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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산(孤山)과 다산(茶山) 6 -교훈 편
작성자배봉균 쪽지 캡슐 작성일2007-01-21 조회수910 추천수9 반대(0) 신고

 

 

 

 

 고산(孤山)과 다산(茶山)  6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에 대하여 공부하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 째,  유배생활(流配生活)을 하면서 처음에는 안절부절 못하고 화를 삭이던 선비들도 얼마 후에는

 

          안정(安靜)을 되찾아 동네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자기(自己)의 억울한 심경(心境)을

 

          토로(吐露)하거나 님(임금)을 향(向)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을 노래하는 시가(詩歌)를 지으며

 

          조용히 살게 됩니다. 당쟁(黨爭)의 산물(産物)인 사대부(士大夫)들의 쓰라린 유배생활 감정(感情)을

 

          표출(表出)한 가사(歌辭)를 유배가사(流配歌辭)라 하고 그 외의 모든 글들을 합(合)하여 유배문학

 

          (流配文學)이라고 합니다. 유배가사의 효시(嚆矢)는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連累)된 조위(曺偉)가

 

          유배지(流配地)인 순천(順天)에서 지은 만분가(萬憤歌)입니다. 작품(作品)의 내용(內容)을 보면 작자

 

          (作者)가 사화(士禍)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귀양살이를 하게 된 비분강개(悲憤慷慨)한 심정(心情)을

 

          임금인 성종(成宗)에게 토로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후대(後代)에 지어지는 유배가사의

 

          일종(一種)인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등 송강가사

 

          (松江歌辭)에도 크게 영향(影響)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듯 유배문학(流配文學)의 효시(嚆矢)인

 

          조위(曺偉)의 만분가(萬憤歌)와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등

 

          송강가사(松江歌辭) 등이 자기(自己)의 억울한 심경(心境)을 토로(吐露)하거나 어찌보면 간지러울

 

          정도로 님(임금)을 향(向)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을 노래하는 시가(詩歌)가 주류(主流)를 이루었던

 

          반면(反面), 고산(孤山)의 대표작(代表作) ‘오우가(五友歌)‘와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등은 자연

 

          (自然)을 벗 삼아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 한글의 서정적(抒情的) 아름다움을 개척(開拓)한 순수문학

 

          (純粹文學)으로서 국문학사(國文學史)에 빛나는 주옥(珠玉)같은 걸작품(傑作品)이며, 다산(茶山)의

 

          길고긴 18년간의 유배생활(流配生活) 동안 남긴 대표작(代表作) 일표이서(一表二書)인 목민심서

 

          (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경세유표(經世遺表) 등 500 여권은 하나같이 경전(經典)의 새로운

 

          해석(解釋)과 국가이익(國家利益)과 발전(發展)을 위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로써 백성들의 삶의

 

          질(質)을 높이려는 불후(不朽)의 명저(名著)들입니다.

 

 

 

둘 째,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혈연적(血緣的)으로 남이 아니라는

 

          사실(事實)입니다. 다산의 어머니는 해남(海南) 윤(尹)였습니다. 해남 윤씨는 조선(朝鮮)에서 알아주는

 

          명문(名門)의 집안이었습니다. 윤씨의 인물(人物) 중 가장 유명(有名)한 분이 고산(孤山) 윤선도

 

          (尹善道)였고, 그 다음으로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를 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재는 조선의 삼재

 

          (三齎, 공재 윤두서,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화가(畵家)로 널리 알려진 분입니다. 고산의 증손(曾孫)이

 

          공재요, 공재의 손녀(孫女)가 다산의 어머니 윤씨였습니다. 그렇다면 고산은 다산의 6대조 외할아버지

 

          가 되는 것입니다. 공재는 다산의 외증조부(外曾祖父)입니다. 그리 보면 다산의 문재(文才)와 그림솜씨

 

