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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Re : 황사영 백서(黃嗣永 帛書) 2
작성자배봉균 쪽지 캡슐 작성일2007-01-21 조회수358 추천수6 반대(0) 신고

 

 

황사영 백서(黃嗣永 帛書) 2 - 박상천 작성

 

 

 § 黃嗣永 帛書 §             작성자  박상천

 

 

 

眞實忠厚之表 粹然見於顔面 望而知其賢人也 多默志氣高邁 而常敬憚之 雖係少年之弟 事皆諮之而後行 不敢自專

 

진실하고 중후한 표양이 순수하게 얼굴에 나타나므로 사람들은 바라보기만 하여도 그가 어진 사람임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최토마스도 의지가 높고 기개가 뛰어났지마는 항상 베드로를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비록 나이가 적은 아우이지마는 모든 일은 다 그에게 물어 본 다음에야 행하고 감히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아니 하였습니다.

 

多默有一親弟 毁斥聖敎 歷 敎友 而惟伯多祿則不敢譏  常稱天主敎中 惟子順一人 餘無可取

 

최토마스에게 친동생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는 성교를 헐뜯고 배척하며 교우들을 차례로 돌아가며 욕했지마는 오직 최필제 베드로에게만은 감히 헐뜯어 나무라지 못하고 항상 천주교 신자 중에서 오직 자순 한 사람이 있을 뿐이고, 그밖에는 취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칭찬하였습니다.

 

神父嘗歎美之曰 夫婦守貞者 鮮克有終 而子順夫婦 志操愈固 苦工愈勤 眞賢人也 被捕之後 其父本係外敎 驚憂成疾 臨終信主受洗而死

 

주신부도 일찍이 그에게 탄복하고 칭찬하여 말씀하시되 "부부가 정결을 지키는 자로서 끝까지 지키는 사람이 아주 드문데 자순 부부는 지조가 갈수록 굳어지고, 힘써 노력하는 것이 갈수록 부지런하니 참으로 어진 사람이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체포된 후 그의 아버지는 본래 외교인이었는데, 놀라고 걱정한 나머지 병이 들었습니다. 죽음에 임박해서 그 아버지도 천주님을 믿어 영세를 받은 후에 주님께로 돌아갔습니다.

 

伯多祿在獄聞訃 訴官請暇 官命歸葬 更以言語 示其微意 欲令逃避 伯多祿不肯從 葬後 限入獄 竟以斬首致命 年三十二歲

 

최베드로는 옥에서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관청에 호소하여 말미를 청하였는데 관청에서는 돌아가 장례를 지내라고 하며, 다시 말로 눈치를 주어 도망가게 하려고 하였으나 베드로는 그 말을 따르지 않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 바로 기일 안에 옥으로 돌아가 마침내 목이 잘려 순교하였는데 이때 나이 32세였습니다.

 

嘗與數友 各言其志曰 斬首致命 乃吾至願 竟如其言 或傳伯多祿不勝杖 背敎 而官猶不放 伯多祿復說明受死云 頗未的實 姑以存疑耳 金若撤法健淳 老論大家之 

 

최베드로는 일찍이 몇몇 친구들과 함께 제각기 자기의 소원을 말할 때 그는 참형 당해 순교하는 것이 자기의 더 없는 소원이라고 말하였는데 결국 그 말과 같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의 말로는 최베드로는 매를 못 이겨 배교하였지마는 관가에서는 석방하지 아니하므로 그는 다시 성교를 설명하고 사형을 받았다고 하는데 자못 확실하지 아니하여 아직 의문으로 남아있을 뿐입니다. 김건순 요사팟은 노론 대가의 자손입니다.

 

家在京畿道驪州 先祖尙憲 有大功於國家 故世襲冠冕 爲國內甲族 若撤法生而穎異

 

집이 경기도 여주에 있었고, 그의 선조 상헌이 국가에 큰 공이 있었으므로 대대로 벼슬을 이어받아 나라안에서 으뜸가는 집안이 되었습니다. 김요사팟은 태어나면서부터 특이하고 뛰어난 데가 있었습니다.

 

九歲便有學仙之志 幼時受論語於塾師 至敬鬼神而遠之之章 問曰 當敬則不當遠 當遠則不當敬 而敬而遠之何也 其師不能答

 

아홉 살 때 선도를 배울 생각을 하였고, 어려서는 글방 훈장에게『논어』를 배웠는데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 하라는 대문에 이르러 선생에게 "마땅히 공경해야 한다면 멀리하는 것이 옳지 않고, 멀면 마땅히 공경하지 않는 것인데 공경하되 멀리하는 것은 어찌 그렇습니까?" 하고 물으니 훈장이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 p65-55

 

其家素有畸人十篇 若撤法喜看之 十餘歲 著天堂地獄論 以明其必有 稍長博通文學 經史子集 醫經地誌 以至佛老兵家之書 莫不精熱

 

그의 집에 전부터『기인십편』☞(마태오리치가 지은 책으로 불교와 대비하여 천주교를 주장한 책) 이라는 책이 있었는데 요사팟은 그 책 읽기를 좋아하였습니다. 십여 세 때는 "천당지옥론"을 저술하여 천당과 지옥이 반드시 있음을 분명히 하였고, 좀 자라서는 문학과 경사자집과 의서와 지리 등에 널리 능통하였으며 불교와 노자와 병서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공부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十八遭養父喪 東國喪服 遵用宋儒之制 頗失古法 若撤法 而正之 俗儒駭訝 貽書責之 若撤法作書答之 引據該洽 文辭霑  李家煥見而歎曰 吾不敢望也

 

열 여덟 살에 양부의 상을 당했을 때는 우리나라 상복이 송나라 선비의 제도를 그대로 따라 써서 옛날의 법을 많이 잃었었는데 요사팟은 이것을 고쳐서 바로 잡았습니다. 그러자 세속의 잘 알지 못하는 선비들이 크게 놀라고 의아하여 글을 보내서 힐책하므로 요사팟은 글을 지어 이에 대답하였는데 그 인용한 근거가 해박하고 넉넉하면서도 문장이 유창하여 이가환이 보고서 감탄하여 말하기를 "나는 도저히 따라가지도 못하겠다"고 하였습니다.

 

居家忠信篤敬 德著鄕里 家本富饒 而傾財喜施 自己衣食 泊如貧者 名譽藉甚 每遊都下 軒馬輻輳 皆以一見爲奇

그는 집안에 있어서는 충직하고 믿음직스러웠으며 독실하고 공손하여 덕망이 고향일대에 자자하였습니다. 집안이 본래 넉넉하여 재산을 남에게 베풀어주기를 좋아하면서도 자기가 먹고 입는 것은 검소하기가 가난한 사람과 같았습니다. 그 명예가 대단하여 서울에 올 때마다 그를 찾는 사람의 가마와 말이 수없이 모여들었으며, 모두들 그를 한 번 만나 보는 것을 아주 특별한 일로 여겼습니다.

 

與李瑪爾定等五六人 結生死之交 將欲乘舟泛海 達于江浙 以至北京 面晤西師 多學利用厚生之方 歸傳于本國 因進敎不果 此五六人 皆爲主致命

 

그는 李마르띠노 등 대여섯 사람과 죽고 사는 것을 같이하기로 친교를 맺고 장차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강절 지방에 도달하여 북경으로 가서 서양 선교사를 직접 마주 대하고 이용후생의 방법을 많이 배워, 돌아와 우리나라에 전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입교하였기 때문에 이를 실현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이 대여섯 사람은 다 주님을 위하여 순교하였습니다.

 

時奉敎者 率皆南人 老論則未有一人 若撤法歆慕縱深 無門可入 偶因鄕間敎友 得見總領天神像 誤以爲聖敎與奇門相通 遂與姜彛天等 從事奇門

 

이때 성교를 받드는 사람은 모두가 남인이고 노론은 한 사람도 없었으므로 金요사팟은 성교를 몹시 부러워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크고 깊었지만 입교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시골에 있는 교우로부터 총령천신상의 (미카엘 대천사의 상) 상본을 얻어 보고 성교가 술법과 서로 통한다고 잘못 생각하고 마침내 강이천 등과 함께 술법에 종사하였습니다.

 

姜彛天者 少北名士 而心術不端 以爲本國必不長久 將有風雲之會 學習此術 以圖乘時進取 若撤法不知而誤交之 神父聞其賢 以書勸之

 

강이천이란 이는 소북의 이름난 선비로서 마음 씀씀이가 단정하지 못하여서, 이 나라는 끝내는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장차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배우고 익힌 술법으로 기회를 보아 정권을 잡으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요사팟은 그런 줄을 모르고 그와 교제하였습니다. 주신부는 김요사팟이 어질다는 말을 듣고 편지를 보내 권유하였는데,

 

若撤法驚動悅服 盡棄從前所學 全心歸主 時年二十二歲 同時密友 莫不歸化 而惟姜彛天不肯全信

 

그는 크게 놀라 감동하고 전에 배우던 것을 모두 버리고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나이 스물 두 살이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그와 함께 은밀히 친했던 친구들이 다 입교하였는데 오직 강이천만이 온전히 믿음을 수긍하지 아니하였습니다.

 

不數月 彛天本事綻露 遂起獄事 辭連若撤法 先王素知其才 曲爲之保護 獲免于禍 領洗後 熱心熾然 遂爲父兄所知 嚴加禁止 三四年內 家窘無時無之  謗從之而盛

 

몇 달이 안되어 강이천의 일이 탄로 나서 마침내 옥사가 일어났는데 문초하는 말 가운데 김요사팟이 연루되었으나 선왕이 평소 그의 재주를 알고 있었으므로 마음이 휘도록 두호하시어 요사팟은 화를 면하였습니다. 그는 영세 후에 천주를 향한 뜨거운 마음이 불꽃같이 왕성하였습니다. 끝내는 집안의 부형들이 알고 극히 엄하게 금지시켰기 때문에, 3∼4년 동안 집안에 말썽이 없는 때가 없었으며 이에 따라 비방도 더 심해졌습니다.

 

若撤法表樣端正 謙 如愚下無知者 以此人愈敬服 被捕之緣由 臨難之操持 未能詳知 但聞臨刑謂市人曰 世間爵位聲名 都市虛假

 

김요사팟은 그 외양이 단정하고 지극히 겸손하여 겉으로 보기에 아주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 같아 보였습니다. 이 때문에 더욱 남들이 공경하고 복종하였습니다. 그가 체포당한 연유와 난을 당할 때의 지조를 지킨 일에 관해서는 아직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마는 다만 들리는 말로는 처형당하기 앞서 세상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이 세상의 벼슬이나 명예는 모두가 헛되고 거짓된 것이오.

