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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목마르다."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08-03-22 조회수558 추천수2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8.3.21 주님 수난 성금요일 
                                                          
이사52,13-53,12 히브4,14-16;5,7-9 요한18,1-19,42

                                                           
 
 
 
 
 “목마르다.”
 
 


제가 좋아하는 미사경문 중 영성체 전 기도 한 대목입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주님께서는 성부의 뜻에 따라
  성령의 힘으로 죽음을 통하여 세상에 생명을 주셨나이다.”

죽음 앞에는 누구나 평등합니다.
세상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죽음의 신비를 밝히지 못합니다.
끊임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이지만,
강 건너 불을 바라보듯 남의 일처럼 실감하지 못합니다.
 
오늘 성 금요일은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는 날입니다.
죽음을 통해 세상에 생명을 주신 주님의 삶과 죽음이
우리 삶과 죽음의 신비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살아야 죽음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오늘 수난복음을 통해 환히 드러나고 있는 주님의 평소 삶입니다.
언젠가 갑자기 거룩한 죽음은 없습니다.
하여 베네딕도 성인은 물론 사막교부들의 한결같은 충고는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 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의 서두에서 주님은 성전 경비병들에게 거푸 물으십니다.

“누구를 찾느냐?”
성전 경비병들의 즉시 “나자렛 사람 예수요.”대답하자,
주님 역시 곧장 대답하십니다.
“나다.” 이 짤막한 대답이 저에겐 참으로 신선했습니다.

예수님의 뚜렷한 신원의식을 반영합니다. 평
소 당당하게 두려움 없이 살아오셨음을 반영합니다.
 
다음의 베드로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당신도 저 사람의 제자 가운데 하나가 아니오?”

문지기 하녀에 이어 사람들의 똑 같은 두 번의 물음에
베드로는, “나는 아니오.” 두 번이나 똑같이 부인합니다.
제자로서의 정체성의 혼란을, 나약한 인간성을 반영합니다.
 
과연 ‘나다.’와 ‘나는 아니다.’
두 대답 중 나는 어느 편에 속할는지요?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뚜렷한 신원의식이 있었기에
추호도 죽음 앞에서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다음 말씀이 이를 분명히 합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렇습니다.
진리를 증언하는 삶, 주님은 물론
우리의 존재이유이자 삶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진리는 무엇이요?” 빌라도의 어리석은 물음 같지만
우리 모두 자주 물어야 하는 참 중요한 질문입니다.
 
하느님이, 하느님의 생명과 사랑이 진리입니다.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하여 진리대신에 하느님을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나는 하느님을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증언하려고 왔다.”

예수님의 전 삶과 죽음이 진리이신 하느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통해
죄악과 거짓은 낱낱이 폭로되고 있습니다.
 
진리의 빛으로 오늘 수난 복음의 어둔 현장을 환히 밝히는 주님이십니다.
다음 주님의 두 임종어도 진리 증언에 투신했던
주님의 삶이 압축되어 있음을 봅니다.

“목마르다.” 와 “다 이루어졌다.”입니다.
진리를, 하느님을 목말라함은 영성생활의 시발점입니다.
 
‘목마르다.’와 ‘다 이루어졌다.’ 라는 두 말마디는
우리의 영성생활의 리듬입니다.
목말라야 ‘다 이루어졌다.’ 라는 고백도 나옵니다.
 
목말라 찾을 때 진리와 생명으로,
 당신 자신으로 채워주시는 하느님입니다.
 
이렇게 삶과 죽음을 관통해
‘하느님의 아들’로 사셨던 예수님을 히브리서 저자는
자랑스럽게 고백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혼자 겪는 고통이나 죽음은 너무 힘들고 위태합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합류시킬 때 구원입니다.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과 우리의 관계가 잘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 지셨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나의 고통과 아픔에 좌절할 게 아니라
십자가의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합류시킬 때 치유의 구원이요,
평화와 자유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유혹과 고통을 받으신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십자가의 주님께로 나아갑시다.
그러면 필요할 때에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을 것입니다.

언젠가 갑자기 선종은 없습니다.
일상의 크고 작은 순종을 잘해야 마지막 선종의 죽음입니다.
 
주님께 순종은 성숙을,
영성의 진위를 판가름하는 잣대입니다.
 
순종이 없는 영성은 잎사귀는 무성하나 열매 없는 영성이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겪음으로서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순종을 통해 완덕에 이르고 주님을 만납니다.
우리의 어렵고 힘든 삶의 현장은
바로 순종을 배워가는 하느님의 순종의 학교와 같습니다.
 
목마름을 해갈 시켜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주님께 순종하는 것뿐입니다.

영혼이 목마르십니까?
무조건 주님께 순종하십시오.
저절로 평상시는 물론이고 죽음의 순간에도
우리는 주님처럼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 이루어졌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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