들은 그렇게 높으신 하느님의 처소로서 하느님의 영광을 담아, 다른 말로 그 하느님의 이름을 받아 그 안에서 높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기들의 이름을 내기 위해 바벨탑을 짓고 있는 하느님의 저주 아래 있는 자들과 하느님께 순종하는 하느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아브람을 11장과 12장에서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 12:1~2) 1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2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네 이름은 남에게 복을 끼쳐 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


바벨탑 사건에서는 하느님께서 자신들의 이름을 떨치게 하려던 자들을 審判하셨는데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아브람의 이름을 昌大케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둘 다 이름이 떨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에 의해 떨치게 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福을 받아 하느님에 의해 떨치게 되지 않고 자신들의 힘으로 자신들의 이름을 떨치게 하려는 자들은 모두 하느님의 심판대 위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이름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의 처소로서, 그 하느님의 성품과 됨됨이, 즉 사랑하며, 용납해주며, 섬겨주며, 참아주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때 높아지는 것이지 자신들의 노력이나 열심으로 이 세상의 힘을 쌓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진정한 英傑은 이 세상에서 커다란 名譽를 얻고, 엄청난 富를 쌓고, 巨大한 帝國을 建設하여 자신의 이름을 내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닌 것을 알고 이 세상의 삶의 원리인 힘의 원리를 버리고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대로 잘 살아내는 사람을 영걸이라 한다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 하느님이 자랑하시는 아들은 자기들의 이름을 위해 이 땅에서 큰 업적 이루어 낸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 시키시는 대로 잘 살아내는 아들 인 것입니다.

 

(묵시 14:1) 1 그리고 나는 어린양이 시온산 위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어린 양과 함께 십사만사천 명이 서 있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져 있었습니다.

 

이제 새 창조 속에서 우리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우리의 이름은 아담과 하와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새 이름은 우리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의 이름과 동일한 이름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終局에 하느님의 모든 성품과 인격과 그분의 누리는 모든 것들을 함께 누리게 될 때 그러한 모습으로 높아지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의 이름 위해 살다가 結局 바벨론처럼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묵시 17:3~5) 3 그리고 그 천사는 성령으로 나를 감동시켜 광야로 데리고 갔습니다. 거기에서 나는 진홍색 짐승을 탄 여자 하나를 보았습니다. 그 짐승의 몸에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히 적혀 있었고 머리 일곱에 뿔이 열 개나 달려 있었습니다. 4 이 여자는 주홍과 진홍색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단장하고 있었으며 자기 음행에서 비롯된 흉측하고 더러운 것들이 가득히 담긴 금잔을 손에 들고 있었습니다. 5 그리고 그 이마에는 '온 땅의 탕녀들과 흉측한 물건들의 어미인 대바빌론' 이라는 이름이 상징적으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해 사는者들의 몸체를 보니 그게 바벨론이더라는 말입니다. 그 바벨론은 반드시 멸망하게 된다는 것이 요한묵시록의 논증입니다. 우리 성도는 자신의 이름을 내고 자신을 자랑하기 위해 아까운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그러한 세상 사람들과는 정 반대로 하느님의 이름을 위해, 다른 말로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하느님의 名譽에 먹칠하지 않는 삶, 하느님께서 명령하신 사랑의 이중계명을 잘 지키며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원리로 이 땅을 성실하게 살아냄으로 하느님의 자녀다운 신적인 삶인 영생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이름을 위하지 않고 하느님의 이름을 위해 사는 삶인 것입니다. 그 때 우리의 이름은 하느님의 이름 안에서 昌大케 되는 것입니다.

 

③세 번째로 하느님의 저주를 초래한 ‘인간들이 바벨탑을 세우려고 했던 이유’는 ‘흩어짐을 면하기 위함’ 입니다.

거기서 ‘흩어짐’으로 번역이 된 단어는 ‘펜’과 ‘나푸츠’의 합성어입니다. 히브리어 ‘나푸츠’는 ‘널리 퍼져나가다’라는 의미의 ‘푸츠’의 미 완료형으로 계속하여 널리 퍼져나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그렇게 계속하여 땅에 흩어져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쓰인 ‘펜’은 ‘제거, 방해’를 나타낼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 말은 인간들이 生育하고 번성하여 땅에 充滿하라, 다른 말로 ‘흩어져 하느님의 영광을 온 세상에 드러내며 살라’는 하느님의 축복의 명령을 정면으로, 그리고 고의적으로 반대하여 제거하고자 하는 의도로, 절대로 흩어지지 않고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서 연합하여 자기들 마음대로 살기위해 바벨탑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인간들은 강제로 온 세상에 흩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 부분도 역시 신약과 비교해 보면 다소 의문스러운 부분입니다. 신약에서는 분명 하느님께서 ‘너희는 서로 하나가 되어라, 연합해라’ 라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그런데 왜 하나가 되어서 자기들끼리 사이좋게 잘 살겠다는 데 왜 심판을 하셨을까요?