 

我亦薄有名稱 亦能仕宦 而爲其虛假 棄而不取 惟此天主聖敎 至眞至實 故爲此死而不辭  等須仔細 終以斬首致命 時年二十六歲 都民莫不嗟惜

 

나 역시 약간의 명망이 있고 벼슬도 했었지마는 그것이 헛되고 거짓된 것이기에 버리고 취하지 아니하였소. 오직 이 천주님의 성교만이 지극히 진실한 것이기에 이를 위해 죽음도 사양하지 않는 것이오. 당신들도 모름지기 이 뜻을 자세히 알도록 하십시오."하고 끝내 참수 당해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이때 그의 나이 26세였었는데 장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하였습니다.

 

金伯淳 王都人 健淳之族兄也 家本貧寒 志切功名 先祖尙容 官爲國相 崇德丙子 大淸兵陷江都 尙容義不屈 自焚死 因此建祠旌閭

 

김백순은 (?∼1801 순교자 세례명은 미상) 서울 사람으로 김건순의 족형입니다. 집안이 본래 몹시 가난하였으나 공을 세워 이름을 날릴 생각은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의 선조 상용은 벼슬이 정승이 되어, 숭덕 병자년에(1636) 청나라 군사가 강도를 함락시키자 상용은 의리를 굽히지 않고 스스로 불에 타 죽었습니다. 이 때문에 나라에서는 사당과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습나다.

 

本國建大報壇於闕內 祭祀前明萬曆崇禎兩皇帝 每年國王率丙子死節人子孫 行展拜禮 禮罷設科 試與祭人 謂之忠良科

 

우리나라에서는 대궐 안에 대보단을 세워서 전조 명나라의 만력 숭정 두 황제를 제사 지냈는데, 해마다 국왕이 병자년에(1636) 절의를 지키기 위해 죽은 사람들의 자손들을 거느리고 전배의 예를 행했으며, 예가 끝나면 과거를 설치하여 제사에 참례한 사람들에게 시험을 보게 하고 이것을 일러 충량과라고 하였습니다.

 

伯淳獨不與祭曰 尊周之誠 不在與祭 今日與祭者 專爲希 科名 事甚不誠 吾不爲也 初年隨人毁謗聖敎 亦爲擧子業 見世途危險 無心進取 讀宋儒書 窮究性理

 

김백순이 홀로 이 제사에 참례하지 않고 말하기를 "오늘날 제사에 참례하는 사람은 주나라를 존숭하는 정성으로 이 제사에 참례하고 있는 것이 아니요, 오로지 과거에 급제할 기회만 엿보는 것이니 그것은 매우 참되지 못한 마음으로 행한 것이기에 그래서 나는 참례하지 않는 것이오."하였습니다. 그는 처음 몇 해 동안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성교를 헐뜯고 비방하면서 과거 공부를 힘썼는데 세상 형편이 앞으로 위험해질 것을 보고는 벼슬에 나아갈 마음을 버리고 송나라 유학자들의 책을 읽고 성리학을 연구하였습니다.

 

又見道理疑晦 不可全信 遂讀老莊之書 因而悟人死有不滅者存  爲新論 講說於朋 之間 友等 之曰 此人議論新奇 必從西敎矣

 

그러나 성리학 또한 그 이치가 의심스럽고 분명하지 못하여 온전히 믿을 수가 없음을 깨닫고, 노자와 장자의 책을 읽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사람은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 있음을 깨닫고 새로운 이론을 세워서 친구들에게 강설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친구들은 꾸짖고 책망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의 이론이 새롭고 기이하니 반드시 서교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하였습니다.

 

伯淳聞而疑之曰 我得超人之見 而人以爲西敎 則西敎必有妙理 遂與敎友相從 數年辨論 確然信服 嚴守規誠

 

백순은 그들의 꾸짖는 말을 듣고 의심이 나서 이르되 ’나는 남보다 뛰어난 견해를 얻었는데 남들이 서교라 하니 그렇다면 서교에 반드시 오묘한 이치가 있을 것이다’ 하고 마침내 교우들과 서로 친하게 어울리며 여러해 동안 그 교리를 판단하고 토론한 끝에 확실히 믿고 탄복하여 계명을 엄격히 지켰습니다.

 

其母亦熱心歸化 但其妻本來强悍 常望丈夫之顯達 一朝絶望 不勝 恨  辱備至 兼之族黨親友 咸加毁罵 伯淳少不撓動

 

그의 어머니 역시 감화되어 열심히 믿었으나 단지 그의 아내는 본래 성질이 억세고 사나와서 항상 남편이 벼슬을 하여 이름이 높아지기만을 바라다가 하루아침에 희망이 끊어지니까 분하고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별의별 욕을 다 퍼부었습니다. 게다가 일가 친척과 친한 친구들까지 모두 그를 헐뜯고 꾸짖었으나 김백순은 조금도 흔들리지 아니하였습니다.

 

其母舅自來誘說 終不能得 乃曰 汝不聽吾言 當與汝絶交 伯淳曰 寧與舅氏絶交 不能與吾主絶交 於是友人莫不貽書告絶 宗族僉議別族 而伯淳晏如也

 

그의 외숙조차 와서 달래고 타일렀으나 끝내 어찌하지 못하여 외숙이 말하기를 "네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마땅히 너와 절교하겠다."고까지 하였으나, 백순이 대답하기를 "차라리 아저씨와 절교를 할지언정 우리 주님과는 절교할 수는 없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친구들이 모두 편지를 보내 절교를 통고하지 않는 이 없었고, 종중회에서는 그를 문중에서 축출하였지마는 김백순은 태연하기만 하였습니다.

 

常曰 我自認主以來 心界不動如山 與健淳同日被斬 年三十二歲 奉敎不久 故未受洗 無聖名 李喜英路加 若撤法之密友 先居驪州 後移都下

 

그는 항상 말하기를 "나는 천주님이 계심을 안 이래 내 마음이 태산과 같아 움직이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건순과 같은 날에 참형을 당하였는데, 백순의 나이 32세였습니다. 그는 성교를 받든 지는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미처 영세를 받지 못하여 세례명은 없었습니다. 이희영 루가는 (1756∼1801 순교자) 김건순 요사팟의 아주 절친한 친구인데 처음에 여주에서 살다가 뒤에 서울로 이사하였습니다.

 

本來工畵 善摹聖像 亦以斬首致命 洪斐理伯弼周 葛隆巴之前室子也 性本良善 隨母進敎 未能勤謹 陪奉神師之後 一年之間 判作異人 人皆驚異 在家常爲輔祭

 

그는 본래 화공으로 성상을 아주 잘 그렸고, 역시 참수 당해 순교하였습니다. 홍필주 필립보는 (1773∼1801 순교자 주문모 신부의 복사) 강골롬바의 전실 소생 아들입니다. 그는 본래 성품이 어질고 착해서 어머니를 따라 입교하였는데 성교를 믿는데 별로 부지런하고 열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신부를 모시고 다닌지 1년 동안 아주 딴 사람이 되어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기이하게 여겼으며, 집에서는 항상 미사를 도와 복사를 하였습니다.

 

被捕入獄 官問神父之事 治以毒刑 斐理伯忍受不招 竟至斬決 年二十八歲 姜葛隆巴 一名家女子也 才辨剛勇 志趣高尙

 

체포되어 옥에 들어가니 관리가 신부의 일을 묻고 혹독한 형벌로 다스렸으나 홍필주 필립보는 괴로움을 참고 견디며 끝내 실토하지 아니하여 마침내 참형을 당했는데 이 때 나이 28세였었습니다. 강골롬바는 명문가의 일명으로 재주와 분별력이 있었고 굳세고 용기가 있었으며 생각하는 것이 고상하였습니다.

 

少小閨閤之中 已有作聖之想 而不明門路 隨人念佛 十餘歲 知識稍開 見其 誕難信 不復從事 長爲德山洪芝榮繼室 丈夫庸下不稱意

 

아주 어려서 방안에서 지낼 때에 이미 성녀가 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아갈 길을 몰라 다른 사람을 따라 부처를 생각하였는데 여남은 살이 되어서 지식이 약간 열리자, 그것이 허황하여 믿을 것이 못됨을 알고 다시는 따르지 아니하였습니다. 성장해서 덕산 홍지영의 후처가 되었는데 남편이 용렬하여 도무지 마음에 맞지 않았습니다.

 

尋常鬱  恒存離塵絶俗之願 湖中聖敎初開 葛隆巴聞天主敎三字 自忖曰 天主者 天地之主也 敎名旣正 道理必眞 求書一見 傾心信服

 

그래서 늘 우울하고 답답하여 언제나 속세를 떠나고 싶은 생각이 있었습니다. 충청도에 성교가 처음 들어오자 골롬바는 천주교라는 세자를 듣고 스스로 헤아려 생각하기를 "천주라 함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다. 교의 이름이 이미 바르니 그 도의 이치도 틀림없이 참될 것이다". 하고 책을 구하여 한번 읽어보고는 온 마음을 다해 믿고 따랐습니다.

 

其聰明勤敏 熱心克己 卓乎難及 勸化全家 旁及隣里 但芝榮全無主見 其妻勸之 則諾諾而從 惡黨毁之 則唯唯而信 其妻責之 則泣涕悔罪 惡友又來 則卽復如前

 

그녀는 총명하고 부지런하며 열심하고 스스로를 이겨내는 것이 뛰어나서 다른 사람이 따라가지 못하였습니다. 성교를 권하고 감화시킴이 온 가족은 물론 이웃 여러 마을에까지 미쳤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 홍지영은 주관이 전연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내가 이를 권하면 "그래, 그래."하고 아내의 말을 따르고 악한 무리가 헐뜯으면 "옳아, 옳아." 하고 그들의 말을 믿었습니다. 아내가 나무라면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다가도 나쁜 친구들이 또 오면 금방 전과 같아졌습니다.