          가 외가 쪽 할아버지들인 고산과 공재의 유전적(遺傳的) 재질(才質)도 절반정도 계승(繼承)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산의 친가(親家)는 어떤 가문일까요. 8대 옥당(玉堂, 홍문관) 집안이자 9대

 

          옥당 집안이라고 자랑하던 집안입니다. 다산의 12대 할아버지인 정자급(丁子伋)이라는 분이 조선왕조

 

          (朝鮮王朝) 초기(初期)에 벼슬하여 옥당에 들어가, 이후(以後) 5대조 정시윤(丁時潤)에 이르기까지

 

          내리 8대에 이르도록 옥당의 벼슬을 지낸 명문(名門)이라는 뜻입니다. 다산의 고조부(高祖父)의

 

          아우가 옥당벼슬을 지내서 9대 옥당집안이라고도 합니다.  다산 자신(自身)도 홍문관 교리를 지내

 

          옥당벼슬을 하였으니 대단한 가문(家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선조(先祖)

 

          중에 한 사람만 옥당에 들어가도  ‘옥당집’이라는 아름다운 호칭(呼稱)을 얻기 마련인데 연달아

 

           8~9대가 옥당의 벼슬을 지냈다면 대단한 집안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셋 째,  유배문학(流配文學)의 효시(嚆矢)인 조위(曺偉)의 만분가(萬憤歌)와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사미인곡

 

          (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등 송강가사(松江歌辭) 등이 자기(自己)의 억울한 심경(心境)을 토로

 

          (吐露)하거나 어찌보면 간지러울 정도로 님(임금)을 향(向)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을 노래하는 시가

 

          (詩歌)가 주류(主流)를 이루었던 반면(反面), 고산(孤山)의 대표작(代表作) ‘오우가(五友歌)‘와 ’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등은 자연(自然)을 벗 삼아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 한글의 서정적(抒情的)

 

          아름다움을 개척(開拓)한 순수문학(純粹文學)으로서 국문학사(國文學史)에 빛나는 주옥(珠玉)같은

 

          걸작품(傑作品)이며, 다산(茶山)의 길고긴 18년간의 유배생활(流配生活) 동안 남긴 대표작(代表作)

 

          일표이서(一表二書)인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경세유표(經世遺表) 등 500 여권은

 

          하나같이 경전(經典)의 새로운 해석(解釋)과 국가이익(國家利益)과 발전(發展)을 위하고, 실사구시

 

          (實事求是)로써 백성들의 삶의 질을 높이려는 불후(不朽)의 명저(名著)들로서 조위(曺偉)와 정철(鄭澈)

 

          의 작품(作品)들과는 차원(次元)을 달리하고 있고, 고산 과 다산의 집안이 조선(朝鮮)의 내노라하는

 

          명문가(名文家)로서 혈연적(血緣的)으로도 연결(連結)되어 있지만, 정말로 하늘에 보화(寶貨)를 쌓고

 

          천상영복(天上榮福)을 누리는 두 가문(家門)의 후손(後孫)들은 따로 계셨으니, 다산 정약용의 친가

 

          (親家)와 외가(外家)의 가계(家系)를 살펴봄으로써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정재원은  첫째 부인 의령 남씨와의 사이에 첫째 아들 정약현을 낳았고, 정약현의 처남(妻男)이

 

          초기(初期) 천주교(天主敎) 전파(傳播)에 큰 영향(影響)을 끼친 이벽이고, 정학현의 딸이 황사영 백서

 

          를 쓰고 순교한 황사영에게 시집을 갔으니 황사영은 정약현의 사위가 되었고, 정재원은 둘째 부인

 

          해남 윤씨 사이에 세 아들과 딸을 두었으니 딸은 조선 최초의 영세자(領洗者)인 이승훈에게 시집을

 

          갔으니 정재원은 이승훈의 장인이고, 둘째 아들 정약전은 다산과 같은 시기(時期)에 흑산도로 유배를

 

          가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저술(著述)하였으며, 셋째 아들 정학종은 신유박해(辛酉迫害)때 맏 아들

 

          정철상과 함께 순교(殉敎)하였으며, 정학종의 둘째 아들 정하상과 부인 유 세실리아, 딸 정정혜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순교하였으며, 정약용은 넷째 아들로 강진으로 유배를 갔고, 고산 윤선도의

 

          6대손(六代孫)이며 다산 정약용의 외종 6촌형인 윤지충 부모(父母)의 위패(位牌)를 불태웠다하여

 

          그의 외사촌인 권상연 함께 조선(朝鮮) 최초(最初)의 순교자(殉敎者)가 되었습니다.

