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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4월 13일 야곱의 우물-요한 10, 1-10 묵상/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8-04-13 조회수915 추천수4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요한 10,1-­10)
 
 
 
 
작년 봄 성지순례 때 시리아·요르단 지역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차를 타고 이동할 때마다 끝도 없이 펼쳐진 광야를 지나갔는데, 우기가 막 지난 뒤여서인지 광야가 생각만큼 황량하지 않았습니다. 목초지에는 말로만 듣던 양 떼가 드문드문 무리 지어 풀을 뜯고 있었고, 베두인 목자들도 더러 보였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기에 딱 알맞은 평화로운 전경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이곳저곳을 바라보니 성경의 땅을 밟는다는 감회가 더욱 새로웠습니다.
 
일찍이 시편 저자는 목자와 양의 비유를 들어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묘사한 바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 우리는 그분 목장의 백성 그분 손수 이끄시는 양 떼로세”(시편 95,7), “당신 백성을 양 떼처럼 이끌어 내시어 광야에서 그들을 가축 떼처럼 인도하셨다.”(78,52) 이사야도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40,11)고 노래합니다. 하나같이 이스라엘 백성을 돌보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목자와 양의 비유는 네 복음서에 고루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에게 ‘진실로 진실로’(1절) 이르십니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1절) 문지기는 목자에게만 문을 열어줍니다(2절). 도둑은 정정당당하게 문을 통과할 수 없으니 버젓이 문을 두고도 부당한 방법으로 우리를 넘나듭니다.
양 우리에 접근하는 방법에 따라 목자인지 도둑인지가 판가름 납니다. 설령 양 도둑이 우리에 들어왔다 해도 양들이 먼저 낯선 자임을 알아차립니다. 양들은 자기들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는 목자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입니다(3절).
목자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라 목초지로 나가겠지만, 낯선 사람에게는 따라가기는커녕 피해 달아납니다(4­5절). 목자에게 길들여진 양들과 양들을 낱낱이 파악하는 목자 사이에는 깊은 신뢰가 자리하고 있어, 낯선 사람이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진정 안다는 것은 인격적 경험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양들은 자기 목자의 목소리에만 안심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알고 계십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개별적으로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그분께 소중한 존재입니다. 시편의 또 다른 말씀이 떠오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23,1­3)
아침마다 양 우리에서 벌어지는 뻔한 일을 비유로, ‘진실로 진실로’ 이르셨건만 ‘그들은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도둑’은 바리사이를 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6절의 ‘비유(pa퉛imiva)’는 공관복음의 ‘비유(pa퉍bolhv)’와 달리 수수께끼와 같아서 아무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긴 합니다. 요한복음은 이런 수수께끼나 상징을 즐겨 사용하여 하느님의 신비를 암시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올바로 이해하는 사람만 이 수수께끼를 풀 수 있습니다. 태생 소경의 치유에서도 바리사이들은 눈을 뜨고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듯이 이번에도 설명을 듣고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배척하려고 작정하였으니 보지도 듣지도 못할밖에요.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양들과도 비교됩니다. 그들은 백성들 지도자이면서 양 도둑처럼 양 떼의 안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7절) ‘문’을 드나들 수 있는 권리는 목자에게만 있습니다. 문을 통해 좋은 풀을 먹을 수 있고 안전한 양 우리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목자는, 양들이 아침이면 풀을 뜯으러 자유로이 나갔다가 저녁이면 휴식을 취하려 돌아오는 문 옆에서 양들의 출입을 안내합니다. 그래서 목자는 곧 문입니다.
 
목자보다 먼저 문 옆을 지키는 자는 역시 도둑이며 강도입니다(8절). 이번에도 양들이 먼저 그것을 알아차립니다. 예수님은 양들이 드나들도록 봉사하는 문과 같은 존재이십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9절) 문을 통해야 하느님의 사랑이 인간에게, 인간의 사랑이 하느님에게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거쳐야만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문은 생명을 주는 문입니다. ‘넘치는 생명’을 그분으로 말미암아 얻습니다. 이 충만한 생명은 신적 생명,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광야 시절 모세는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세우면서 이렇게 주님께 아뢰었습니다. “모든 육체에게 영을 주시는 주 하느님께서는 이 공동체 위에 한 사람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그들 앞에 서서 나가고 그들 앞에 서서 들어오는 사람, 그들을 데리고 나가고 그들을 데리고 들어오는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공동체가 목자 없는 양 떼처럼 되지 않게 하시기를 바랍니다.”(민수 27,16-­17) 이제 그런 목자로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도둑과 목자가 다르듯이 예수님은 유다 지도자들과 다르십니다. 잃어버린 양도 찾아 돌보는 어진 목자이십니다(16절).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도 내놓으십니다(15절). 우리를 안전하게 지킬 뿐더러 영원한 생명까지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바리사이들에게 가르침도 받지 않고 아무런 권한도 부여받지 않은 예수님이 그들한테는 이단자로 보였을 것입니다. 누가 진짜이고 누가 가짜일까요? 누가 도둑이고 누가 목자일까요? 목자와 양의 이야기는 예수님만이 양들의 안전을 지키는 문이며 양들을 목숨을 바쳐 보호하는 유일한 목자임을 선언합니다. 또한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문이 되어줄 것을 요구하십니다. 행여 남에게 도둑이거나 침입자이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강지숙(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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