 

葛隆巴盡力無  知其不可與同事 辛亥之窘 本鄕擾亂 遂付田庄於丈夫  子女而上京 池撤巴之行 多所參贊 乙卯領洗 神父一見甚喜之 定爲會長 付以料理女友之任

 

골롬바는 아무리 힘을 다해도 효과가 없자, 남편과는 일을 같이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신해년(1791) 박해때 고향이 소란해지자 그녀는 마침내 논밭과 집을 남편에게 맡기고 자녀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고, 지사바가 (지황 ?∼1795 순교자 세례명:사바 일명:池洪) 하는 일에 (북경 왕래와 연락을 취하는 일) 간여하고 도움을 주는 바가 많았습니다. 을묘년에(1795) 영세를 받았는데 신부는 그녀를 보자 매우 기뻐하고 회장으로 임명하여 여자 교우들을 돌보는 임무를 주었습니다. p73-67

 

五月之難 首倡 避之計 獨自周旋 藏神父于本家 盡力防護 以致捕差到門空還 難後神父定居其家 六年之內 敎中要務 咸厥贊助 神父寵任甚隆 無人可擬

 

5월의 박해 때 그녀는 피신할 계획을 가장 먼저 주장하고 혼자서 주선하여 신부를 자기 집에 숨겨 두고 힘을 다해 보호하였습니다. 이리하여 포졸들이 문 앞까지 왔다가도 어긋나 빈손으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박해 이후에는 신부는 아주 그녀의 집을 거처로 삼았고, 골롬바는 6년 동안이나 성교의 모든 중요한 일을 도와 이끌었으므로 신부의 사랑과 신임이 대단히 커서 아무도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葛隆巴內奉神父 起居服食 咸稱其宜 外理敎務 經營酬應 未嘗少懈 多聚童女 訓誨成就 分行各家 勸人信主 自己亦周巡勸化 夜以繼晝 鮮有安眠之時

 

골롬바는 안으로 신부의 거처와 의복, 음식을 잘 받들었고, 밖으로 성교의 사무를 처리하여 교회 살림과 교회 내의 연락을 주고받음에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처녀들을 많이 모아 가르치고 그 일이 끝나면 집집마다 방문하여 사람들에게 천주님을 믿도록 권유하게 하고, 자기 자신도 역시 밤낮으로 돌아다니며 남에게 권유하고 감화시켜, 스스로는 편안하게 잠 잘 때가 드물었습니다.

 

而道理貫通 言辭辨給 化人 多 處事剛斷有威 人皆畏憚 被捕到官 官問神父 跡 周紐六次 不動聲氣 兩旁惡役曰 此神耳 非人也

 

이치에 통달하고 능란한 말솜씨로 설명해 주어 누구보다도 감화시킨 사람이 가장 많았으며 일처리가 과단성 있고 위엄도 있어, 사람들이 다 조심스러워 하였습니다. 체포되어 관청에 이르니 관리가 신부의 종적을 캐어물으며 주리를 여섯 번이나 틀었으나 음성과 기색이 조금도 달라지지 아니하였습니다. 양쪽에 늘어선 형리들이 말하기를 ’이것은 귀신이지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終以斬首致命 年四十一歲 先王有庶兄一人 其子謀逆而死 先王放之江島 擧國請誅 而先王不許 其妻及子婦 留在舊宮 辛亥壬子之間 有一女敎友 憐而勸化

 

그녀는 마침내 참형을 당해 순교하였는데 그 때 나이 41세였습니다. 선왕에게 서형 (은언군 이인, 철종의 조부)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역모로 죽은 다음, 선왕은 서형을 강도로 귀양보냈습니다. 그러자 온 나라가 들고일어나서 그를 사형에 처하기를 청하였으나 선왕은 허락하지 아니하고 그의 아내와 며느리를 본래 살던 궁에 머물러 있게 하였습니다. 신해년(1791), 임자년(1792) 무렵에 한 여교우가 그들을 가엽게 여기고 권유하여 감화시켰습니다.

 

人皆以爲 禍機在此 不欲交通 而葛隆巴進之 旣領聖事 又入明會 知其事者 莫不憂悶 至是發覺 賜藥自盡 江島罪人 未嘗奉敎 而因連坐 幷賜藥殺之

 

그랬더니 사람들이 모두 화난의 계기가 여기에 있을 것이라고 하여 그들과 내왕하기를 꺼려했지만, 골롬바는 자진해서 나아가 그들로 하여금 성사를 받도록 주선하고 또 명도회에 가입시켰기 때문에 그 일을 아는 사람은 모두 근심하고 번민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이에 이르러 일이 발각되니, 그들에게는 사약이 내려져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였고 강도의 죄인은 성교를 믿지 않았지마는 여기에 연루되어 역시 사약을 내려 죽였습니다.

 

兩婦人姓與聖名未詳 崔伯多祿以下 諸人致命日子幷未詳 趙伯多祿 楊根人也 其父鰥居窮因 力農資生 而伯多祿年近三十 不冠不娶 疲 孱弱 外貌無足可觀

 

두 부인의 성과 본명은 자세히 알 수 없고 최베드로 이하 여러 사람의 순교한 날짜도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조베드로는 (趙용삼 ?∼1801 순교자) 양근 사람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홀아비로 곤궁하여 지냈는데 농사를 지으면서 겨우 생활하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나이가 서른에 가깝도록 관례도 못하고 장가도 들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몸이 부실하여 병들어 늘어지고 잔약하였으며, 외모도 별로 보잘것이 없었습니다.

 

更兼昏於俗事 人皆嘲笑之 不數之 遊學於丁奧斯定之門 奧斯定獨稱其大熱心 庚申四月 與其父偕往 驪州李瑪爾定村 瑪爾定被捕時 父子同參

 

게다가 세상일에 어둡기까지 하여 남들이 모두 조롱하고 비웃고, 사람축에 넣지 아니하였습니다.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오직 정아우구스티노만이 그의 열성을 칭찬하였습니다. 경신년(1800) 4월에 그의 아버지와 함께 여주에 있는 이중배 마르띠노의 마을에 갔다가 마르띠노가 체포당하면서 부자가 함께 붙들렸습니다.

 

到官不屈 官怒曰 汝不從命 當搏殺汝父 取其父 當面毒打 伯多祿不得已 說出背敎言語 蒙放出門 瑪爾定等提醒勸勉 伯多祿回心悔罪 復入官說明

 

관청에 끌려가서 베드로가 굴복하지 아니하자 관리가 노하여 말하기를 "네가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네 아버지를 당장에 때려죽이겠다". 하고 그의 아버지를 끌어내다가 그가 보는 앞에서 혹독한 매질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하는 수 없이 배교한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석방되어 옥문을 나오면서 李마르띠노 등 여러 교우들에게 깨우치고 권면하는 말을 듣고는 베드로는 다시 마음을 돌이켜 죄를 참회하고 다시 들어가 관리에게 성교를 믿음을 분명히 말하였습니다.

 

官大怒 嚴囚不放 每經刑訊 他人或受例杖 惟伯多祿最多最酷 盖本官見其爲人 心甚輕之 以爲如此人 容易受降 而不意反甚堅固 故憎恨特深 必欲殺之

 

그러자 관리가 크게 노하여 다시 가두고 석방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매번 심문을 당할 때마다 다른 사람들은 의례적인 매를 맞았지마는 오직 베드로만은 특별히 가장 많이 가장 혹독하게 매를 맞았습니다. 그것은 그 고을 사또가 그 외모를 보고 마음으로 몹시 업신여겨 이러한 자는 쉽사리 항복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는데 뜻밖에도 오히려 그 신앙이 몹시 굳고 단단하므로 미움이 특히 심하여 기어코 죽이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在獄十一朔 嘉言善行甚多 忘不能細述 後當査實 獄中受代洗 辛酉二月 官復嚴刑拷訊 迫令背敎 答曰 天無二主 人無二心 一死之外 無辭可告

 

그가 옥에 갇혀 있기를 열 한 달 그 동안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동이 매우 많았습니다마는 다 기억하지 못하여 모두 자세히 기록하지 못합니다. 훗날에 마땅히 사실을 조사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옥중에서 대세를 받았고 신유년(1801) 2월에 관청에서 다시 엄한 형벌로 고문하면서 억지로 배교하기를 명하니 그가 이르기를 "하늘에 두 천주가 없고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없소, 한 번 죽는 것 이외에는 더 할 말이 없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官復命下獄 數日後絶命於獄中 時二月十四日也 李類斯以湖中傳敎之罪 斬於公州 而此人尙在背敎中 未知臨死之如何 或傳其善死 而未敢遽信

 

그러자 관리는 다시 옥에 가두라고 명령하였고 며칠 후에 옥중에서 목숨이 끊어졌는데, 이 때가 2월14일이었습니다. 李루도비코는 (李存昌 1752∼1801) 충청도에 전교하였다는 죄로 공주에서 참형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배교 중이었는데, 죽을 때 어찌하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이는 그가 순교하였다고 전합니다마는, 감히 성급하게 믿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定山及禮山 各有致命者一人云 而亦不知爲誰某 全羅道辛亥以後 十年無窘 敎友頗多 四月初 全州柳奧斯定 高山尹方濟各等 二百餘人被捕

 

정산과 예산에도 각각 순교한 사람이 한 사람씩 있다고 말합니다만, 역시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전라도는 신해년(1791) 이후 10년 동안 박해가 없어서 교우가 두루 많아졌습니다. 4월초에 전주의 유아우구스티노 (柳恒儉 1756∼1801), 고산의 윤프란치스코등 (尹持憲 1764∼1801) 2백여 명이 체포되었는데

 

惟金堤貧士 姓韓的 及全州常人姓崔 字汝謙者 兩人剛毅 斬首致命 餘皆被屈

 

오직 김제의 한씨 성을 가진 가난한 선비와 (韓正欽 1755∼1801 스타니슬라오) 전주의 최씨 성을 갖고, 자가 여겸인 상인 (崔汝謙 1762∼1801 순교자, 마티아), 두 사람만이 성품이 굳세고 의지가 강하여 참수 당해 순교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굴복되었습니다.

 

京鄕背敎人 皆竄流遠方 厥數甚多 而柳奧斯定兄弟 及尹方濟各 以領袖之故 不卽定配 移囚上京 金多默被捕時 自說往來之事 因此亦移囚上京 尙未知或死或竄

 

서울과 지방의 배교한 사람들을 모두 먼 지방으로 귀양 보내 그 수효가 매우 많았는데 유아우구스티노 형제와 윤프란치스코는 영수이기 때문에 바로 귀양보내지 아니하고 서울로 옮겨 가두었고 金토마스는 체포당할 때 자기가 그들과 내왕이 있었음을 스스로 말하였으므로 이로 인하여 그 역시 서울로 옮겨다가 가두었습니다마는 죽었는지 귀양갔는지는 아직은 알 수가 없습니다.

