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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481) 제6처 베로니카 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림을 묵상합시다.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10-03-08 조회수426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0년3월8일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천주의 성 요한 수도자 허용 - 열왕기 하 5,1-15ㄷ;루카4,24ㄴ-30 -
 
 
 
 
(481) 제6처 베로니카 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림을 묵상합시다.
                                                                                           이순의
 
 
일반적인 시각으로는 제6처 앞에 서면 베로니카가 되어 상대방의 얼굴을 닦아 주는 관점에서 묵상을 하게 된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관점에서 닦임을 받는 은혜에 대하여 묵상하는 경우보다는 내가 누군가에게 또는 내 앞에 있는 예수를 외면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런데 받은 것이 많은 사람의 입장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입장에서 내가 어렵고 고통스러울 때, 수 없이 나를 닦아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일으켜 세워주신 은혜에 대하여 생각해야한다. 그 은혜를 잊어버릴 수가 없는!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심장에 문신처럼 새기며 살아간다. 나는 한때 성당의 의자에만 앉으면 나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들의 채무를 갚고 죽게 해 달라고 기도했었다. 아무리 계산을 해 보아도 내가 살고 있는 집의 보증금에 숟가락 젓가락이랑 다 팔아서 보태어도 내가 진 빚을 갚을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성당의 감실 앞에만 앉으면 나를 도와주신 분들에게 부채를 갚고 죽을 수 있게 해 주시라는 기도가 애원으로 읊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이승의 채무가 저승까지 연결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 죽은 후에 나를 도와주신 분들이 감당해야할 고통을 외면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 요청하기를 제가 가진 것이 제가 갚아야할 액수 만큼이라도 되게 해 주시라고 빌었었다. 그렇게라도 해 주신다면 남의 가슴에 못은 박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가난을 살아본 나의 절박함은 그랬다. 자기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자기 삶이 궁핍한 사람의 가슴은 늘 소금에 절인 것처럼 쓰라리게 되어있다. 채찍으로 맞아야만 쓰린 것은 아니었다. 무거운 나무로 십자가를 짜서 등짐으로 지고 있어야만 무거운 것은 아니었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극심한 무게에 짓눌려 사는 것이 가난이었다. 그냥 아무런 심정을 끌어들이지 않는 무심이라 해도 하루의 삶이 두려운  것은 가난이었다. 그러다가도 남들이 볼 새라 눈치 챌 새라 기본 자존심이라도 꺾이지 않고 세워보려 몸부림하며 사는 것이 가난이었다.
 
그리고 얻은 것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고 피땀 흐르며 십자가 지고 가시는 골고타 언덕길에서 만난 베로니카의 마음이었다. 조롱과 비난과 야유의 군중 앞에서도 그 온정의 마음으로 꿋꿋이 수건을 든 베로니카의 마음을 예수님의 눈으로 보게 된 것이다. 짝꿍이 가진 돈을 모두 떼이고 그놈을 잡아 죽이고야 말겠다고 제 정신을 놓고 황야를 누빌 때, 정말이지 어데 옆집에 가서 돈 500원도 빌려달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갚을 길이 없으니 당연히 빌려줄 사람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살아보라고, 살아봐야 되지 않겠느냐고,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그날 그 전화를 끊고 예수님의 얼굴을 씻어주신 베로니카를 생각해 낸 것이다. 주님께서 응고된 핏덩이에 난자당한 지경에 이른 상태에서 베로니카를 바라보시며 느끼셨을 그 심정이 이러 했을까?! 얼마나 고마웠을까?! 얼마나 미안했을까?! 얼마나 은혜로웠을까?!
 