하느님께서 성도에게 요구하시는 하나 됨은 성령 안에서의 하나 됨입니다. 그 말은 그리스도라는 머리를 중심으로 그 머리의 명령에 순종하는 지체로서의 하나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에페 4:3‐4,13,15) 3 성령께서 평화의 줄로 여러분을 묶어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신 것을 그대로 보존하도록 노력하십시오. 4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며 성령도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셔서 안겨 주시는 희망도 하나입니다. 13 마침내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 성숙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15 도리어 우리는 사랑 가운데서 진리대로 살면서 여러 면에서 자라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하나 됨은 하느님의 은혜로 하느님께 순종하게 된 자들이 하느님의 명령을 좇아 일사불란하게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로 살게 되는 하나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하나됨 속으로 초청이 된 사람들은 누구나 다 하느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주종(主從)의 구별이나 남녀의 차별이 없는 평등한 하나 됨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요구하는 하나 됨은 그러한 자격과 능력을 부여받은, 다른 말로 성령을 받은 어떤 특별히 구별된 공동체 에게 국한된 하나 됨인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 됨은 절대 인간들의 능력이나 열심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그들을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의 부으심을 입은 자들만이 성령 안에서 하나 됨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일이 오순절 날 다락방에서 일어났지요? 적어도 15개 이상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다락방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의 신분은 천차만별이었습니다. 그렇게 언어도 다르고, 사는 곳도 다르고, 성별도 다른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자 그들이 하나로 묶여 한 가지 언어를 쓰는 자들처럼 서로의 말을 다 알아들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 됨의 회복과 바벨탑 사건에서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하나 됨을 이루려 하는 인간들이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잘 생각해 보세요.

오순절 날 성령에 의해 교회가 하나 되는 모습은 바벨탑을 쌓으며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 연합하려 했던 자들이 하느님의 저주로 흩어지게 된 그 사건의 종말론적 회복인 것입니다. 진정한 하나 됨은 너희들이 너희들 마음대로 살고 싶어서 연합하는 그런 하나 됨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이 부어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 분이 하느님께 목숨을 바쳐 순종하신 것처럼 하느님께 순종하는 자들로서의 하나 됨이라는 것을 두 사건을 통하여 대조하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광과 유익을 위해 하나 됨과 연합을 추구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성령 안에서 하나 되어야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죄인들의 속성은 자기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 되어 하느님을 비롯한 자기 이외의 모든 존재들이 자기를 위해 존재 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이 정말 사심 없이 함께 뭉칠 수 있을까요? 그러한 자들의 연합은 오직 자기의 필요에 의한 연합일 뿐입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연합은 자기중심의, 자기 이익을 기준으로 하는 연합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의 필요 가 다 채워지지 않으면 세상은 다른 모양의 더 큰 연합을 추구합니다.

그런데도 그러한 이기적인 세상 연합의 모습이 아주 선명하게 표면화 되어 나타났었습니다. 19세기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시작된 구미 열강과 러시아 일본 등의 제국주의 경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었지요? 그들은 각기 자기 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 왕국의 건설을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야망은 달성되지 못하고 그 여파로 1차 세계대전이라는 값비싼 수업료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자기들의 탐욕을 성취는 시키되 그 후유증은 없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 냈는데 그게 국제 연맹이라는 세계연합 단체였습니다. 

우리 인간들끼리 싸우지 말고 서로 연합해서 행복한 세계, 지상낙원을 만들어 보자는 모토 아래 1920년에 국제 연맹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큰 나라들이 서로의 국익 때문에 서로 싸우게 되고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을 일으킨 일본, 독일, 이탈리아의 탈퇴로 1939년에 완전히 해체 되었습니다.