 

外敎傳言 正刑及獄中致斃者 合三百餘人 外鄕不與焉 朝鮮開國後 殺人之數 未有甚於今歲 未知其信否 又未知浪死者爲誰 致命者幾人

 

외교 사람들의 전하는 말에 의하면 판결을 받고 처형된 사람과 옥중에서 죽은 사람이 모두 합쳐 3백여 명인데 지방의 일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선이 개국한 이후로 사람을 죽인 수가 올해처럼 많은 해는 없었다고 합니다마는 믿을 만한 말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또 휩쓸려 죽은 사람이 누구이고 순교한 사람이 몇인지도 잘 알 수 없습니다.

 

朝廷之必欲盡殺者 地位高 能文字之人 愚鹵賤人 或知而故遺 或治而不嚴 都下常人 頗有存者 二月望前事 皆罪人親見者 頗爲詳悉 以後事 但憑傳說得聞 故甚爲  

 

조정에서 반드시 죽이고자 한 사람은 지위가 높고 글을 잘하는 선비들입니다. 어리석고 천한 백성은 혹 알아도 모른 체 내버려두고 혹 취조하여도 그다지 엄하게 하지 아니하여 장안의 평민들은 목숨을 보전한 사람이 많습니다. 2월 보름날 전의 일은 다 저희 죄인들이 직접 본 곳들이라 상당히 자세하게 되어있습니다만 그 뒤의 일은 다만 소문으로 전하는 말을 얻어들은 것이기 때문에 매우 소홀하고 간략합니다.

 

致命人事蹟 傳聞的實者 及平昔稔知者  爲記述 而不過梗 而已 其餘不敢妄錄 然其中尙恐有未實者 更當詳査 本神父自乙卯後 常住葛隆巴家 間或巡歷別所 而獨葛隆巴知之 他無與知者

 

순교한 이들의 행적은 분명하게 전해 들은 것과 평소에 익히 알고 있는 것을 간략하게 적은 것이라 그 대강의 줄거리에 지나지 않을 뿐이고, 그 나머지는 감히 함부로 기록하지 아니 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록한 것 가운데도 오히려 진실 되지 못한 점이 있을까 염려가 됩니다. 마땅히 다시 자세히 조사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신부는 을묘년(1795) 이래 늘 골롬바의 집에서 기거하셨습니다. 간간이 혹 다른 곳을 돌아다니시기도 하였는데, 오직 골롬바만이 이 일을 알았고 다른 사람은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습니다.

 

及窘難起 有一男敎友 見事勢危急 恐難保全 徑往外鄕 尋見隱居之敎友 預備兩處妥當之所 再上京 見葛隆巴 懇請一謁神父 欲爲保護 避之計

 

마침내 박해가 일어나자 어떤 남자 교우가 형세가 매우 위급한 것을 보고 신부가 몸을 온전히 보전하기 어려울 것을 염려하여 바로 지방으로 내려가서 숨어사는 교우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신부가 숨을만한, 마땅한 곳 두 군데를 마련하여 놓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골롬바를 보고는 몸을 보호하여 난을 피하게 할 계획으로 신부를 한번 만나보기를 간청하였습니다. p80-77

 

葛隆巴曰 已得安身之所 不必更爲遷動 此友屢請不得 沒奈何空還 五六日後 禍機越大 此友恐波及  家遠避 丁奧斯定到官不招 官又捕葛隆巴母子 嚴刑鞠問

 

그러나 골롬바가 말하기를 이미 안전한 곳이 마련되었으니 꼭 다시 옮겨갈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교우는 여러번 간청하였으나 신부를 만나지 못하고 어찌할 수 없이 그대로 돌아갔습니다. 5∼6일 후에 화가 일어날 기미가 더욱 커지자 이 교우는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염려하여 가족을 모두 이끌고 멀리 피하였습니다. 정아우구스티노가 관청에 잡혀가서 문초를 받으면서 사실을 말하지 아니하자 관리는 골롬바 모자를 잡아다가 혹독한 형벌로 국문을 하였습니다.

 

亦皆抵死不招 官取其婢子 周紐詰問 婢子不耐刑 從實直招 幷告年甲相貌 官謂葛隆巴曰 爾婢已招 爾不得終諱 須告此人所往處

 

그러나 그들 역시 죽음을 무릅쓰고 말하지 아니하자 이번에는 골롬바의 계집종을 데려다가 주리를 틀어 문초하니 계집종은 그 형을 견디지 못하고 사실대로 말하고 또한 신부의 나이와 얼굴 모습을 말해 주었습니다. 관리가 골롬바를 보고 말하기를 "너희 계집종이 이미 다 말했으니 너는 끝내 숨기지는 못할 것이다. 마땅히 신부가 있는 곳을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答曰 此人先時果在我家 離去已久 今不知其處矣 於是出榜懸賞 摹寫容貌 遍求於外鄕 三月中神父自首 (未知往於誰家因何自首 幷未詳自首日字) 直入禁府衙門 吏卒驚問何人

 

골롬바가 대답하기를 "신부가 전에는 우리 집에 있었지만 오래 전에 떠나갔다. 그래서 지금은 신부 있는 곳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관에서는 신부님의 용모를 그려 현상 수배하고 각 지방으로 널리 탐문하였습니다. 3월 중순에 신부는 자수하였는데 <누구 집에 있었고, 어떠한 연고로 하여 자수하였고, 또 자수한 날짜가 언제인지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직접 의금부로 들어가니까 이졸들이 놀라서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答曰 我亦奉主敎之人 今聞朝廷嚴禁 多殺不辜 生旣無益 故自來求死 擁入官前 知係神父 遂下獄拘囚 只鎖兩足 不可刑訊

 

신부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나 역시 천주님의 가르치심을 받드는 사람으로 지금 소문을 들으니 조정에서 성교를 엄중히 금하여 죄없는 사람을 많이 죽인다고 하여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겠기에 스스로 와서 죽기를 구하는 것이오."하였습니다. 나졸들이 신부를 붙들어 관리 앞으로 나아가니 그가 신부임을 알고 마침내 옥에 가두었는데 다만 양쪽 발에 족쇄만을 하고 형벌과 문초는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在獄之時 文字問答甚多云 而皆不得見 但聞外敎傳言 自首者 自稱西洋人 先此六人之死 論以逆律

 

신부가 옥에 갇혀 있을 때 글자로 문답한 것이 매우 많다고들 하는데 하나도 얻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외교인이 전하는 말을 듣건대 자수한 사람은 스스로 "자기가 서양 사람이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보다 앞서 여섯 사람의 죽음은 역률로 처단된 것입니다.

 

神父自現之後 都民相傳 西士在獄 辨明天主敎人之非逆賊 又傳 西士不肯就死 盡說自己所欲言者 然後方請受死

 

신부가 자수한 후 장안 사람들이 서로들 전하여 말하기를 "서양사람이 옥중에서 천주교 교인은 역적이 아니라고 변명하고 있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서양 사람이 그냥 죽음을 당하려 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다 하고 그런 다음에는 죽음을 청하겠다"고 하였습니다.

 

此等傳說以不虛矣 四月望後 朝廷命御營大將 行軍門梟示 (死罪次刑) 大將稱病 三日不出 三日後 遞罷病官 出新官行刑

 

이러한 소문은 허황한 말이 아닌 듯합니다. 4월 보름 이후에 조정에서는 어영대장에게 신부를 군문에 효수하도록 (사형에 처한 다음에 하는 형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어영대장이 병이 났다 핑계하고 사흘을 출근하지 않아 사흘 뒤에는 병났다는 대장을 파면하였고, 새 대장이 임명되어 형을 집행하게 되었습니다.

 

將出獄 如加刑問一次 (杖膝, 三十度)  過市曹 遍願觀者 稱渴索酒 軍卒捧上一盃 飮之盡 遂赴城南十里演武場 (江上沙場地名露梁)

 

신부를 옥에서 끌어내어 처음으로 형벌을 가해 문초하고 나서 <무릎을 서른 번 매질함> 떠메고 저자 거리에 모인 군중 사이로 지나갔습니다. 신부는 길 좌우에서 보고 있는 사람들을 두루 돌아보고 목이 마르니 술을 달라고 하여 군졸들이 술 한 잔을 올렸습니다. 술을 다 마시고 나자 마침내 성 남쪽 10리 밖에 있는 연무장으로 갔습니다.<그 강 백사장의 지명을 노량이라고 합니다>

 

貫矢於耳 軍卒授罪案使之看 所書頗多 而從容看畢 引頸受刑 時四月十九 天主聖三占禮日申時也 斬訖 忽然大風驟起 黑雲漫空 雷電轟燁 都民莫不驚惶

 

귀에 화살을 꿰고 군졸이 죄목을 적은 조서를 주어 읽게 하였습니다. 조서는 꽤 길었는데 신부는 조용히 보기를 마치고 목을 늘여 형을 받았습니다. 이때가 바로 4월 19일 성삼첨례일 (삼위일체대축일) 신시(申時, 오후 3∼5시)였습니다. 목을 베자 갑자기 큰 바람이 불어닥치고 검은 구름이 온 하늘을 덮고 우레와 번개가 큰 소리를 내며 번쩍번쩍하여 장안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황겁해 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時一敎友在三百里外行路 一敎友在四百里外避難 見風雷異常 意者此日必有怪事 牢記日字 後聞神父致命 正此日此時也

 

이 때 한 교우는 (황심을 말하는 듯) 3백 리나 떨어진 곳에서 길을 가고 있었고, 또 한 교우는 (황사영을 말하는 듯) 4백 리나 떨어진 곳에서 박해를 피해 길을 가고 있었는데, 바람과 천둥이 이상하게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이날 반드시 무슨 범상치 않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날짜를 기억해 두었습니다. 나중에 신부가 순교했다는 말을 듣고 따져 보니 바로 그 날 그 시간이었습니다.

 

懸首五日 晝夜防守 不許人近傍 隨後大將命 之 依舊嚴守 敎友潛識葬處 以圖日後遷  有惡官奏曰 此人不當  請命暴露

 

머리를 닷새 동안 거리에 매달고 밤낮으로 굳게 지켜 사람들이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였는데 뒤에 대장이 명하여 흙으로 덮어는 놓았으나 엄중히 지키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교우들이 몰래 묻은 곳을 알아두었다가 후일에 옮겨다 장사지내려고 하였으나 못된 관리가 "이 사람은 매장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다. 청컨대 파내서 드러내 놓아 이슬에 젖게 하시기 바랍니다."하고 상소하였습니다.

