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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8 연중 제6주간 토요일...독서,복음(주해)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3-02-17 조회수459 추천수1 반대(0) 신고

 

1독서

<믿음으로써, 우리는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마련되었음을 깨닫습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1,1-7
형제 여러분,
1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2 사실 옛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3 믿음으로써, 우리는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마련되었음을,
따라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닫습니다.

 

4 믿음으로써, 아벨은 카인보다 나은 제물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믿음 덕분에 아벨은 의인으로 인정받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예물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는 죽었지만 믿음 덕분에 여전히 말을 하고 있습니다.

 

5 믿음으로써, 에녹은 하늘로 들어 올려져 죽음을 겪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하늘로 들어 올리셨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더 이상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하늘로 들어 올려지기 전에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다.”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6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그분께서 계시다는 것과
그분께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7 믿음으로써,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관하여 지시를 받고
경건한 마음으로 방주를 마련하여 자기 집안을 구하였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세상을 단죄하고,
믿음에 따라 받는 의로움을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해

조상들의 믿음

11장은 앞의 훈화의 끝부분에서 예시한 대로 믿음에 관한 장이다. 저자는 먼저 믿음의 의미와 특징을 밝힌 다음, 아벨에서 비롯하여 마카베오 시대에 이르기까지 믿음의 위대한 조상들을 길게 열거한다. 등장 인물의 순서는 대체로 구약성서의 역사 순서를 따르는데, “믿음이라는 주제어ㅏ 후렴 형식으로 중간중간에 반복된다. 훈화는 크게 나누어 1-2절의 서론과 3-38절의 본론과 39-40절의 결론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론은 다시 3-12,13-6, 17-31,32-38절의 네 부분으로 나누었다.

 

1

1절에서는 믿음에 대한 본격적 강론에 들어가기 전에 그 정의부터 내린다. 저자는 바오로와 같은 방법으로 현재의 것과 미래의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들어 믿음의 본질을 설명한다. 믿음에 대한 이 정의를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되는 단어는 실상근거. “실상은 본질, 실제, 보증, 확증 등의 다양한 뜻을 지니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를 확증 등의 다양한 뜻을 지니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를 확증으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문장 내용으로 보아서는 보이지 않는 사물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는 실상이다. “근거는 논증, 증거, 근거, 이는 방법, 신념 등의 의미가 있다. 이 단어 역시 앞의 실상과 관련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하는 근거로 번역하는 것이 낫다.

 

2

하느님께서는 다음에 열거한 믿음의 조상들에게 당신 자신과 그 구원 계획을 알려 주셨으며, 조상들은 믿음을 통하여 그 계시를 받아들였다.

 

3

믿음의 역사는 세상 시초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저자는 본격적인 믿음의 역사에 들어가기 전에 모든 사람과 관계되는 창조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천지 창조의 과정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음을 깨닫는다.

 

4

4-31절에서는 신앙의 모범을 보여준 구약의 위인들을 개별적으로 소개하고, 32절에서는 그 내용을 요약하며, 33-38절에서는 이 위인들의 신앙적 삶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여기에 소개되는 인물은 압ㄹ. 에녹,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등 15명의 의인과 예언자들이다. 이렇게 구체적인 인물들을 소개하여 독자들을 가르치는 방법은 유다 디드라쉬 강론 형식을 따른 것이다.

 

창세기에서는 왜 아벨이 카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바쳤는지 그 이유를 밝히지 않는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그 이유를 아벨의 믿음에 두고 있다. 또 창세기에서는 아벨의 피가 외쳤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죽은 아벨 자신이 아직 말한다고 한다. 한마디로 아벨은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하느님께 더 나은 제사를 드렸고 의인으로 인정받았으며 비록 죽었지만 믿음의 힘으로 계속 살아 있으면서 증언하고 있다. 12.24에서는 아벨이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예표로 등장한다.