그날부터 나는 예수가 되었고, 나를 일으켜 세워주신 분은 베로니카가 되었다. 다만 나는 예수님처럼 전지전능하지를 못하다는 점이 애통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서 늘 떼를 쓰며 살았던 것 같다. 
<주님, 제게는 주님과 같은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저의 베로니카에게 줄 것이 있습니다. 제가 줄 수 없는 것을 주님은 주실 수 있습니다. 꼭 주십시오. 제가 죽기 전에 다 갚고, 다 채워드리게 해 주십시오. 저로 인하여 그 선행이 헛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저보다도 전능하신 분께서 더욱 그 마음을 알고 계십니다. 저의 베로니카가 아니라 주님의 베로니카입니다. 주님의 뜻 가운데서 다 이루어지소서. 아멘> 
참으로 절박하고 가식 없는 기도로 하루하루를 주님께 매달려 살았었다. 나에게 의지가 오직 주님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의 신비는 나에게 예수님의 자리만 체험시켜 주시지는 않았다. 나에게도 베로니카의 자리를 내어주셨다. 나에게 맞는 베로니카의 자리도 항상 그 십자가의 길에서 동행하고 있었다. 나에게 수건을 내밀어 주는 베로니카가 아니라 내가 베로니카가 되어 수건을 들고 서서 누군가의 얼굴을 닦아줘야 하는 그 친절한 몫이 나에게도 있었다. 내 눈에서 눈물 나니까 남의 눈에서 나는 눈물을 닦아줘야 한다고 생각했었던 것들! 이 묵상을 쓰기로 하면서, 늘 받은 내 입장의 베로니카만 생각하다가 내 안에서도 준 것이 있는 베로니카를 발견하게 된다. 나는 받고만 살았는가? 나는 얻고만 살았는가? 나는 빌리고만 살았는가? 내 기억에 너무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 가난이 닦임을 받는 예수님이었기 때문에 준 것이 없는....... 무력한 나만을 염두에 두고 살아왔을 것이다. 지난 세월동안 그만큼 내 얼굴을 닦아주신 베로니카에게 갚을 길을 주시라는! 꼭 갚게 해 주시라는! 애원!
 
그런데 지금은 그런 기도를 하지 않는다. 내가 돈이 많아져서가 아니다. 내가 진 부채보다 내가 가진 것들이 모자라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는 주시는 대로 받기로 한다. 저 죽기 전에 남의 눈에 눈물 나지 않게 해 주시라는 기도 대신 주신만큼 감사드리는 기도를 드린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제 십자가를 지고 그 길을 가야하는 입장이 되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제 아무리 잘났다는 사람도 들여다보면 내막이 있게 마련이고, 아무리 못났다는 사람도 들여다보면 거기서 거기인 사람의 모습이지 않겠는가?! 그만큼 인간의 고뇌는 다양하고 깊은 시련을 내포하면서도 공통적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열등한 순간의 나를 들추기보다 월등한 순간의 나를 부각시키려 한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가르치시고자 한 것이다.
 
월등한 주님께서 열등한 사람이 되셔서 베로니카의 도움을 받고 감사하는 모습을 가르치시고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님의 얼굴을 닦아 드리는 베로니카가 되어 누군가 아픈 사람의 얼굴을 닦아주는 모습으로 신앙심을 고취시키려 한다. 물론 그 관점의 신앙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한 번쯤은 주님의 얼굴을 닦아주신 베로니카에게 감사하는 예수를 발견해야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작은 감사를 배려하지 않는지 모른다. 그토록 거창한 십자가의 길에서 베로니카의 수건은 매우 하찮은 순간이다. 그 작은 순간의 감사를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신다. 사소한 것이라도 그 은혜가 어떠한 것인지 빠뜨리지 말고 기억하라고 권고하시는 것이다. 내가 남에게 주는 것 보다 더 인색한 것이 내가 남에게 받은 것에 감사하는 일일 것이다. 사람은 삶 안에서 받은 것보다 받지 못한 것을 손가락에 더 많이 꼽으며 산다. 그것이 사람의 근본에 깔린 욕심이다.   
 