 

大妃允之 先時命 之大將諫曰 旣已 之 何必乃爾 事得已 而守墓軍卒 厭其苦守 潛移別處 敎友們暗地遍尋 至今不得

 

대왕대비가 이를 허락하였는데 앞에 묻으라고 명했던 대장이 간하기를 "이미 묻어 버린 것을 그렇게까지 할 것이야 있습니까"하여 별일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덤을 지키는 군졸들이 힘들게 지키는 것을 꺼려하여 몰래 다른 곳으로 이장하였습니다. 그래서 교우들이 몰래 묻은 곳을 두루 찾아보았으나 지금까지 찾지 못하였습니다.

 

行刑時 宣言曰 此濟州人也 盖不奏聞中朝 所以掩跡也

형을 집행할 때 형량을 선고하는 관리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제주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다 중국 조정에 보고하여 그 처리 방안을 문의하지 않은 것을 엄폐하기 위한 이유에서입니다. p85-83

 

神父致命後 窘難大勢稍減 而譏捕未嘗斷絶 獄中拘囚者尙多 或言當斬者 復有九人 傳聞之言 未知虛實 本神父到東之初 便有告 者 已爲先王所知

 

신부가 순교한 후 박해의 큰 기세는 약간 수그러지기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찰과 체포는 일찍이 끊인 일이 없고 옥에 갇힌 사람은 아직도 많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참형을 당할 사람이 또 아홉 사람이 더 있다고 하였습니다마는 전해 들은 말이라 사실인지 아닌지를 아직 알 수는 없습니다. 신부가 우리나라에 온 직후에 곧 고발한 자가 있어서 이미 선왕이 알게 되었습니다.

 

故七年之中 無時不小心畏約 未敢廣行聖事 沾恩者本不多 而太半是女友 外鄕敎友 乃都下常人 熱心者不少 受恩者絶稀

 

그러므로 7년 동안 마음으로 조심하고 염려하여 몸을 움츠리지 아니한 때가 없었고 감히 성사를 널리 행하지는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성사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본래 많지 않고 그 태반이 여자 교우입니다. 지방의 교우와 서울의 상인 중에 열성적인 이가 적지 않았으나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此輩皆忍受多苦 積年殷望 時勢不便 故雖私室之中 不敢開口說神父二字 不意反爲惡人所害 承顔於懸首之後 十載苦誠 一朝歸虛 神形至 亡之境

 

그들은 모두 많은 괴로움을 받았지만 참고 견디며 여러 해를 두고 큰 기대를 해 왔는데 세상 형편이 편안하지 않아서 비록 사사로운 집 방안에서도 감히 입을 열어 "신부"라는 두 글자를 말하지 못하다가 뜻밖에 성교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죽음을 당하여 목을 거리에 매단 다음에야 신부의 얼굴을 뵈니 10년 동안 애쓴 정성이 하루아침에 헛일로 돌아가 버려 영혼과 육체가 다 함께 멸망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生死無可依之所 莫不喪情失志 不知所爲 罪人等雖安慰之曰 父師之來 專爲救人 豈不欲博施廣濟 奈緣阻碍之多端 忍愛莫發 今旣致命 在天主保之力 必大勝於在世時

 

생사가 의탁할 곳이 없게 되어 모두 상심하여 삶의 의미를 잃고 어찌할 바를 몰라합니다. 저희들이 그들을 보고 위로하여 말하기를 "신부가 우리나라에 온 것은 오로지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서였는데 어찌 널리 베풀어 구제하려고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여러 가지 장애가 되는 일이 많아서 사랑을 참고 드러내지 못하셨는데 이제 이미 순교하여 하늘에 계시어 주님이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힘이 이 세상에 계실 때보다 훨씬 더할 것입니다.

 

吾 之托賴  等之盼望 正該加倍於前日 不可有絲毫失望之志 伊等將信將疑 且悲且慰 如此光景 恐是振古所無 太西昔年之窘 其慘毒 則有甚於今日此土 然神司相繼 聖事不絶

 

우리들의 의지함이나 당신들의 어여쁜 소망이 오히려 전에 비해 배 이상 더해질 것이니 털끝만큼이라도 실망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지마는 그들은 혹 믿기도 하고 의심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슬퍼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마음을 달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광경은 아마도 그 옛날에는 없었을 것입니다. 옛날 서양의 박해에 있어서 그 참담함과 혹독함이 오늘날 이 나라에서의 박해보다 더 심하였지마는 성직자가 대를 이었고 성사가 끊어지지는 아니하였습니다.

 

故聖敎不爲淪亡 生 盡行拯濟 東土則時勢逈異 萬無此望 綿羊失牧 猶能茁長 乳兒喪母 尙冀生全 罪人等則百爾思之 實無主路矣

 

그러므로 성교가 멸망하지 아니하고 인간의 살아있는 영혼이 모두 구함을 받았는데 이 나라에서는 세상 형편이 너무나도 달라 그러한 희망이 전연 없습니다. 양이 목자를 잃고도 오히려 풀을 먹고 자라고 젖먹이가 어머니를 잃고도 오히려 온전히 살아날 수 있지마는 저희들은 아무리 수없이 생각해 보아도 실로 살아날 길이 없습니다.

 

罪人等生於終古幽暗之區 幸爲天主之人 常思 竭心力 顯揚主名 以報特恩之萬一 那知中道 遽遭此境 曾聞致命之血 爲斯敎之種 然 邦不幸 東隣日本

 

저희 죄인들은 오랫동안 어두웠던 지역에 태어났으나 다행히 천주님의 사람이 되었으므로 항상 몸과 마음을 다해 주님의 이름을 높여서, 베풀어주신 특별한 은총의 만분지일이라도 갚으려고 생각하였는데 중도에서 갑자기 이러한 지경을 당할 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일찍이 듣건대 순교자의 피는 우리 성교의 씨앗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희 나라는 불행하게도 동쪽으로 일본과 가까이 있습니다.

 

島夷殘毒 自絶於主 而我朝議論 反以爲能 將欲效之 寧不寒心

 

섬나라 오랑캐가 잔인하고 혹독하여 스스로 천주님과의 관계를 끊어 버렸는데, 우리나라 조정에서는 그것을 논하기를 도리어 잘한 일이라고 하여 장차 본받으려고 하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我東人品柔弱 法令解弛 未必如日本之刻酷 然現今敎中 高明剛毅之人 存者無幾 愚鹵賤人 婦女孩童 約 計之 尙不下數千 而料理無人 興起無方

 

우리나라 사람들은 인품이 부드럽고 연약하고 법령이 풀어져 느슨해졌으니 꼭 일본처럼 그렇게 각박하고 혹독하지는 않겠지마는 그러나 현재 교우 중에 식견이 높고 의지가 굳센 사람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어리석고 무식한 사람과 부녀와 아이들을 대강 계산하면 수천 명을 넘지 아니하나 그들을 헤아리고 다스릴 사람이 없어서 떨치고 일어날 방법이 없습니다.

 

似此形勢 其何能長久乎 不出十年 雖更無官窘 將自歸消亡 嗚呼痛矣 未死之前 何忍見聖敎之絶減乎 罪人等之今年免禍 感 交切

 

이와 같은 형세로야 어찌 오래갈 수 있겠습니까. 십 년이 못 가서 비록 다시 정부의 박해가 없다고 하더라도 저절로 소멸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아, 참으로 통탄할 일입니다. 죽기 전에 차마 성교가 끊어져 없어지는 것을 어찌 본다는 말입니까. 저희들은 금년에 화를 면하였음에 감사함과 두려움이 절실하게 엇갈립니다.

 

感慈恩之曲庇 特荷生全  罪惡之偏多 未蒙簡選 誠欲以此餘生 爲主盡  而不但智乏 又復力窮 其將舍寃而入地 抱恨而終天乎

 

인자하신 은혜로 힘껏 보호하시어 특별히 생명을 보전하였음에 감사드리며, 죄악이 많아서 주님의 선택을 받지 못하였음이 두렵습니다. 참으로 이 남은 목숨으로 주님을 위해 힘을 다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지혜가 모자랄 뿐만 아니라 힘도 또한 다했으니 장차 원통함을 머금고 땅속에 묻혀야 하며 한을 품고서 이 세상을 마쳐야 합니까?

 

哀痛悶迫之中 誰爲憐我 誰爲慰我 雖欲哭訴於大爺慈座之前 關河阻隔 膽望靡及 尤增煩鬱 將如之何 罪人等聞神父自現之消息 驚痛之外 又有所大惶 者

 

슬프고 걱정이 절박한 가운데 누가 저희를 불쌍히 여기며 누가 저희를 위로해 주겠습니까? 본 주교 대야 각하의 인자하신 존전에 울며 호소하고 싶으나, 산과 물이 가로막혀 우러러보아도 미치지 못하니 더욱 속이 타고 답답합니다. 장차 어찌하오리까. 저희들은 신부가 자수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고 가슴 아파하는 것 이외에 또 한 가지 크게 당황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如或奏聞中朝 必然累及本堂 似此則東國敎務 無復如望 爲此夙宵憂慮 更深於本國之事

 

혹시 이 일이 보고되어 중국 조정에서 들으면 그 累가 북경 본당에 미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 나라의 교회 일은 회복할 가망이 없게 될 것이므로 그 때문에 밤낮으로 이 나라에서의 일보다 깊이 근심하고 걱정하였습니다.

 

幸而庇佑罔極 根本不動 兼之罪人不死 若望無故 主旨昭然 如以東方之事 屬之於大爺也 罪人等何敢不訴盡哀曲 仰承此恩耶 請悉言之 願曲察之

 

그런데 다행히 주님의 지극한 도우심으로 근본이 흔들리지 아니하였으며 아울러 저희 죄인들도 죽지 않았고 요한도 (옥천희) 무사한 것으로 보아 주님의 뜻이 이 나라의 일을 각하께 위촉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저희 죄인들이 어찌 감히 간절하고 애틋한 마음을 모두 하소연하지 않을 수 있으며 이 은혜를 우러러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모두 말씀드리니 굽어살피시기 바랍니다.

