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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성령강림 대축일 2012년 5월 27일)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2-05-25 조회수427 추천수4 반대(0) 신고

성령강림 대축일 2012년 5월 27일

 

요한 20,19-23. 사도 2,1-11.

 

성령강림 대축일은 예수님이 떠나가신 후, 성령이 우리에게 오셨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 우리는 제1독서로 사도행전이 전하는 성령강림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사실을 그대로 녹화하여 알리는 보도가 아닙니다. 초기 신앙인들 안에 일어난 변화를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설명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는 구약성서의 표현들을 빌려 꾸며졌습니다. ‘세찬 바람’, ‘소리’, ‘불’은 하느님이 나타나셨다고 말하는 표상들입니다. 사람들이 각자 자기 언어로 말하고, 청중이 각자 자기 언어로 알아듣는 것은 바벨탑(창세 11,1-9)의 이야기를 상기시킵니다. 그 이야기는 사람들이 모두 같은 말을 하면서, 하늘에까지 닿는 탑을 쌓아, 자기들의 이름을 날리며 살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하느님을 만들겠다는 시도였습니다. 창세기는 하느님이 그들의 언어를 서로 다르게 만들어, 그들을 사방으로 흩으셨다고 말합니다.

 

오늘 사도행전은 성령이 각 사람 위에 내려오시자, 사람들은 각자 자기 언어로 말을 하지만, 듣는 사람은 각자 자기 언어로 이해하였다고 말합니다. 성령은 인간 상호간에 차이를 만드시고, 그 차이는 인간 상호간에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인간 상호간의 차이는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의사소통을 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원활하게 의사소통 하는 사회가 인간을 존중하는, 풍요로운 사회입니다. 모두가 같은 말 할 것을 강요하는 사회는 인간 생명을 위축시킵니다. 성령은 인간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다양하게 의사소통하며, 풍요롭게 살도록 하십니다. 인간의 풍요로움은 인간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의사소통을 할 때 가능합니다. 그것은 자비와 용서가 있어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성령을 받으시오. 누구의 죄든지 그대들이 용서해 주면 용서받을 것이요,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숨을 불어넣는 것은 창세기 2장이 전하는 인간 창조이야기를 연상시킵니다. 창세기는 ‘하느님이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숨결을 불어 넣으셨다.’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그들에게 숨결을 불어넣는 것은 그들을 새롭게 창조하신다는 뜻입니다. 오늘 전례의 화답송에서 우리는 “주님, 당신 숨을 보내시어, 온 누리의 얼굴을 새롭게 하소서.”라는 시편을 기도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숨결이 오셔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어 자비와 용서를 실천하는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오늘 복음에 ‘죄를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말씀은 고해성사에서 고해를 듣는 사제가 죄를 용서해 줄 수도 있고, 용서 해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현행 고해성사가 의무 사항으로 채택된 것은 13세기(제4차 라테란 공의회, 1215년)의 일입니다. 그때까지는 교회 안에 여러 형태의 참회 절차가 있었습니다. 현행 개인고백 고해성사가 도입된 것은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엄청난 보속을 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게 하고, 또 임의로 심한 보속을 하지 못하게 보속을 정해주는 조처였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체험하게 하는 고해성사입니다.

 

오늘 복음이 ‘죄를 용서해 주면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시대 유대인들의 화법(話法)입니다. 긍정적으로 한 번 말하고 다시 한 번 부정적으로 말하여 강조하는 화법입니다. 복음서들 다른 곳에서도 발견되는 화법입니다. “믿고 세례받는 이는 구원받겠지만 믿지 않는 이는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는 말이 마르코복음서(16,16)에 있습니다. 이 말은 믿어서 구원받으라는 뜻입니다.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는 위협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용서받지 못한다.’, 혹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을 어떤 경우에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시대 유대교 기득권자들이 상투적으로 쓰던 말입니다. 그것에 반발하신 예수님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사람을 단죄하고 버리지 않으신다고 믿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도 원수까지 사랑하고, 자기에게 잘못한 이를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예수님은 가르쳤습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여러분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시오.”(루가 6,36). 예수님의 외침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죄의 용서라는 말로 요약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1,29)이라고 고백합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율법으로 사람들에게 죄의식을 심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죄의식에서 사람들을 해방시켰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신 것은 당신이 사라진 후에도 사람들을 죄의식에서 해방시킨 당신의 일을 계속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의 숨결을 그들에게 불어넣어 그들이 당신의 숨결로 사는 새로운 사람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영이 살아 계시면, 우리 주변 사람들이 어떤 자비를 체험할 것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영”(요한 15,26)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의 실천이 달라질 것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있는 우리의 삶입니다. 하느님이 자비로우셔서 있는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베풀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숨결이 우리 안에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성령강림 축일을 해마다 기념하는 것은 하느님의 숨결, 진리의 영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게 살자는 것입니다. 우리 서로의 차이를 풍요로움으로 보는, 자비하신 하느님의 시선을 우리 안에 살려내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숨결, 곧 성령이 우리 안에 가능하게 하는 일입니다. 자비롭게 또 은혜롭게, 우리 주변을 볼 수 있는 숨결로 살겠다는 마음 다짐을 하는 것입니다. 화답송에서 우리가 기도하였듯이, 하느님이 당신의 숨결을 우리 안에 보내시어 우리를 새롭게 하시도록 기도하는 날입니다. 다른 이들에게 우리의 뜻을 강요하면서 우리와의 차이를 극복하려 하지 말고, 우리 이웃의 말에 귀 기울이며, 우리의 차이를 다양함과 풍요로움으로 볼 수 있는 생명, 곧 숩결이 우리 안에 살아있도록 빌어야 할 것입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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