그렇게 전쟁을 치르고 난 세계는 이번에는 국제 연맹보다 더 크고 단단한 연합체를 구성하여 또 다시 세계 평화와 세계 정의를 구현 해 보자고 UN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인간들이 스스로 연합하여 스스로를 보호하고 스스로 행복에 이르려 하는 바벨탑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떠난 인간들은 저마다 자기들의 필요에 의해 연합을 하고 바벨탑을 쌓습니다. 하느님은 성령 안에서 하나 되어 온 세상에 퍼져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는 자들로 당신의 백성들을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가 아니라 자기들끼리 뭉쳐서 스스로의 안전을 지켜보겠노라고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연합이라는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들의 연합은 계속해서 와해되었고 ‘자국의 이익을 배제한 진정한 연합은 없다’는 잠정적 결론 하에 인간들은 껍데기뿐인 연합을 지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바벨탑 사건을 통해 자기들의 유익과 필요를 위해서만 사는 세상 사람들의 연합의 시도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느님도 하느님을 떠나 스스로의 안전을 지키고 스스로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교만한 연합을 절대 용인하지 않으신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 주시는 것입니다.

진정한 연합은 성령의 부으심을 입고 머리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서로를 사랑으로 용납하고 섬겨줄 때 그 때 진정한 하나 됨의 연합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진짜 연합의 열매가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한번 돌아보자고요. 우리가 정말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맞습니까? 그렇다면 그 한 靈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하나 됨, 즉 섬김과 용서함과 사랑함의 연합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통하여 분투하고 추구하여야 할 것이 바로 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엉뚱하게도 그러한 연합체 속에서 여전히 자기의 有益만을 구하고 있지는 않나요? 그러면 우리는 성당 안에서 여전히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 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기심을 버리지 못하고 아무리 우리의 잔꾀를 사용하여 하느님 몰래 바벨탑을 쌓는다 하여도 하느님은 반드시 그 무수한 우리 인생의 바벨탑들을 속속들이 찾아내셔서 부수어 버리실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영광과 우리의 이름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의 이름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 2:2‐4) 2 야훼를 거슬러, 그 기름부은 자를 거슬러 세상의 왕들은 들썩거리고 왕족들은 음모를 꾸미며 3 '이 사슬을 끊어 버리자!' '이 멍에를 벗어 버리자!' 한다마는 4 하늘 옥좌에 앉으신 야훼, 가소로와 웃으시다가


이 긴 역사 동안에 인간들이 자기들 스스로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내어놓은 수많은 해답들을 보세요. 민주주의, 공산주의 등의 이데올로기며, 수많은 종교, 르네상스, 과학, 문명, 문화 그 어느 것이 인간들을 참 행복으로 이끌었습니까? 인간들은 끝없이 역사 속에서 자기들 힘으로 행복에 이르겠다는 바벨탑들을 쌓아왔고 그 것들을 역사의 해답으로 제시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시도들은 허사로 끝났고 지금도 허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문예 부흥을 통한 계몽과 교육이라는 바벨탑은 세계 양차 대전으로 허물어 버리셨습니다. 공산주의라는 바벨탑은 연이은 공산권의 붕괴로 허물어 버리셨습니다. 자본주의라는 바벨탑 역시 피 튀기는 분규와 끊이지 않고 점점 흉폭해 지는 범죄의 모습으로 허무셨습니다.

과학 문명이라는 바벨탑도 허물어져 가고 있습니다. 인류가 발전시켜온 과학 문명은 인류 스스로를 살해 하는 살상무기 제조에 가장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은 인류가 내어놓은 행복에 이르는 길에 대한 해답을 모두 허물어 버리십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괴롭히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인간이 만들어 내는 행복의 길을 하나하나 다 허무시는 하느님의 역사는 우리의 행복이 그러한 인간과 세상의 것으로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려는 하느님의 배려인 것입니다.

그러한 하느님의 섬세한 배려는 성도의 삶 속에서도 여지없이 나타납니다. 하느님은 성도의 삶 속에서도 그들이 이 세상의 것들로 행복에 이르려 차곡차곡 쌓아놓은 바벨탑들을 허물어 가십니다.

 

(신명 8:1~2) 1 너희는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계명을 성심껏 지켜야 한다. 그래야 너희는 행복하게 살며 번성할 것이고 야훼께서 너희의 선조들에게 주겠다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 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다. 2 너희는 지난 사십 년간 광야에서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어떻게 너희를 인도해 주셨던가 더듬어 생각해 보아라. 하느님께서 너희를 고생시킨 것은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킬 것인지 아닌지 시련을 주어 시험 해 보려고 하신 것이다.


