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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복음묵상[2005-04-03]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5-04-03 조회수1,061 추천수0 반대(0) 신고

토마스에게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 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토마스가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셨다.(요한 20, 27-28)
 
교회는 지난 2001년부터 매년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주일'로 정
 
해 기념하고 있지만, 아직도 자비주일이 왜 제정됐으며 어떤 의미가 있는
 
지 모르는 교우들이 적지 않은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지난 2000년 4
 
월30일 '하느님의 자비의 사도'로 알려진 복녀 마리아 파우스티나 수녀
 
(1905∼1938)를 시성하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특별히 기념할 것을 당부했
 
고, 이에 따라 교황청 경신성사성이 2001년부터 부활 제2주일을 자비주일
 
로 지내도록 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닌데 교
 
회는 왜 자비주일을 제정했을까요? 그것은 오늘날 사회가 '하느님의 자
 
비'를 필요로 하기 때문인데, 즉 세계 곳곳에서 기아와 빈곤에 시달리는
 
이들이 늘고 있고, 인간의 이기심으로 인한 분쟁과 폭력 등이 난무하는 현
 
실을 타파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한없는 사랑과 용서를 바탕으로 한 '자
 
비'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황은 특별한 체험을 통해 하느님의 자비
 
에 대한 신심을 널리 전한 폴란드 출신의 파우스티나 수녀를 새 천년기 첫
 
성인으로 선포하면서 하느님 자비를 이 시대가 새롭게 인식하며, 실천하
 
도록 요청한 것이고, 이에 따라 한국 교회를 비롯한 전세계 교회는 부활
 
제2주일 미사 때 입당송, 본기도, 영성체송, 영성체 후 기도를 하느님의 자
 
비를 기리는 고유기도로 바꿔 봉헌합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부활 사건과 부활예수 발현사화를 복음의 마지막 부분인
 
20장과 21장에 기록하고 있는데, 요한복음 21장이 초대교회 안에서 제고
 
되는 베드로의 역할을 교회론적이고 사목적인 측면에서 강조하기 위하여
 
추가로 편집되었다는 학자들의 통설을 따르면, 오늘 복음(20,19-31)이 요
 
한복음의 종결부분입니다. 20장은 다섯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①단
 
락(1-10절): 빈무덤 사화를 통한 예수부활사건. ②단락(11-18절):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예수의 발현. ③단락(19-23절): 부활예수의 제자들에 대
 
한 첫 번째 발현. ④단락(24-29절): 부활예수의 첫 발현 때 그 자리에 없었
 
던 제자 토마스의 불신앙과 이에 대한 두 번째 발현을 통한 부활확인. ⑤
 
단락(30-31절): 맺음말.
 
 
오늘 복음은 ③,④,⑤단락을 한데 묶어 놓았는데, 각 단락이 보도하는 내
 
용의 형식을 분석하여 본다면 ①,②,③.④단락은 직접화법을 사용한 상황
 
보도의 형식을 취하고 있고, ⑤단락은 단순설명의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
 
다. 전승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①과 ②단락이 같은 전승에 속하고, ③과
 
④단락은 앞선 부분(빈무덤 사화, 부활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만남)을 전
 
혀 고려하지 않은 독자적 전승에 속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에 요한복음의 저자가 의도하는 복음저술의 결론이 들어있다고 볼 수 있
 
는데, 저자는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
 
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30절)이 복
 
음서 저술의 목적임을 밝히면서, 이 목적을 토마스 사도의 불신앙이 신앙
 
에로 전환되는 사건에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복음서 저자는 결국 토마스
 
가 부활하신 예수 앞에 고백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이라는 신앙고백
 
이 예수를 직접 보지 않고도 복음말씀을 통하여 믿음을 가지는 모든 참 행
 
복자의 신앙고백이 되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토마스 사도의 생각과 말은 2000년 동안 세계의 역
 
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되풀이되었습니다. 토마스는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기 전에 예수님을 보는 것만으로도 부족하여
 
자기 손으로 직접 만져보고 믿겠다고 생떼를 쓰고 있는데, 이 모습은 오늘
 
을 살아가는 많은 현대인이 가지는 불신의 한 유형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즉, 예수의 신성? 성
 
서가 보도하는 기적들? 동정녀의 잉태? 죽음후의 영생? 육신의 부활? 등
 
등에 대하여 믿음보다는 의심을 가진 신자가 적지 않다는 말입니다. 대부
 
분의 신자들이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부분만을 믿고 그렇지 않은 부분들
 
에 대하여는 말하기를 꺼려하고 심지어는 거절하고 불신합니다. 그러나
 
토마스 사도는 달랐는데, 그에게 있어서는 어떠한 믿음의 조목이 문제시
 
된 것이 아니라 믿음 전체가 거꾸로 선 것입니다. 즉, 예수 전체가 문제였
 
던 것이죠. "예수가 살아 있느냐, 죽고 없느냐?" 에 토마스 자신의 모든 것
 
이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눈에 토마스는 우선 제자들 가운데 한 마리의 '미꾸라지'로 보이지
 
만, 그러나 잘 살펴보면 제자단에 미꾸라지는 더 많았습니다. 다른 제자들
 
이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보고 확인함' 없이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졌
 
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부활에 관한 신약성서의 증언들은 한결
 
같이 부활에 대한 의심을 믿음의 동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불신과 포기
 
와 절망에 빠진 제자들이 부활을 믿게 되는 것은 거의 모든 경우, 부활하
 
신 예수와의 만남을 통해서였습니다. 만남 없이는 3년 동안이나 예수를 따
 
랐던 제자들뿐 아니라 우리들까지도 믿는데 어려움을 가집니다. 사실 토
 
마스 사도의 생각이 옳습니다. 과연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전적으로 예수
 
의 부활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 모두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 바울로 사도의 신앙고백도 있지 않습
 
니까?(1고린 15,17)

오늘 복음이 전해주듯이 부활한 자는 불신자의 의심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토마스 사도는 '자신의 눈으로 예수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
 
고, 자기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 보고, 또 자기의 손을 예수의 옆구리
 
에 넣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지만 토마스는 부활예수를 자신의 손으로
 
확인하기 전에 '만남' 그 자체로 의심을 버리고 믿음을 고백합니다. 사실
 
을 보는 것이 믿는 것의 전부는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직접 보았지만 모두 그분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믿
 
음은 마치 수학공식이나 과학적 공리같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
 
는 확실한 증거 위에 세워지지 않습니다.
 
 
공식이나 공리 따위에는 인간의 자유가 차지할 공간은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오히려 보지 않고서도 믿는 자유와 신뢰와 희망으로 살았던 신앙
 
의 증인들 위에 서있습니다. 그 증인들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마태
 
28,20)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들의 삶을 통하여 만나고, 체험한 사람들입
 
니다. 한때 불신의 '미꾸라지'였던 토마스나 다른 사도들이 공동체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졌듯이, 우리도 믿음의 교회 공동체 안
 
에서 인류를 위해 바쳐진 몸으로 계신 그분을 만나고 체험하게 될 것입니
 
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과 성사로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만나고 체험할 수 있도록 오늘도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출처: 단순한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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