 

5

창세 5,18-24는 하느님께서 데려가셨다고 할 뿐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킨다. 이러한 이야기 때문에 에목은 구약성서와 유다문학에서 자주 신비의 인물, 천상 비밀의 계시자, 의로움의 서기, 죽은 이들의 심판자등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저자는 이러한 전승과 더불어 집회 44.16; 지혜 4.10의 에녹이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드렸다는 이야기를 그의 믿음과 결부시킨다. 믿음없이는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다는 논리다.

 

6

앞의 에녹의 이야기와 연결시켜 신앙인에 대해 정의를 내린다. 신앙인은 에녹과 같이 하느님이 계시며 당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보상하는 분임을 믿고 그분께 가까이 가는 사람이다. 하느님은 악인을 벌하시듯이 이러한 신앙인에게는 보상하는 분이시다.

 

7

창세 6.5-10.32에 따르면 노아는 의로운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명을 받들어 그의 가족과 함께 멸망에서 벗어났다. 창세기 본문에는 노아의 믿음에 대한 말이 없지만,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 모든 사실을 그의 믿음 때문으로 풀이한다. 그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따랐고 특별히 구원되었으며 결국 첫 번째로 의인으로 불린 사람이 되었다. 특기할 것은 이 구절에서 구원의 방주는 단죄의 방주가 되기도 한다. 같은 사건이나 사물이 이렇게 서로 상반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예는 성서에서 가끔 발견된다,(2고린 1.15-16 참조).

 

 

 

 

 

 

 

 

 

 

 

복음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였다.>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2-13
그때에 2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3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4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5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6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7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8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10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11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째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1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는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과 멸시를 받으리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느냐?
13 사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엘리야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제멋대로 다루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해

영광스러운 변모

제자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야 비로소 그분이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아들이심을 명백히 깨달았다. 그러면서 평소 자기들이 스승을 따라다닐 무렵 그분의 인품과 언행에 비범한 면이 있었음을 상기하고 하느님의 외아들이셨기에 그러셨구나 하는 생각을 뒤늦게 품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에도 하느님의 외아들이셨음을 밝히려고 변모사화를 꾸미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자기들이 3년 가까이 예수님을 모시고 다니면서 어떻게 그분의 정체를 그처럼 못 알아보았을까 하고 스스로 묻기도 했다. 이 물에 마르코는 자기 나름대로 이렇게 답변했다.

 

일찍이 예수님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계셨고 영특한 귀신들로 그분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그와는 달리 사람들은 둔갑해서 그분이 심문을 받으시고 돌아가시기 이전에는 도무지 그분의 신분을 파악할 수 없었다. 다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그분의 정체를 파악했지만 부활하실 때까지 그것을 비밀로 간직하라는 스승의 함구령 때문에 발설할 수 없었다.

 

이제 변모사화에 들어 있는 소재들을 보면 하느님이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신 신현사화에 나오는 소재와 비슷한 게 많다. 이는 예수께서 하느님 같은 초월적 존재라는 것이다. 또한 묵시문학의 종말서술에서 빌려오는 소재도 현저하다. 이는 예수께서 종말을 앞당겨 사신 종말론적 존재라는 것이다.

 

2

하느님이 모세에게 이레째 날에 나타나셨다.

세 제자는 5.37; 14.33에도 나온다. 출애 24.1.9에도 모세를 동반한 사람 셋이 명시되어 있다.

 

출애 24.15에서는 시나이 산.

 

묵시문학계에서는 종말에 부활할 의인들의 모습이 변하리라고 보았다.

 

3

묵시문학계에서는 하느님과 천사들이 흰옷을 입고 있으며, 종말에 부활할 의인들도 빛나는 옷을 입으리라고 한다.

 

4

유다교에서는 에녹과 엘리야가 죽지 않고 승천하여 하늘에 산다고 보았다. 모세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한 것 같다. 그렇다면 여기 모세와 엘리야는 천상적 존재로서 변모하신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다.

 

5

사람들이 예수님을 랍비라고 불렀는데 선생이란 뜻이다. 예쑤시대에는 율사가 아닌 사람에게도 그런 존칭을 사용했다. 우리나라에서 흔히들 교직자 아닌 사람을 보고도 선생님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1세기 말엽 랍비는 율사만을 가리키는 존칭으로 국한되었다.

