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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2월 30일 야곱의 우물- 마태 2, 13-15.19-23/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7-12-30 조회수411 추천수4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버리려고 한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헤로데가 죽자, 꿈에 주님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 요셉은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르켈라오스가 아버지 헤로데를 이어 유다를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다가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래아 지방으로 떠나, 나자렛이라고 하는 고을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이로써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마태 2,13-­15.19­-23)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12월이 되면서 거리는 온통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술렁거리고 덩달아 마음이 들뜨곤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교 국가가 아닌 우리나라에 미친 성탄 문화의 영향력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막상 교회의 성탄 축제가 시작되는 24일이 되면 세상의 성탄 분위기는 막을 내립니다. 예수님 탄생의 진정한 의미가 전달되지 않고 상업적이고 사치스런 분위기에 들떠 선물을 주고받는 것으로 끝난다면, 우리가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문화에 복음이 흡수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결손가정이 점점 늘어나는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다운 것인지를, 예수 탄생을 중심으로 빚어지는 일련의 사건들 속에 비쳐지는 요셉과 마리아의 신앙의 본보기를 통해 일깨움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 탄생의 과정을 엮어보면 요셉과 마리아는 희비의 반전을 거듭 겪게 됩니다. ‘좋은 일에는 흔히 방해되는 일이 많다.’는 ‘호사다마(好事多魔)’를 생각하게 합니다. 잉태를 둘러싼 요셉과 마리아의 고민이 풀리는가 싶었는데, 베들레헴 여관에 방이 없어서 해산이 임박한 마리아와 요셉은 다시 난감한 처지에 빠지고 결국 마리아는 아기를 낳아 썰렁한 구유에 눕히게 되지요(루카 2,1-­7).
 
동방에서 박사들이 와서 아기에게 경배하며 예물을 바치는 일이 있었는가 하면(마태 2,1-­11) 헤로데의 박해로 부모는 급히 이집트로 피난가야 했고(마태 2,13-­15), 이국 땅에서 적응할 만하니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머리 둘 곳도 없는’ 예수님의 앞날을 미리 보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 아기는 이집트 피난살이를 거쳐 모든 민족을 구해 낼 새로운 모세이기도 하지요.
 
가장인 요셉은 가족을 데리고 이스라엘로 돌아오지만 아르켈라오스가 아버지 헤로데를 이어 유다를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합니다. 이렇게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은 그들의 생사가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불안하고 긴장된 여정은 그들의 신경을 예민하고 날카롭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한테서는 불협화음보다는 일치된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요셉은 천사의 지시를 따르고, 마리아는 요셉의 결정에 순종하였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일어나 …`하여라.’고 지시하면 그는 즉시 따랐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찾는, 늘 깨어 준비하는 사람들로서 동방박사들처럼 믿음의 여정을 같이 가는 ‘도반’입니다.

요셉은 꿈쟁이입니다. 주님의 천사는 네 번이나 꿈을 통해 지시합니다. 우리도 매일 꿈을 꾸지만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혹 기억나더라도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느님께 민감한 사람이었습니다. ‘꿈’ 때문에 인생 역전이 거듭된 또 한 사람이 있지요. 구약의 성조 요셉입니다. 꿈 때문에 형들의 시기를 받고 이집트로 팔려갔고, 꿈 때문에 이집트 재상이 되기도 했던 그는 해몽도 잘하였습니다. 그는 이집트의 누구도 풀 수 없었던 꿈 해몽을 청하는 파라오에게 “저는 할 수 없습니다만, 하느님께서 파라오께 상서로운 대답을 주실 것입니다.”(창세 41,16) 하며 풀이하였고, 파라오는 그를 ‘하느님의 영을 지닌 사람’(창세 41,38)이라 했습니다. 두 요셉 모두 ‘하느님의 영을 지닌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계시를 알아듣는 귀를 가졌다고 하겠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사건마다 “이로써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덧붙이면서 구약 예언자들의 말씀이 바로 예수를 지칭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 마리아의 이름이 따로 언급되지 않고 마치 뗄 수 없는 지체처럼 ‘아기와 그 어머니’로 불립니다. 요셉이란 울타리 안에 아기와 그 어머니는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습니다.
 
마침내 동고동락하는 이 가족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ㄱ)라고 할 정도로 작고 이름 없는 고을 나자렛에 정착합니다. 아기 예수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는’(루카 2,40) 사람으로, ‘부모에게 순종하는’(루카 2,51) 사람으로 자랍니다. 얼마나 평범하게 자랐으면 고향사람들이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을 보고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며 믿음을 보이지 않았을까요.
 
수묵화처럼 담담하고도 여백이 있는 나자렛 생활입니다만 보물은 이름 없는 작은 고을의 평범한 일상 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나자렛의 삼십 년은 복음서에 숨어 있지만 굵고 짧은 공생활을 살 수 있게 한 기틀이었습니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에서 루게릭병으로 죽어가는 스승 모리는 애제자에게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법과 사랑받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나자렛의 가정은 예수께 사랑하는 법과 사랑받는 법을 가르친 훌륭한 학교임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을 품는 큰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작은 교회라 일컫는 가정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가르치는 학교여야 합니다. 부모의 신앙을 통해 ‘믿음’을 배우고, 동고동락하는 역경 속에서 ‘희망’을 배우고, 상호 존경하고 순종하는 모습을 통해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 성가정 축일을 지내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을 잃어버린 가정을 생각하며 안타까워합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이 함께 둘러앉은 따뜻한 밥상에서 오가는 사랑은 오늘날 제각기 밥 먹는 가정에서는 느껴보기 힘든 것입니다. “네 집 안방에는 아내가 풍성한 포도나무 같고 네 밥상 둘레에는 아들들이 올리브 나무 햇순들 같구나.”(시편 128,3) 예수께서 음식이 되심은 인류 사랑의 극치입니다. 성찬의 식탁 둘레에 모여 성체를 영하듯 밥상 둘레에 모여 함께 밥을 먹는 것은 가족 사랑의 극치라 생각됩니다.
 
우리의 밥상문화가 해체되면서 가정도 쉽게 깨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함께 밥 먹는 것도 어려운데 함께 기도하는 것이 쉬울까요? 밥상문화의 회복이 가정의 회복이라고 한다면 너무 비약적인 말로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기본적인 것이 되지 않으면서 성가정을 바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찌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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