아마도 사랑이신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길목에서 나에게 깊이 새겨 가르칠 것이 있으셨나보다. 가난이 죄였으니....... 그 길목에서 만난 수많은 베로니카들을 기억하라는! 그리고 잊지 마라는 명령을 하시고 싶으셨던가 보다. 돌아보면 눈물이 날 만큼 애절하고 절박하다. 새겨보면 뼈가 시리도록 힘들고 외롭다. 그 고통은 누구도 같이 동행해 줄 수 없는 슬픔이다. 세상은 나를 외면하였고, 시동생들은 벌떼 같은데 짝꿍은 생활을 잊어버렸다. 이런 순간을 맞아 본 사람들이 어데 한둘이겠는가?! 이런 순간에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좌절과 포기뿐이질 않던가?! 배신감과 모욕감! 원망과 복수심! 그에 반하여 자살이라는 충동! 내가 언제 주님을 믿었더라는 말인가?! 내 믿음이 언제 온전하였더라는 말인가?! 한없는 부끄러움과 끝없는 죄책감에 빠져 취해있어야만 하는! 절망한 나의 인간성이라는 술독에서 허우적거리는 소용돌이만이 망각이라는 최면을 걸어주지 않았던가?! 몽유병자처럼 터벅터벅 걸어서 대성당의 맨 앞자리에 발라당 드러누워 한참을 자고 일어났다.
 
정신이라도 들면 감시 카메라에 찍혔을지도 모르는 나의 모습을 보고 계실 신부님들을 의식하기도 한다. 그러나 또 절망한 나의 인간성이라는 술독에서 허우적거릴 때면 망각이라는 최면에 이끌려 터벅터벅 걸어서 흐린 대성당의 맨 앞자리에 홀로 눕는다. 내가 쉴 곳이 그 곳뿐이었을 것이다. 그곳이 나의 베로니카가 되어 내 눈물과 내 근심을 닦아주지 않았던가?! 자비로우신 주님! 사랑의 주님! 좋으신 아버지 하느님! 그리고 그 후로 나는 많은 베로니카를 만난다.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 길 앞에서 수건을 들고 기다리는 베로니카들! 커다란 타올에서 부터 작은 손수건까지 들고 서서 나를 위로하려는 수없이 많은 베로니카를 발견하게 된다. 아니다. 훨씬 더 오래 전부터 수건을 들고 나의 얼굴을 닦아주었던 베로니카를 그동안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준 것은 있는데 받은 것이 없다고 우기는 입장이라는 욕심이 가득하여 감사한 눈을 가지신 예수님이 되어보지 못했던 것이다.
 
<가난이 죄였습니다. >
그 가난의 죄가 나로 하여금 십자가 길목에서 은혜의 절정인 베로니카의 수건을 발견하게 한 것이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은혜입니다.
은혜입니다.
숨 한 모금도 감사합니다.
물 한 방울도 감사합니다.
곡식 한 포기도 고맙습니다.
동전 한 닢도 고맙습니다.
당신이 내 곁에 있어서 은혜입니다.
내가 당신 곁에 있게 해 주셔서 은혜입니다.
 
시련의 승리는 이런 것이었다. 내 눈이 예수님의 눈이 되고, 내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너도 어려웠을 텐데, 너도 두려웠을 텐데, 너도 힘들었을 텐데, 이렇게 수건을 들고 내 얼굴을 닦아주느냐? 고, 이 감사를 내가 어찌 갚아주면 좋겠느냐? 고, 정성을 다해 은혜를 헤아려 담을 것이다. 가난을 살아본 사람의 가슴이 늘 소금에 절인 것처럼 쓰릴지는 몰라도 무거운 나무 십자가를 등짐으로 진채 응고된 핏덩이를 치유 받는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을 받아들인다. 
<베로니카야 고맙다.>  
 
 
이제는 성당의 의자에만 앉으면 나의 채무를 갚고 죽게 해 달라고 떼를 썼던 기도를 하지 않는다. 내가 부자가 되어서가 아니라 내가 가진 것들이 모자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얻고 받은 것이 많았던 사람의 입장은 내가 어렵고 고통스러울 때, 수 없이 나를 닦아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일으켜 세워주신 은혜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그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게 해 주시라고!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고! 심장에 문신처럼 새기며 살아가야 한다. 나는 그만큼 받은 것이 많은 사람이다. 오히려 지금의 눈은 더 밝아져서 풍성한 은혜와 넘치는 감사에 마음을 쏟고 있다. 좀 더 일찍 그렇게 많았던 베로니카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살아 온 세월들에 부끄러움과 후회를 통감할 뿐이다. 
†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를 용서하소서.
◎아멘. 
 
-그리하여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이 일러 준 대로, 요르단 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담갔다. 그러자 그는 어린아이 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다. 열왕기 하5,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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