 

6

변모하신 예수님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는 천상 존재들이다. 이런 이들은 마땅히 영원한 초막에거처하게 마련인데, 베드로는 현세적 초막을 지어드리려 한다. 여기 초막은 초막절의 초막을 연상시킨다. 이스라엘 백성은 추수를 하고 나서 온 민족이 예루살렘에 모여 나뭇가지로 초막을 세우고 그 안에서 지냈다. 이는 시나이 사막에서의 천막생활을 회상하는 축제였다.

 

베드로의 몰이해는 마르코가 덧붙인 구절일 것이다. 그럼 마르코는 베드로가 무엇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보았을까? 베드로는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예수님과 함께 되도록 오래 지내려 할 뿐 그분이 고난을 당하셔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천상 존재가 나타나면 인간은 으레 두려워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종교학계에서는 초자연계를 전율의 신비라 일컫는다.

 

7

출애 24,16에도 구름에서 소리가 난다.

 

세례 때에는 하느님이 예수께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하셨는데, 여기서는 제자들에게 예수의 정체를 밝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하신다.

 

신명 18.15를 연상케 한다.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는 나와 같은 예언자들를 동족 가운데서 일으켜 세워주실 것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마르코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수난예고를 명심해서 들어야 한다는 뜻으로 7ㄴ절을 이해했다.

 

9

9-10절은 마르코가 변모사화와 엘리야 재림논쟁을 연결하면서 덧붙인 것이다. 9절은 복음서의 맨 마지막 함구령이다.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라 하여 함구시한이 명시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겪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이승의 예수님을 올라로 볼 수 있고 따라서 그 때 가서야 이승의 예수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초대교회의 선포문을 보면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주제로 삼았다. 10절은 제자들의 몰이해를 내용으로 한다.

 

엘리야 재림 논쟁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종말의 인물로 받들었다. 그러나 유다교인들은 반론을 제기하여, 종말이 도래하기 전에 먼저 엘리야가 재림한다고 구약성경에 적혀 있는데 그가 아직 재림하지 않았으니 예수는 종말의 인물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반론에 그리스도인들도 자기네 나름대로 구약성경을 들이대며 답변했다. 요컨대 여기 대목은 유다교인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논쟁을 옮겨실었다. 율사들과 예수님 사이의 논쟁인 양 서술한 것은 허구다,

 

11

종말인 야훼의 날이 닥치기 전에 엘리야가 재림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화해시킨다느니 화해시킬뿐더러 열두 부족을 재건한다느니 하는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런데 거족적 화해도 재건도 실현되지 않았으니 종말의 선구자 엘리야가 재림하지 않은 것은 명백하다. 따라서 예수는 종말의 인물일 수 없다 이것이 유다교인들의 반론이었다.

 

12

12-13절은 그 반론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답변이다. 우선 12절의 뜻을 풀이하면, 종말의 선구자 엘리야에 관한 예언도 있지만 종말의 인물 인자에 관한 예언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엘레야가 먼저 와서 거족적 화해와 재건을 이룩하리라는 예언과 인자가 나중에 와서 많은 고난과 멸시를 당하리라는 예언은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엘리야의 재림에 대한 예언을 올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인자의 수난에 관한 예언으로 구약성경 어느 대목을 내세웠는지 아무런 말이 없다.

 

바로잡아 놓는다구요?”(의문문) 대신 바로잡아 놓습니다”(긍정문)로 번역할 수도 있다.

 

13

사실은 이미 엘리야가 재림하여 거족적 화해와 재건을 이룩하려고 했지만 그 일을 하기도 전에 그만 엘리야를 죽여 버렸다는 것이다. 그럼 이미 재림한 엘리야는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가그는 요한 세례자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요한을 참수했다. 그러니 종말의 선구자 요한도 종말의 인물 예수도 죽음의 길을 가는 도리밖에 없다는 것이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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