 

萬國之中 東國 貧 東國之中 敎友尤貧 僅免飢寒者 不過十餘人 甲寅做事時 接待凡節都 不能先期預備 司鐸到東之後 方 拮据 以致每事窘束

 

모든 나라 중에서 우리나라가 가장 가난하고 이 나라 중에서도 교우들이 더욱 가난하여 겨우 굶주림과 추위를 면하는 사람은 불과 십여 명에 지나지 아니합니다. 갑인년에(1794) 일을 시작할 때 신부를 접대하는 모든 절차를 먼저 기약하고 준비하지 못하여 신부가 이 나라에 도착하신 후에야 바야흐로 일하는 것이 서로 맞지 않아서 일마다 군색하고 막히게 되었습니다.

 

此雖生疎未經事所致 實係貧寒力不逮而然 近年進敎者稍多 財力少勝於前矣 然未辦當行之事 引接未妥之人 至使禍難如此其酷 則太半由於財難矣

 

이것이 비록 생소하고 경험이 없는 탓이라고는 하지마는 사실은 가난하고 힘이 없어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근년에 입교하는 사람이 다소 늘어나고 재력도 전보다 조금은 나아졌습니다. 그러나 마땅히 해야할 일을 처리하지 못하고 온당하지 못한 사람을 이끌어들여서 화난이 이처럼 혹독한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은 그 태반이 재정의 어려움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今年窘難之後 被難○○者 全家蕩盡 圖生者 隻身逃命 貧因之形 反甚於甲寅以前 縱有計策 無路施行 今雖破殘之餘 苟有財物 尙可有爲

 

금년 박해 이후에 화를 입은 사람은 전 재산이 다 없어졌고 살기를 도모한 사람은 홀몸으로 도망하여 가난한 형편이 도리어 갑인년(1794) 이전보다 더 심해졌으므로 설혹 무슨 계획이 있다 하여도 시행할 길이 없습니다. 지금 비록 일이 망가지고 부서진 뒤이지마는 진실로 재물만 있다면 아직도 할 일은 있습니다.

 

論敎友 則未曾顯著之中 猶有若干可用者 可以枚合矣 論時勢 則乙卯以後 年年多難者 盖有二故 一則因先王之疑 司鐸 必欲搜覓也 一則因老論之忌嫉南人 力圖抗陷也

 

교우로 말할 것 같으면 아직 발각되지 않은 이 가운데도 능력이 있는 사람이 다소 있어서 힘을 합쳐 함께 일을 벌일 만합니다. 정세로 말하면 을묘년(1795) 이후 해마다 더 어려워졌는데 거기에는 두 가지 까닭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선왕이 신부를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기어코 찾아내려 함이었고, 또 하나는 노론이 남인을 꺼리고 미워하여 애써 함정에 빠뜨리려 함에 원인이 있었습니다.

 

今也 先王之所疑者已破 老論之所嫉者已盡 敎中之表著者皆死 過了今年 可以寢息矣 論地方 則都城雖有五家統之法 敎友所居之里 則統法頗嚴

 

그런데 지금은 선왕이 의심하던 것은 이미 깨어졌고, 노론이 미워하던 것은 벌써 없어졌으며, 교우 중에도 겉으로 분명히 드러난 사람이 다 죽었으므로 금년만 지나면 박해가 잠잠해질 것입니다. 지방으로 말하면 서울에는 비록 오가작통의 법이 있어 교우가 살고 있는 마을에 있어서는 작통법이 몹시 엄하다 하더라도,

 

 

敎友不居之處 則作統有名無實 人皆晏如可以着脚矣 論經路 則畿忠全三道 素多敎友 慶尙江原兩道 近年避難者或居之 故廉探之官差 遍行於此五道

 

교우가 살지 아니하는 곳에서는 통을 만들어도 이름만 있고 실상은 없어서 사람들이 다 마음을 놓고 태평하게 발을 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성교가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형편으로 말할 것 같으면 경기, 충청, 전라 세 도는 본래 교우가 많이 있었고, 경상, 강원 두 도는 근래에 박해를 피해 간 사람이 간혹 살고 있으므로 염탐하는 관리가 이 다섯 도를 두루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黃海平安兩道 本無奉敎者 亦無流入者 聲聞寂然 俗人不以爲疑 邊門雖有譏察 一二年來 絶無可疑之人 則漸當疎緩 可以容手矣

 

황해 평안 두 도는 본래 성교를 받드는 사람이 없고 또한 흘러 들어간 사람도 없어서 들리는 말이 없이 조용하여 일반 사람들도 의심하지 아니합니다. 변문에서는 비록 조사와 감시가 있다고는 하나 1,2 년이래 전연 의심할 만한 사람이 없다면 차차 조사 감시가 소홀해지고 느슨해질 것이므로 손을 쓸 수 있을 것입니다.

 

論經綸 則從前之人 皆以廣揚爲務 今焉已矣 當以保存爲務 深溝固壘 謹嚴自守 成就已進敎者 訓誨未長成者 虔祈主佑 靜待機會 則可保無虞矣

 

경륜으로 말하면 전에 믿던 사람들은 모두 널리 드러내기를 일삼았지마는 이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는 미래에 대해 꼼꼼하게 준비하고 엄중하게 스스로를 지켜, 잘 보존해야 할 것입니다. 이미 입교한 사람은 완전히 성취시키고 아직 완숙하지 못한 사람은 가르쳐 훈계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정성껏 기구하면서 조용히 기회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면 성교를 잘 보존할 수가 있어 아무런 근심도 없을 것입니다.

 

甲寅之事 敎友們歡幸之極 嚴愼未至 誤了初頭一着 馴致無奈何之境 前車旣覆 殷鑑不逮 今誠加謹加愼 不自破綻 則患難無由而起矣

 

갑인년의(1794) 일에 (주문모 신부의 영입) 교우들이 너무 기뻐하고 다행하게 여긴 나머지 엄히 삼가지 못하여 처음에 한 번 실수한 것이 그만 차차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앞 수레가 이미 뒤집혀져, 귀감으로 삼을 만한 것이 그렇게 오래 지나지 않았으므로 이제 참으로 더욱 삼가고 조심하여 스스로 잘못하지 않는다면 환난이 일어날 까닭이 없습니다.

 

目下事勢如此 未必坐而待死 然此皆有財而後可論也 不料一方聖敎之存亡  命之生死 懸於惡瑪滿矣 只緣無財 至於敎亡而 死 則寃恨當復如何

 

현재의 형세가 이러하더라도 가만히 앉아서 죽기를 기다릴 것만은 아닙니다만 이것도 다 재물이 있는 연후에야 논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지역의 성교의 존망과 생령의 생사가 추악한 맘몬에 (인간을 유혹하는 물건, 물질) 달려 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단지 재물이 없다고 해서 성교가 멸망하고 영혼조차 죽는다면 그 원통하고 한스러움을 어찌 다시 대할 수 있겠습니까?.

 

玆敢冒昧陳請 伏望爲之乞哀於太西諸國 以爲東方扶持聖敎 救濟生 之資本 則當密密經營 妥當預備 然後續請再生之恩 願大爺矜憫而垂憐焉

 

이에 감히 몽매함을 무릅쓰고 말씀을 올려 청하는 것이니 바라옵건대 이를 위해 서양 여러 나라에 사정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나라에서 성교를 유지하고 생령을 구제할 자본이 된다면 꼼꼼하게 운영하고 올바르게 준비한 뒤에 다시 일어설 은혜를 청하겠습니다. 원컨대 대야 각하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가련함을 도와주십시오.

 

固知此請之煩瀆猥濫 然默而不求 求而不得 等是永死耳

 

진실로 이러한 청이 번거롭고 분수에 넘치는 일인 줄 압니다마는 말없는 가운데 있어 구하지도 아니하거나 구하려 하더라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면 이는 영원히 죽는 것과 같을 따름입니다. p93-97

 

求而不得 則死無遺恨 故敢此發口 罪人等形神赤光 全全仰托 願大爺上 慈善之恩主 下念貧窘之弱息 慰滿我之盼望 成就我之志願 則聖敎幸甚 生 幸甚

 

구하다가 얻지 못하고 죽는다 하더라도 여한이 없겠기에 감히 이렇게 입을 열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저희들은 몸과 마음이 빈 것을 모두 드러내며 우러러 부탁드립니다. 원하옵건대 각하께서는 위로 자애롭고 선하시어 은혜로우신 주님을 본받으시고, 아래로 가난하고 군색하여 잔약한 목숨을 생각하시어 저희의 어여쁜 소망을 넉넉히 위로해 주시고 저희의 바램을 이루어 주시면 이는 성교는 물론 살아있는 영혼에게도 매우 다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

 

罪人等 蒙不棄之恩 復許再生之路 當竭力以應承之 然不可以日月期也 經營周旋 少不下三數歲 而越境之行 難者有二 一則頭髮 一則口舌 頭髮易長 口舌難變

 

저희들을 은헤롭게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살아날 길을 허락하신다면 마땅히 이에 응하고 받들기에 온 힘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며칠이나 몇 달 동안에 기대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잘 조리하여 다스리고 주선하는데 적어도 3년은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국경을 넘어 다니는 데 어려운 일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머리털이요 또 하나는 말인데 머리털은 쉬 자라지만 말은 변하기 어렵습니다.

 

若言語便利 無甚危難 罪人之意 欲以本國一人 預先入堂 敎年少相公們以東國言語 以備後日之用 極爲妥當 未審鈞意若何

 

만약 말만 수월하게 한다면 크게 위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희들의 생각으로는 우리나라 사람 하나가 먼저 북경 천주당에 들어가서 나이 어린 젊은이들에게 우리나라의 말을 가르쳐 후일의 소용에 미리 대비하는 것이 극히 타당할 것 같습니다마는 주교님 생각에 어떠하신지요.

 

如蒙允許 則彼此打箇暗號 約束丁當 以冬門爲期 冬門不便 更以春門爲期 可望其順成

 

만약 허락하여 주신다면 서로 치는 횟수로 은밀히 부르되 어떤 소리로 약속하여 동문으로 기약하고 동문이 불편하면 다시 춘문으로 기약한다면 순조롭게 일을 이룰 가망이 있습니다.

 

而又有極便者 中國敎友熱心謹愼者一人 移家於柵門之內 務極嚴愼 不出聲聞 開了店鋪 接待行人 則往來通信之際 甚不費力 其中妙處 不可勝言

 

또한 가장 편리한 방법으로는 중국의 교우로서 열심하고 아주 신중한 사람을 책문 안으로 이사 시켜서 아주 조심하게 하여 소문이 나지 않도록 하고 상점을 열어서 지나가는 사람을 접대하면 오고 가거나 서신을 보낼 때에 별로 힘들지 아니할 것이니 그 가운데 절묘한 것이 있어 말로 다하지 못할 것입니다.

