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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08-04-06 조회수792 추천수19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08년 4월 6일 부활 제3주일 가해
 
 

He took bread, said the blessing,
broke it, and gave it to them.
With that their eyes were opened and they recognized him,
(Lk.24.30-31)

 

제1독서 사도행전 2,14.22ㄴ-33
제2독서 1베드로 1,17-21
복음 루카 24,13-35
 
 
어떤 어머니가 있었는데, 그녀는 자기 자녀가 꼭 올 백점을 맞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시험 때마다 자신도 잠을 자지 않으면서 공부를 시켰지요. 즉, 이 어머니의 행복은 아이가 올 백점을 맞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어머니가 있었는데요. 이 어머니는 60점 이상만 맞으면 괜찮다고 합니다. 대신 늘 하는 말은 ‘열심히 성당 다니면서 죄 짓지 말라’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이 어머니의 자녀는 그렇게 공부를 잘 하지는 못했지만, 어머니의 바램처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바르게 성장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어머니가 더 행복을 느끼면서 살까요? 당연히 후자의 어머니겠지요. 하나도 틀리지 않는 늘 올 백점을 맞기보다는 성당 열심히 다니고 바르게 사는 것이 더 쉬우니까요.

사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규칙을 낮출 필요가 있습니다. 즉, 우리 안에 있는 욕심들을 낮출 때 우리들은 행복을 마음껏 누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욕심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없애기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제 자신을 바라보면서도 얼마나 욕심이 많은지를 깨닫게 되니까요.

저는 하고 싶은 것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악기도 몇 가지 다루고 싶고, 새로운 운동도 몇 가지 배우고 싶습니다. 또한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을 공부하고 싶기도 합니다. 악기 다루고, 운동하고, 공부하는 것이 잘못된 것일까요? 그런데 어느 날 이런 것들도 욕심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것을 시작함으로 인해서 정작 중요한 것이 뒤로 미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새로운 일을 위해서는 때로는 가장 중요한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줄이더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바로 내 자신에게 있어서 뒷자리에 차지하게 되는 순간, 행복도 멀어지게 됩니다. 주님만이 참된 희망과 행복을 가져다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지 않았던 순간을 떠올려 보십시오. 진정으로 내가 행복했었는지를…….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려고 하는데, 우리가 주님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를 보십시오. 분명히 주님과 함께 걸어가고 있음에도 그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라고 단정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예수님이 없기 때문에 옆에 계셨음에도 알아볼 수 없었고, 예수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기보다는 우울히 고향 엠마오로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세상의 이것저것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정작 하느님께 대한 관심을 줄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서 참된 행복을 찾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하는 이들에게 당신의 일을 맡기시며, 당신의 사랑과 축복을 약속해주십니다.



나의 만족도를 조금만 낮추어 보세요.




필요한 만큼만(‘좋은생각’ 중에서)
 
유럽의 한 인류학자가 원시사회를 연구하기 위해 남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을 찾아갔다. 의식주를 모두 자급자족하는 이 부족은 다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평화로웠다. 그런데 원주민들은 생산성이 떨어지는 돌도끼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에 놀란 인류학자는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면 쇠도끼를 원주민들에게 나눠 주었다. 과연 학자의 말대로 쇠도끼를 사용하자 10시간 걸리던 일이 1시간에 끝났다.

그러나 한 달 뒤 인류학자는 원주민들의 행동에 분통이 터지고 말았다. 원주민들은 결코 10시간씩 일하지 않았다. 1시간만 일해서 쇠도끼를 사용하기 전과 똑같은 분량의 땔감만 얻을 뿐이었다. 인류학자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이 쇠도끼로 예전처럼 일한다면 열 배를 생산할 수 있는데 왜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쓰고 남은 건 팔아서 돈을 벌어야 합니다. 그 돈으로 다른 것도 사고, 저축을 해야죠.”

그 순간 원주민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우리는 재산을 소유하지 않아요. 재산을 만들면 틀림없이 누군가를 지배하려 할 테고, 누군가의 재산을 빼앗고 싶어질 테니까요.”

원주민들은 필요를 초과하는 생산물을 ‘나쁜 것’으로 여겼다. 인류학자는 비로소 다툼이 없는 사회를 이루고 사는 그 부족의 ‘지혜’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 지혜란 바로 ‘필요한 만큼만 생산함으로써 욕심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 이었다.
 
 
 
Heure Exquise(감미로운 시간) - Richard Abel
Westlife - Forever
 
조명연 마태오신부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 http://www.bbadaki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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