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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어린이에게 필요한 것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10-08-14 조회수426 추천수4 반대(0) 신고
그때에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마태오 19:13-15)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을 유난히 사랑하셨다. 그러나 어른들은 어린이들이 예수님이나 하느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어린이들이 유아세례를 받도록 하지 않고 크고 나서 원하면 주님을 스스로 택하게 하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종교의 자유를 생각하여 그렇게 하는 경우가 많다.
 
주님께서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특별히 좋아하셨다.
어린이, 젖먹이는 아주 가난하다. 이들은 나이가 어리고(가난하고), 성숙하지 못했으며(가난하며), 저항할 힘도 없다. 이 때문에 가톨릭 교리에서는 우리의 ‘어머니’인 교회가 부모들이 아이들이 성령을 받고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도록 가급적이면 빨리 세례를 받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부모가 많지 않다. 많은 부모들은 아이들이 다 크고 나서 스스로 종교를 선택하도록 하고 있다. 아이들이 무엇을 먹는지 한 번 생각해보자. 아이들은 자신의 기호(嗜好)와 상관 없이 어머니가 주는 것을 먹는다. 아이들이 쓰는 말도 그렇다. 아이들은 부모가 쓰는 말을 그대로 배운다. 학교에 가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들이 원하는 학교는 생각하지 않고 부모가 선택하여 보낸다. 예수님도 성모 마리아가 주시는 것을 먹으셨고 부모가 쓰는 말을 쓰셨고 종교도 부모가 믿고 있던 유대교를 믿으셨다. 나중에 어른이 되고 나서 새로운 종교를 만드셨으나 처음에는 부모의 종교를 따르는 것이 당연했다.
 
생 텍쥐페리의『어린 왕자』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여섯 살 적에 나는 『체험한 이야기』라는 제목의, 원시림에 관한 책에서 기막힌 그림 하나를 본 적이 있다. 맹수를 집어삼키고 있는 보아 구렁이 그림이었다. 위의 그림은 그것을 옮겨 그린 것이다. 그 책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보아 구렁이는 먹이를 씹지도 않고 통째로 집어삼킨다. 그리고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여섯 달 동안 잠을 자면서 그것을 소화시킨다.’ 나는 그래서 밀림 속에서의 모험에 대해 한참 생각해 보고 난 끝에 색연필을 가지고 내 나름대로 내 생애 첫 번째 그림을 그려보았다. 나의 그림 제 1호였다. 그것은 이런 그림이었다. 나는 그 걸작품을 어른들에게 보여 주면서 내 그림이 무섭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모자가 뭐가 무섭다는 거니?’하고 대답했다 내 그림은 모자를 그린 게 아니었다. 그것은 코끼리를 소화시키고 있는 보아 구렁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른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보아 구렁이의 속을 그렸다. 어른들은 언제나 설명을 해주어야만 한다. 나의 그림 제 2호는 이러했다. 어른들은 속이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하는 보아 구렁이의 그림들은 집어치우고 차라리 지리, 역사, 계산, 그리고 문법 쪽에 관심을 가져보는 게 좋을 것이라고 충고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여섯 살 적에 화가라는 멋진 직업을 포기해 버렸다. 내 그림 제 1호와 제 2호가 성공을 거두지 못한 데 낙심해 버렸던 것이다. 어른들은 언제나 스스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자꾸자꾸 설명을 해주어야 하니 맥 빠지는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다른 직업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된 나는 비행기 조종하는 법을 배웠다. 세계의 여기저기 거의 안 가본 데 없이 나는 날아다녔다. 그러니 지리는 정말로 많은 도움을 준 셈이었다. 한번 슬쩍 보고도 중국과 애리조나를 나는 구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밤에 길을 잃었을 때 아주 유용한 일이다 나는 그리하여 일생 동안 수없이 많은 점잖은 사람들과 수많은 접촉을 가져왔다. 어른들 틈에서 많이 살아온 것이다. 나는 가까이서 그들을 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 대한 내 생각이 나아진 건 없었다. 조금 총명해 보이는 사람을 만날 때면 나는 늘 간직해 오고 있던 예의 나의 그림 제 1호를 가지고 그 사람을 시험해 보고는 했다. 그 사람이 정말로 뭘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인가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으레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모자군’ 그러면 나는 보아 구렁이도 원시림도 별들도 그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가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했다. 브리지니 골프니 정치니 넥타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어른은 매우 착실한 청년을 알게 된 것을 몹시 기뻐했다.”
 