1절을 보면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길 하느님의 말씀을 잘 지켜 행하면 하느님이 약속하신 약속의 땅에 들어가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놓고 그것을 잘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시험을 하시는데, 다른 말로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 이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하시는데 그 시험의 방법이 광야를 걷게 하고 그들을 낮추시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쌓고 있는 바벨탑의 종류가 많은 것 같지만 사실은 ‘나’ 는 단어 하나로 縮約이 됩니다. 우리는 ‘나’에 대해 너 무 많이 기대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아닌 ‘나’를 신뢰합니다. 그래서 나의 능력과 나의 자원을 사용하여 이 세상의 바벨탑들을 쌓으며 행복해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가 없으면 절대 못 살아요. ‘나’가 내 행복의 유일한 근거입니다. ‘나’가 잘 되어야 ‘나’가 행복합니다. 아닙니다. 우리의 행복의 근거는 ‘하느님’에게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에 행복해 합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에서 그렇게 자기 자신을 너무 사랑하고 신뢰하는 성도의 나를 부인시키시고 그 신뢰와 기대를 하느님께로 옮기시는 작업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게 사기도 당하게 하시고 억울한 누명도 쓰게 하시고 때로는 말도 안 되는 손해도 보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 때 나의 바벨탑들이 무너져 내리면서 ‘나’라는 거대한 바벨탑의 실체가 조금씩 무너져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너무 유명해 지려 하지 마세요. 너무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려 하지 마세요. 다른 이들이 모두 나를 존경하고 좋아해 주기를 원하지 마세요. 그렇게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려 하고 인정받으려 하는 마음이 우리에게서 세상을 놓지 못하게 하는 아주 나 쁜 마음인 것입니다. 바오로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갈라 1:10) 10 내가 지금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합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지지를 얻으려고 합니까? 내가 사람들의 호감이나 사려는 줄 압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들의 호감을 사려고 한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일꾼이 아닐 것 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 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從이 아닌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세상의 힘을 못 가졌다고 해서 인정해 주지 않고 존경해 주지 않고 사랑해 주지 않는다고 서운해 하지 마세요. 그건 세상이 인정하는 것들이 하느님에 의해 허물어졌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서운해 하지 마시고 부끄러워하지도 마세요. 그냥 그 자리에서 ‘정말 나는 이 세상이 자랑하고 의지하고 있는 것들이 없는데도,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이렇게 무시하는데도 이렇게 하느님만으로 행복 하구나’라는 사실이 확인 되시면 기뻐하십시오.

부부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아내가 내 남편이 나만을 사랑해 주고 나만을 존경해 줄 것을 기대하지 마세요. 물론 서로 서로 사랑해 주며 존경해 주며 살아야지요. 상대방에게서 돌아 올 반대급부를 생각하지 말고 내가 먼저 사랑해 주십시오. 그리스도교의 사랑은 항상 나의 손해와 나의 손해를 전제하는 것입니다. 내가 손해보고 내가 다쳐서 상대방이 유익을 보고 상대방이 안전해 지는 것을 크리스챤의 사랑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십자가로 나타난 것입니다.

상대방에게서 나에게 돌아 올 어떤 반대급부를 노리고 사랑을 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건 기생충 같은 사랑입니다. 기생충들은 자기가 기생하고 있는 생물이 살아있을 때는 영원히 그 곁을 떠나지 않을 것처럼 단 물만 쏙쏙 빼 먹고 살다가 그 생물이 죽으면 곧바로 밖으로 다 기어 나옵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이 그러한 것처럼 상대방에게서 무엇을 얻어내기 위해 상대를 사랑한다면 그건 기생충의 사랑과 다름없는 사랑인 것입니다. 그건 ‘난 기생충입니다’라고 광고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살기로 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십자가를 날마다 지는 사람들입니다.

손해 보세요. 내가 해(害)를 입으세요. 그리고 상대방이 유익을 보고 상대방이 살아나게 하십시오. 그게 그리스도인입니다. 상대방이 알아주지 않아도 속 하세요. 오래 참으시고 인내하시면서 그 사랑을 하세요. 괜히 ‘내가 이렇게까지 잘 해 주는데 자기 나 죽으면 당신도 따라 죽을 거야?’ 이 런 거 기대하지 마세요.

자기를 비워서 상대방을 살리는 하늘의 삶, 하늘의 사랑을 하는 이들이 바로 이 세상의 바벨탑인 ‘나’를 허물어 버린 자들의 삶인 것입니다. 그렇게 사십시다.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요한17,2) 성경을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에 책에 기록되지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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