 

 

 

 

 

 

                                                                   - 끝 -

 

 

 

 

 

 

이강길
 

제주도 - 유배지이기도한 이곳은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더 바다에 나가 고생을 하며 평생을 보내는 곳이기도 하다

남자들은 바다에 나가 풍랑을 만나면 그자리에서 죽지만

돌아오지 못하는 남편을 기다리며 평생 바닷가에서 물질을

해대야 하는 아낙의 한이 서려있는 곳이 제주도이다.

 

흑산도 - 주변에 섬이 많다 그래서 다도해의 한곳인 이곳 흑산도 또한

유배지이지만 경치는 끝내 준다고 하니 한번 가봐야 겠다..

 

하늘에서 바라본 흑산도..

 

흑산도에서의 일출

 

흑산도의 일몰...이라는데 맞나요?

 

무오사화의 원인이 된 탁영선생 연보

 

 

 

 

만분가의 일부 엄청길어서 쪼매만 올렸다

 

사약 사발

 

중죄를 범한 관리에게 사약을 받게 하는 그림

 

성종의 묘 - 초등학교 다닐때 매년 소풍을 이곳으로 간 기억있다

현재 강남구 삼성동에 있다.

 

다산의 유배지 다산초당 가는길

 

다산 선생의 묘.

 

다산 초상

 

 

천일각 - 섬으로 유배가신 형님생각이 날때 마다

다산이 이곳에 올라와 먼 바다를 보며 형님을 그리워 했다고 함

 

백련사에 오르는 길에서 바라본 다산초당.안쪽...동암서재

 

다산 초당의 약전 -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하네요...

 

다산 동암 서재

 

다산 동암의 보정 산방 - 완당 김정희(추사 라고도 함)의 글씨

 

다산 동암 현판

 

다산초당

 

다산초당 지붕의 문양

 

다산초당 앞의 다조 ( 차 끓이는 돌)

 

다산의 유배시에는 초가집이었다는데...

 

다산초당의 서암

 

다산 초당의 서재 관어재 - 완당 김정희 글씨

 

다산 초당의 연못 연지석정

 

다산 초당의 글씨 - 정석 얼마나 힘들면 바위에

정자를 세기며 마음을 다졌을까..생각한다.

유배의 힘듬이여...

 

 

 

다산 초당의 정일각- 형님이 생각나면 올라갔다는...

 

백련사 가는 길의 위에서 내려다 본 다산 선방 내의 동암 지붕...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윤두서의 자화상 - 조선 초상화중 제일 뛰어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강진에 귀향간 다산이 딸에게 그려보낸 매화

 

수원 화성을 지을때 사용된 거중기

 

 

다산의 글씨

 

정약전의 영정

 

고산 윤선도의 영정

 

고민하는 광해군 - 만화 삽화

 

광해군의 묘

 

송강 정철의 초상

 

송강정에 걸린 송강 정철의 글씨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정조 영정

 

수원 화성도1

 

수원화성 안내도

 

수원성

 

기중기로 쌓아 올린 수원화성

 

정조의 수원화성 행렬도

 

낙남헌방방도 - 잔치 준비도

 

해남 땅끝의 갈대밭

 

땅끝의 날씨의 변화무쌍...

 

해남 윤씨 역모당

 

해남 윤씨 추원당

 

해남 윤씨 족보 목판

 

 

 

신성자(socho) (2005/10/08) :

사랑의 신비여/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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