어른들은 어린이에 대하여 별로 아는 것이 없다. 그런데도 어린이들에게 가르치고 설명하려고 드는 것은 어린이들에게는 정말로 따분한 일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오 18:3-5)
 
어린이들은 어른에 비하여 지식은 별로 없다. 그러나 어른들이 생각하지도 못하는 많은 것을 안다. 지혜는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말한다. 이런 면에서 어른들은 지식은 많지만 지혜가 부족하다. 어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은 편견과 선입관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에 대하여 감사할 줄 모른다. 언뜻 보아도 믿음에 역행하는 행동이다. 우리는 지능의 선물과 그것을 사용하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
우리의 지능은 에고의 왕궁으로, 장벽을 단단히 쌓아 방어하려고 한다.
우리는 현실에 반응하기보다는 과거에 축적한 지식을 통하여 행동하는 수가 많다. 과거에 쌓아둔 편견과 선입관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수가 많다. 그리하여 아이들에게도 사랑의 미명(美名) 하에 그 편견과 선입관을 주입시키려고 한다. 하느님께서 ‘사랑’이라는 선물을 주셨는데 그 ‘사랑’을 가르쳐주지 않고 이기적으로 사는 방법만 가르친다.
프랑스의 신비주의자 쟌느 귀용 부인(Mde Guyon, 1648-1717)이 말했다.
어린이들은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하지 않으며 의심을 잘 하지 않으며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는 일이 드뭅니다. 그들은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성령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기 중심적이고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어른들은 하느님의 역사(役事)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아시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마더 데레사가 있었듯
남미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카마라(Dom Helder Camara, 1909-1999) 대주교가 있었다. 그는 브라질의 가난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곤궁에 처한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분명한 목소리와 글로써 봉사하였다.
카마라 주교가 말했다.
나는 때때로 가톨릭신자만이 구원을 받게 된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신자들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가톨릭 신자나 개신교 신자들을 골라 뽑으셨기 때문에
성령이 그들에게 머물고 그들 안에서 숨쉬고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만 구원을 받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당치도 않습니다.
사랑과 도움에 굶주리고 목말라 하고,
에고에서 떠나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떠나려고 애쓰고, 이웃을 돌보려 하고,
양심의 소리를 들으려 하고, 선한 일을 하려고 애쓰는,
세계도처에 있는 이런 사람들에게는 종교와 관계 없이
모두 하느님의 성령이 함께 하고 계십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동양에서 그리고 서양에서 올 것이다.’는 주님의 말씀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집에서 몇몇 가톨릭 신자들과 불교의 일부 신자,
유대교의 일부 신자, 이슬람교의 소수의 신자,
개신교의 일부 신자들만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카마라 주교의 말대로라면 우리들 조상의 대부분은 연옥이나 지옥에 있을 것이다.
재물이라는 우상을 섬기고 탐욕에 빠져 있거나 쾌락만을 추구하며 ‘사랑’을 실천하지도 못했고 자식에게 ‘사랑’을 가르쳐주지도 못했기 때문이리라.
 
어느 날 저녁에 영국의 여류작가 챔퍼나운(Irene Champernowne, ?-1976)이 바닷가를 걷고 있었는데 어린이들이 날지 못하는 갈매기에게 돌을 던지고 있었다. 그녀는 멈추어 서서 상냥하게 말했다. “그 불쌍한 갈매기는 많이 다쳤나 봐.” 그녀는 어린이들에게 사람들이 다쳐있는데 더욱더 상처를 입히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물었다. 약 30분 후 그녀가 산책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아이들이 다친 갈매기에게 먹이를 주고 밤을 새울 집을 지어주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뻤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비평가였던 조세프 주버(Joseph Joubert, 1764-1824) 어린이들에게는 꾸짖음이 아니라 본보기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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