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값싼 은혜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8-04-25 조회수507 추천수4 반대(0) 신고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ffer)는 히틀러의 하수인이 되어가던 독일 교회에 맞서 싸운 개신교 목사로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1945년 히틀러가 자살하기 보름 전에 처형당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39세였다. 암흑의 상황에서도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누구인가?>하는 것을 끊임없이 묵상하고, 자신에게 <본회퍼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고난을 자초한 고난의 사람이었다. 
 
 그의 글 중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값싼 은혜는 우리 교회의 치명적인 적(敵)이다.
오늘 우리의 싸움은 값비싼 은혜를 얻기 위한 싸움이다.
 
 값싼 은혜는 싸구려 은혜, 헐값의 용서, 헐값의 위로, 헐값의 성만찬(聖晩餐)이다. 그것은 교회의 무진장한 저장고에서 몰지각한 손으로 생각없이 무한정 쏟아내는 은혜다. 그것은 대가나 값을 치르지 않고 받은 은혜다.
 
 죄를 뉘우치지도 않고 죄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지도 않으면서
세상은 자신의 죄를 덮어줄 값싼 덮개를 값싼 교회에서 얻는다.
값싼 은혜는 하느님의 생생한 말씀을 부정하고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값싼 은혜는 죄인을 의롭다 함이 아니라 죄를 의롭다고 한다.
은혜가 모든 것을 처리해줄 테니 모든 것이 케케묵은 상태로 있어도 된다는 것이다.
 
 값싼 은혜는 우리가 스스로 취한 은혜에 불과하다.
싸구려 은혜는 그리스도를 본받음이 없는 은혜, 십자가가 없는 은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곧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은혜에 불과하다. 
 
 종교 개혁사의 승리자는, 루터가 알아낸 순수하고 값비싼 은혜가 아니라, 은혜를 가장 싼 값에 소유할 수 있는 자리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는 인간의 종교적 본능이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강조점을 살짝 옮기기만 하면 되었다. 그 결과 가장 위험하고 유해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루터가 은혜에 대해 말할 때면 그것은 그 자신의 삶이 은혜를 통해서 비로소 그리스도께 완전히 복종하게 되었음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었다. 루터는 은혜만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후계자들도 그 말을 똑같이 되풀이하였지만 다른 점은, 그들이 루터가 늘 자명하게 생각했던 것을 빠뜨리고, 그것을 생각하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루터가 자명하게 생각했던 점은 다름 아닌 순종이었다. 딱히 루터가 순종을 말할 필요가 없었던 것은 그가 자신을 일컬어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를 따르게 된 사람이라고 늘 말했기 때문이다. 루터의 후계자들이 세운 교리가 루터의 가르침에서 왔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의 교리는 그만 종교개혁을 무효화시키고 말았다.
 
 까마귀처럼 우리는 "싸구려 은혜"라는 시체 주위에 모여, 그 시체의 독(毒)을 받아 마셨다. 그 결과 예수를 본받는 삶이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말았다. 은혜에 관한 교리가 비할 데 없이 신격화되어 그 교리가 하느님 자체, 은혜 자체가 되어버렸다. 루터의 말은 진실한 삶에서 나온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기만이 되고 말았다. 교회는 "의롭다 함의 교리만 가지고 있으면 의롭다 인정 받는 교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 민족이 기독교인이 되고 루터교도가 되었지만 이는 그리스도를 본받지 않고 가장 싼 값을 치러서 된 것이다. 결국 값싼 은혜가 이긴 것이다. 오늘날 헐값에 얻은 은혜의 필연적인 결과로 제도권 교회가 붕괴되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가 아닐까?
 
 싸구려 은혜는 우리들 대다수에게 무자비했다. 그것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에게 이르는 길을 열어주지 않고 도리어 막기만 했다. 공로[선행]를 요구하는 어떤 계명보다도 싸구려 은혜가 그리스도인들을 더 많이 파멸시켰다.>
 
 비록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지만 참으로 용감하고 총명했던 것 같다. 그가 처형되기 직전에 베를린 감옥에서 쓴 <나는 누구인가?>라는 시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나는 누구인가? 사람들이 내게 말하기를
내가 감방에서 걸어 나올 때
마치 영주(領主)가 되어 자기 저택에서 나오듯
침착하고 쾌활하고 자신만만했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사람들이 내게 말하길
내가 간수에게 말을 건넬 때
마치 내게 명령하는 권한이라도 있는 듯
거리낌 없고 다정하고 명쾌했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사람들이 내게 또 말하기를 
내가 불행한 날들을 견디면서
마치 승리에 익숙한 사람처럼 
옴츠러들지 않고 웃어가며 또 당당하게
불운한 날들을 견디어 냈다는데.
 
그렇다면 나는 정말로 남들이 말하는 바로 그런 사람일까?
아니면 내 자신이 알고 있는 그렇고 그런 사람일뿐일까?
새 장에 갇힌 새처럼 불안해하고 애타하고 나약하기 그지 없는,
누군가의 손이 나의 목을 조르고 있는 듯
숨가쁘게 몸부림치고 화려한 빛깔의 꽃과 새 소리를 갈구하며 친절한 말,
상냥한 몇 마디 말을 목말라하고,
사소한 모욕에도 분노로 치를 떠는,
그리고 기적과 같은 사건들을 간절히 바라고
멀어져 간 친구들을 그리워하다 속절없이 슬퍼하고
기도, 묵상, 글 쓰는 중에도 울적해지고 허탈해져서
무기력하게 그 모든 것과 이별할 채비를 갖춘 그런 존재.
 
나는 누구인가?
이런 사람인가, 저런 사람인가.
오늘은 이런 인간이고 내일은 저런 인간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위선자이고
혼자 있을 땐 한심스레 고통에 짓눌리는 약자(弱者)인가?
아니면 여전히 내 안에
이미 얻어낸 승리를 앞에 두고
오합지졸처럼 도망치는 패잔병 같은 무언가가 있는 걸까? 
 
나는 누구인가?
이 고독한 물음이 나를 비웃는다.
하지만 내가 누구이든, 하느님은 안다.
내가 당신의 것임을.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