 

此是東國生命關頭 而爲之不甚難 如有矜念東國 如本神父者 必然樂從 伏望博詢于熱心愼密者 以圖必成如何

 

이것은 막다른 지경에 이른 우리나라 백성에 있어서는 생사의 갈림길이지만, 또한 행하기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만약 우리나라를 우리 신부님과 같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틀림없이 기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열성적이고 신중한 사람들에게 널리 물어 보시고 기필코 이룰 수 있도록 주선하여 주심이 어떠한가 하옵니다.

 

本國方在危疑乖亂之際 無論某事 皇上有命 必不敢不從

 

이 나라는 지금 사방이 위태롭고 어지러운 시기이므로 어떤 일이든지 황제의 명령만 있으면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乘此之時 敎宗致書皇上曰 吾欲傳敎朝鮮 而聞其國 屬在中朝 不通外國 故以此相請 願階下 勅該國 使之容接西士 當敎之以忠敬之道 盡忠於皇朝 以報階下之德 如是懇請 則皇上素知西士之忠謹 可望其允從

 

이러한 때를 타서 교황께서 중국 황제께 글을 보내 “내가 조선에 성교를 전하고자 하는데 들으니 그 나라는 중국에 속해 있고 다른 나라와는 교류하지 아니한다고 하여 이렇게 청합니다. 중국 황제폐하께서는 조선에 특별히 따로 칙령을 내리셔서 서양 선교사를 받아들이게 하여 마땅히 충성하고 공경하는 도리를 가르치고, 중국 황조에 충성을 다하여 폐하의 덕에 보답하게 하십시오.”하고 이와 같이 간청하면 황제는 본래 서양 선교사의 충성되고 근실함을 알고 있으므로 그 허락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是所謂挾天子以令諸侯 聖敎可以安行 未審中國時勢 可行此計否 願留意焉 主恩之於東國 可謂逈越尋常

 

이것이 이른바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는 것으로 교황성하의 가르침을 안전하게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중국의 현재 형편으로 보아 이 계획을 실행할 수 있을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으니 원하건대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나라에서의 천주님의 은혜는 일상을 초월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初未嘗有傳敎者來 而主特擧斯道而親卑之 繼又以授聖事者予之 種種特恩 指不勝屈 今年此罰 固知罪人等 辜負之攸致

 

일찍이 처음부터 전교하는 이가 온 일도 없이 천주께서 특별히 이 진리를 친히 가르쳐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낮추어 임하셨고 계속해서 또한 성사를 베풀어주실 분을 보내주시는 등 여러 가지 특별한 은혜를 받은 것이 이루 다 손가락을 꼽을 수 없을 지경입니다. 금년의 이 벌은 진실로 저희 죄인들의 허물을 다스리려고 하신 일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然主之仁慈 猶未全棄 似此殘破之中 特留一線之路 明係肯救東國之表  主佑旣如此 若中西諸國事主之人 合心全力而圖之 豈不能化殃爲吉 救活此手掌之地耶

 

그러나 천주님의 인자하심으로 우리를 아주 버리지 않으시고 이처럼 잔혹하게 파괴된 가운데 특별히 한 줄기 나아갈 길을 남겨 놓으셨음은 분명히 이 나라를 보호하고 구원해 주시려는 표증입니다. 천주님의 도우심이 이러하니 만약 주님을 섬기는 중국과 서양 여러 나라 사람들이 마음을 합하여 온힘을 다하여 도모한다면 어찌 재앙을 복으로 바꿀 수 없겠으며, 이 손바닥만한 땅을 구원해 살리지 못하겠습니까.

 

罪人等以此自慰而慰人 忍死延生 願大爺承行主旨 速施申救 伏聞近年中國 西賊猖獗 官軍屢敗 疆土日蹙 皇帝必有憂悶之心

 

저희들은 이러함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다른 사람을 위로하여 죽음을 참아 이기며 목숨을 지탱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컨대 주교 각하께서는 주님의 뜻을 받들어 행하시어 속히 구원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엎드려 듣건대 근년에 중국은 서쪽 지방에 도둑이 자꾸 일어나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관군이 여러번 패하고 국토가 날로 줄어든다고 하니 중국 황제는 틀림없이 근심하고 고민하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有能言善謀 皇帝素親信者 乘此進言曰 安不忘危 存不忘亡 長久之道也 本朝起自東土 奄有海內 垂二百年于今矣

 

혹시 말을 잘 하고 국정을 잘 헤아리며, 황제가 평소에 가까이 신임하는 사람으로 이런 기회를 타서 말씀드리되“편안할 때 위급함을 잊지 아니하고 안전할 때 멸망함을 잊지 아니하는 것이 영원한 이치입니다. 본조는 동쪽 땅에서 일어나 온 세상을 차지한지 지금까지 거의 2백 년에 이르렀습니다.

 

天下大勢 飜覆靡常 後世脫有不幸 當以寧古塔爲歸 而土地偏隘 不足以有爲 朝鮮之於寧古塔 只隔一水 烟火相望 呼應相聞 而地方三千餘里

 

천하의 대세는 엎어지고 뒤집혀 쓰러지는 일이 항상 있는 법이지만 후세에 와서 일을 그르쳐 불행한 일이 있으면 응당 영고탑으로 (청나라 조정의 발생 근거지, 만주 목단강성 영안현)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땅이 외지고 좁아서 있을 만한 곳이 못 됩니다. 조선은 영고탑에서 다만 강물 하나를 격해 있을 뿐으로 인가가 서로 바라보이고 부르면 서로 들리는데 그 땅이 사방 3천여 리입니다.

 

東南則土地肥饒 西北則士馬精强 山連千里 材木不可勝用 海環三面 魚鹽用之不竭 慶尙道之人蔘至賤 耽羅島之良馬極多

 

동남쪽 지방은 땅이 기름지고 서북쪽은 군사와 말이 매우 굳세고 힘이 있으며, 산이 천리나 이어져 있어 목재는 다 쓸 수가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삼면을 바다가 둘러싸고 고기와 소금이 없어지지 아니합니다. 경상도에는 인삼이 지천으로 많이 나고 탐라도에는 좋은 말이 매우 많습니다.

 

此亦天府之國 而李氏微弱 不絶如縷 女君臨朝 强臣弄權 政事乖亂 民情嗟怨 誠以此時命爲內服 混其衣服 通其出入 屬之於寧古塔 以廣皇家根本之地

 

이 또한 모든 생산물이 풍부한 나라이지만 이씨 왕조가 미약하여 겨우 실오라기 같이 끊어지지 않을 뿐입니다. 대왕대비가 섭정을 하여 세력 있는 신하가 권력을 마음대로 하므로 정사가 뒤틀리고 혼란하여 백성들은 탄식하고 원망합니다. 진실로 이러한 때에 속국이 될 것을 명하여 그 옷을 같이 입게 하고 왕래를 터놓아 조선을 영고탑에 소속시켜 황조의 근본이 되는 땅을 넓히십시오.

 

開撫按司於安州平壤之間 命親王監護其國 厚樹恩德 固結人心 天下有  割據遼瀋以東 保其巖阻 生聚敎訓 乘 而動 則此固萬世之基也

 

안주와 평양 사이에는 안무하는 관청을 개설하고 왕에게 친히 명령하여 그 나라를 살피고 보호하게 하십시오. 은덕을 후히 베풀어서 백성들의 마음을 굳게 뭉치게 하면 천하에 변란이 있더라도 요양과 심양의 동쪽 지역을 근거로 삼으면, 그 사이가 멀고 험난함으로 보호되고 장정을 모아 훈련시켰다가 틈이 생기는 것을 보아 움직이면 이것이 만대의 기초를 굳건하게 하는 것입니다.

 

又聞其國王年少 未及聚妃 若取一宗室女 名爲公主 嫁爲國后 則今王爲駙馬 後王爲外孫 自當盡忠於皇朝 亦足以牽制蒙古

 

또 들으니 조선의 왕은 나이가 어려서 아직 왕비를 맞이하지 아니하였다 하니 만약 중국 종실의 한 여자를 공주로 삼아 시집보내서 왕후가 되게 하면 지금의 왕은 부마가 될 것이고, 그 다음 왕은 외손이 되므로 스스로 마땅히 황조에 충성을 다할 것이고, 또한 넉넉히 몽고를 견재할 수 있을 것입니다.

 

失今不圖 一朝他人堀起 據而有之 國治兵强 則非徒不能爲我用 恐反爲 腋之患 時至不行 後悔莫追 願皇上斷而行之 (以此大意遷就其說務期合於中朝時勢)

 

때를 놓치고 계획을 세우지 아니하였다가는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이 불쑥 일어나서 차지하게 되어 그 나라가 안정되고 군사가 강해지면 한갓 우리에게 유용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도리어 가까이 있는 환난이 되지 아니할까 염려됩니다. 때가 왔는데도 행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후회하여도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원컨대 황제께서는 이를 결단하시어 시행하시기를 바랍니다.”<대강 이러한 뜻으로 올리니 그것은 중국 조정의 형편에 맞게 조절해서 말하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萬一皇上聽從 則聖敎之人 於中取事 庶可望其漸次大行 至於莫 之勢矣 中國敎友旣多 門路亦廣 豈無進言之蹊逕耶 側聞年前宣 之英學士 爲皇上椒房之親 亦與大爺相好

 

만약 중국 황제께서 이를 들어주시고 성교를 믿는 사람이 중간에서 일을 돕는다면 성교가 차차 크게 퍼져서 금지할 수 없을 형세에까지 이를 가능성도 많습니다. 중국에서는 이미 교우가 많고 접촉할 길도 넓으니 어찌 황제께 나아가 말씀드릴 방법이 없겠습니까? 곁에서 듣건대, 몇 년 전에 칙사로 온 영학사는 황후의 친척이고 또 각하와도 친하다고 합니다.

