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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님 흉내내기 <7회> 두개의 주머니 - 박용식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7-12-11 조회수882 추천수11 반대(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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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주머니


 

   그리스 신화에 '두 개의 주머니'라는 이야기가 있다. 창조주와도 같은 신(神) 프로메테우스는 사람을 만들 때 머리에 두 개의 주머니를 달아 놓았다. 남의 결점이 들어 있는 주머니는 몸의 앞쪽에 매달고, 자신의 결점이 들어 있는 주머니는 뒤쪽에 매달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의 결점은 잘 보지만, 자기의 결점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신다. "너는 형제의 눈 속에 든 티는 보면서도 어째서 제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가6,41)라고 자신의 단점을 잘 못 보면서 이웃의 단점을 잘 보는 사람을 야단치신다.


  얼마 전부터 눈이 나빠졌다. 신문이나 작은 글씨는 돋보기를 써야 하고 돋보기가 없으면 책을 멀리 보아야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남의 결점을 보는 눈도 나빠져서 전보다 남의 단점을 잘 못 본다. 전에는 누군가 잘못하면 즉시 밝고 선명하게 눈에 띄어 단죄하고 무시했는데 이제는 좀 더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이제는 용서하려고 노력하는 걸 보면 분명히 남의 잘못을 보는 눈이 나빠진 것이다.


   반면에 마음의 눈은 좋아졌다. 사람을 보는 눈이 좋아진 것이다. 전에는 사람을 볼 때 그 사람 안에 있는 좋은 것이 잘 안 보였는데 이제는 좋은 것이 전보다는 잘 보인다. 나쁜 점보다는 좋은 점을 볼 수 있는 눈이 전보다는 밝아진 것 같다. 다른 사람을 볼 때 뿐 아니라 내 자신을 볼 때도 잘 안 보이던 것이 지금은 잘 보인다. 내 안에 있는 단점, 부족한 점, 고쳐야 할 점이 전에는 잘 안 보였는데 지금은 잘 보인다. 그러니까 분명 내 마음의 눈은 좋아진 것이다. 다행이다. 몸의 눈이 나빠지는 것만 해도 서러운데 마음의 눈까지 나빠진다면 더 속상할 일이다.


   그런데 나는 신기한 것 하나를 발견하였다. 이웃의 좋은 점을 보는 눈과 자신의 나쁜 점을 보는 눈은 비례하고, 이웃의 나쁜 점을 보는 눈과 자신의 나쁜 점을 보는 눈은 반비례한다는 사실이다. 즉 이웃의 좋은 점을 잘 보는 사람은 자신의 단점도 잘 보고 이웃의 나쁜 점을 잘 보는 사람은 자신의 나쁜 점은 잘 보지 못한다는 사실 말이다.


   장애인들은 한쪽 기능이 없어지면 다른 기능이 강해진다고 한다. 눈이 먼 사람은 귀가 대체적으로 밝다. 귀가 먹은 사람은 눈이 밝아진다. 그것처럼 자신의 나쁜 점을 잘 보는 사람은 그 대신 이웃의 나쁜 점을 잘 듣는다. 자신의 단점을 충고하는 말을 잘 못 듣는 사람은 그 대신 이웃의 단점을 잘 본다.


   재판을 하는 법정에는 서로 다른 세 부류의 사람이 죄인 앞에 나온다. 죄의 결과만을 보고 준엄하게 단죄하는 검사와 정상을 참작해서 용서하자는 변호사와 죄를 공정하게 판결하는 판사가 있다. 검사의 역활은 가능한 한 범죄 사실을 낱낱이 수사하여 빠짐 없이 처벌하려는 사람이다.


   변호사는 결과 자체만을 보지 않고 정상을 참작해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당시 상황을 최대한 좋게 말한다. 그리하여 가능한 한 죄가 없음을 증명하려 하고 혹 죄가 있다면 죄를 가볍게 하려고 갖은 노력을 한다. 가능한 한 좋은 점만을 보며 좋게 생각하여 판사에게 선처를 부탁한다.


   판사는 검사와 변호사와의 서로 다른 의견을 충분히 듣고 나서 객관적이고 공평하게 판결을 내리려 한다. 없는 죄를 뒤집어씌워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있는 죄를 없다고 허거나 무거운 죄를 가볍게 만들지 않도록, 그야말로 공정하게 사실에 입각해서 진실대로 처리하려 한다. 그래서 검사가 10년 징역을 구형하고 변호사가 무죄를 주장하면 판사는 2~3년을 선고하기도 하고 집행유예 등을 언도하기도 한다.


   법정에서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항상 일어난다. 어떤 사람은 이웃을 볼대 검사처럼 결과만 본다. 그리고 이웃의 단점과 결점만을 들추어 내고 그렇기 때문에 나쁘다고 판단한다. 어떤 사람은 변호사처럼 이웃을 볼 때 좋게 본다. 혹 나쁜 결과가 생겨도 정상을 참작하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을 고려하여 좋게 보아준다. 어떤 사람은 판사처럼 객관적이고 진실되게 사건을 판단하고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한다. 사실보다 더 나쁘게도 보지 않지만 그렇다고 좋게 보지도 않는다. 나쁜 점만을 들춰내지도 않지만 좋은 점을 찾으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어디에 속하는가? 검사처럼 이웃을 보는가? 변호사처럼 보는가? 아니면 판사처럼 보는가?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제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도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더러 '네 눈의 티를 빼내주겠다'고 하겠느냐?"(루가 6,42)

 

                                 

              - 박용식 신부 수필집 / 예수님 흉내내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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