 

其家丁有敎友云 或可以 緣行計耶 若有如此人 力主此論 則可期皇上之聽納矣 雖然不可無端而命爲內服 必有一兩件罪過 然後可以籍口而行計

 

그 집 하인 중에 교우가 있다고 하니 혹시 그러한 인연으로 조심스럽게 계획을 실행할 수 있지 아니하겠습니까? 만약 그러한 사람이 있어 이 계획을 힘써 주장한다면 황제께서 듣고 받아들이시기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그러할지라도 까닭 없이 속국이 되라고 명령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반드시 한두 가지 죄가 될 만한 허물이 있은 연후에야 이를 구실 삼아 계획을 실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本國有許多不公不法之事 而不敢盡說 惟私造時憲書 及私造常平通寶 此二事 卽中朝之素知 而不問者 一經案  足以聲罪 此計固有益於皇家 亦無害於本國

 

이 나라에는 공정하지 못하고 법에 어긋나는 일이 허다하여 감히 하나하나 전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사사로이 시헌서를 만들어 시행한 일과 상평통보를 만든 일, 이 두 가지는 곧 중국 조정에서도 전부터 알면서도 문책하지 아니한 일이므로 한번 이 일을 조사하기만 하면 족히 죄를 나무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계획은 원래 중국 황실에 유익할 뿐 아니라 또한 이 나라에도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現今國勢危  決難久支 若爲內服 則奸臣之  自息 李氏之聲勢倍勝 奚但聖敎之安 亦是國家之福 請勿以爲迂 而 採納焉

 

현재 이 나라는 형세가 크게 위급하여 결코 오래 지탱하기 어려운데 만약 중국의 속국이 되면 간사한 신하들의 눈흘김이 저절로 사라질 것이고 이씨 왕조의 명성과 위세는 배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다만 성교의 안정만을 위함이겠습니까? 이것은 나라의 복이 될 것입니다. 청컨대 현실에 맞지 않아 사정에 어두운 말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가려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去年諭帖 獲承數年後差送大舶之命 今也則時勢已變 待然而來 則難望有成 此有一策 可使朝鮮人 奈何不得 束手從命 而但行之頗難 雖然請細陳之

 

지난해 가르침을 주신 편지에 몇 년 후에는 큰 배를 보내겠다는 분부는 받았습니다마는 지금은 형세가 많이 달라져서 무턱대고 와서는 성공을 바라기 어렵습니다. 여기에 한 계책이 있으므로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어찌할 도리 없이 꼼짝 못하고 명령에 복종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실행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비록 그렇다 하나 다음에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本國兵力 本來孱弱 爲萬國 末 而 今昇平二百年 民不知兵 上無長君 下無良臣 脫有不幸 土崩瓦解 可立而待也

 

이 나라의 병력은 본래 가냘프고 약해서 모든 나라 가운데 제일 끝인데다가 이제 태평한 세월을 2백년간이나 계속해 왔으므로 백성들은 군대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위로는 뛰어난 임금이 없고 아래에는 어진 신하가 없어서 자칫 불행한 일이 있기만 하면 흙더미처럼 와르르 무너져 버리고 기왓장처럼 부서질 것이 틀림없습니다.

 

得海舶數百  精兵五六萬 多載大砲等利害之兵器 兼帶能文解事之中士三四人 直抵海濱 致書國王曰 吾等卽西洋傳敎舶也 非爲子女玉帛而來 受命于敎宗 要救此一方生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전선 수백 척과 정병 5,6만을 얻어 대포 등 날카로운 무기를 많이 싣고 겸하여 글 잘하고 사리에 밝은 중국 선비 서너 명을 데리고 바로 이 나라 해변에 이르러 국왕에게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우리는 서양의 전교하는 배요, 자녀나 재물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교황의 명령을 받아 이 지역의 생령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貴國肯容一介傳敎之士 則吾無多求 必不放一丸一矢 必不動一塵一草 永結和好 鼓舞而去  不納天主之使 則當奉行主罰 死不旋踵

 

귀국에서 한 사람의 선교사를 용납하여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그 이상 더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며 한 방의 탄환이나 한 대의 화살도 쏘지 않고, 티끌 하나 풀 한 포기도 건드리지 않을 것이며 영원한 우호 조약만 맺고는 북 치고 춤추며 돌아갈 것이오. 그러나 만약 천주님의 사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마땅히 주님이 주시는 벌을 받들어 행하고 죽어도 발길을 돌리지 않을 것입니다.

 

王欲納一人 而免全國之罰乎 抑欲喪全國 而不納一人乎 王請擇之 天主聖敎 以忠孝慈愛爲工務 通國欽崇 則實王國無疆之福 吾無利焉 王請勿疑

 

왕은 한 사람의 선교사를 받아 들여 온 나라에 내리는 벌을 면하고자 하십니까? 아니면 나라 전체를 잃더라도 한 사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자 하십니까? 어느 하나를 택하시기 바랍니다. 천주님의 성교는 충효와 자애를 가장 힘쓰는 일로 삼고 있으므로 온 나라가 흠모하고 공경하면 실로 이 왕국의 무한한 복이 될 것이지 우리에게는 아무런 이익이 없습니다. 청컨대 왕은 의심치 마십시오.”합니다.

 

更將太西諸國 欽崇眞主 久安長治之效 及東洋各邦容接西士 有益無害之事 反覆曉諭 則必然全國震駭 不敢不從 舶數人數 能如所說則大善 若力不及則數十 五六千人 亦可用矣

 

그리고 또한 서양 여러 나라가 진실 되게 주님을 높이 공경하여 오래 편안하고 길이 다스려진 것을 본받아 동양 여러 나라도 서양 선교사를 용납하여 맞아들이는 것이 매우 유익할 뿐만 아니라 해로운 일이 없다는 것을 거듭해서 타이르면 반드시 온 나라가 놀라고 두려워하여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배와 사람의 수가 능히 말씀드린 대로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마는 만약 힘이 모자라면 배 수십 척에 5,6천명만 되어도 쓸 수 있을 것입니다.

 

數年前 大西洋商舶一隻 漂到我國東萊 有一敎友 登舟細見 回言卽此一隻 足敵我國戰船百 云 東人之毒害聖敎 非人性之酷虐也 實有二故

 

몇 해 전에 서양의 상선 한 척이 우리나라 동래에 표류하다가 도착하였는데 한 교우가 배에 올라 자세히 살펴보고서 돌아와 말하기를 "그 배 한 척이면 충분히 우리나라 전선 백 척은 대적할 만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성교를 혹독하게 해치는 것은 그 인간성이 독하고 사나워서가 아니고 실은 두 가지 까닭이 있습니다.

 

一則由黨論甚盛 籍此爲 陷之資也 一則由聞見孤陋 所知者惟宋耳 少有不同之行 則看作天地間大 怪

 

그 하나는 당파끼리의 논쟁이 몹시 심한데 이를 빙자하여 남을 배척하고 모함할 자료로 삼기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보고 듣고 따르는 것이 고루하여 안다는 것은 오직 송학뿐이므로 조금만 자기와 다른 행위가 있어도 천지간의 큰 변괴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p103-113

 

譬如窮鄕少孩 生長室中 不見外人 偶逢生面之客 則必大駭而啼 今日光景 正猶是也 其實多疑多  愚蒙柔弱 天下無雙 是故神父自首之後  敎衆之興亂 許久不敢行刑 的知敎友們之無能爲 然後乃敢大着 戮殺之

 

비유하건대 궁벽한 시골 어린아이가 방안에서만 자라서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다가 우연히 낯선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놀라 크게 울 것이니 오늘날 이 나라의 광경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실제로 의심과 두려움 많으며 어리석으면서도 무식하고 성품이 유약하기가 천하에 짝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부가 자수한 뒤에도 교우들이 소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오랫동안 감히 형을 집행하지 못하다가 교우들이 어찌하지 못할 것을 확실히 안 다음에야 감히 담이 켜져서 사형을 집행하였습니다.

 

然疑 之心 尙未解釋 乘此驚疑未定 臨之以必破之勢 震動其心 諭之以必無虞之里 開導其愚 則納與不納之間 利害較然 畏威懷安 必不敢拒絶

 

그래도 오히려 의심과 두려워하는 마음이 풀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의심과 두려움이 아직 가라앉지 아니한 때를 타서 반드시 쳐부술 기세로 대해서 그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반드시 근심할 것이 없다는 이치로 깨우치게 하여 그 어리석음을 열도록 충고하면 우리나라 조정에서 받아들이건 받아들이지 않건 간에 이로움과 해로움을 비교할 것이요, 위력을 두려워하고 편안함을 원하여 감히 꼭 거절하지 못할 것입니다.

 

此計雖難 行之則必然萬全 如有可爲之勢 極力圖之幸甚 幸甚 或言如此擧動 無論行之之難易 恐不合於聖敎表樣 罪人則曰 不然

 

이 계획이 비록 어렵지마는 행해지기만 하면 반드시 조금도 허술한 데가 없을 것입니다. 만일 행할 만한 형편이거든 힘을 다하여 도모하시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와 같은 일과 행동은 실행하기가 어렵고 쉽고 간에 성교에서 내세우는 명분에 부합하지는 않는다고 염려합니다만 저희 죄인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本國十年以來 致命者甚多 至於聖敎之司鐸 國家之重臣 亦皆束手就死 惡輩雖勅加以逆賊之名 實不得絲毫不忠之  良善之表 已孚於人心矣

 

이 나라에서 십 년 이래로 순교한 이가 매우 많아서 심지어 성교의 신부와 국가의 중신들까지도 꼼짝 못하고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성교를 미워하는 무리들이 비록 억지로 역적의 죄목을 뒤집어씌웠지마는 실은 털끝만한 불충의 증거도 잡지 못하였으며 그들의 어질고 착한 태도는 이미 사람들의 마음에 미덥고 진실함을 주고 있습니다.

 

若本國敎友 鼓 爲難 則實是壞表樣 太西則乃聖敎根本之地 二千年來 傳敎萬國 莫不歸化 而獨此彈丸東土 不但不卽順命 反來梗化 殘害聖敎 戮殺神司

 

만약 이 나라의 교우들이 시끄럽게 떠들어 난을 일으킨다면 그것이야말로 성교의 진실된 표양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서양은 곧 성교의 근본 되는 땅으로서 2천년 이래 모든 나라에 성교가 전해져서 귀화하지 아니한 곳이 없는데 홀로 이 탄알 만한 이 나라만이 다만 천주님의 명에 순종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도리어 가시나무가 되어 성교를 잔혹하게 해치고 형벌로 성직자를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爲此東洋二百年來所無之事 興師問罪 有何不可 據耶蘇聖訓 則不容傳敎之罪 更重於索多瑪惡本辣矣 雖殄滅此邦 亦無害於聖敎之表 此不過大張聲勢 以納傳敎而已

 

이러한 짓은 동양에서 2백년 이래 없었던 일이니 군사를 일으켜 죄를 묻는 것이 무엇이 옳지 아니하겠습니까? 예수의 거룩하신 가르치심에 의거하면 전교를 용납하지 않는 죄는 소돔과 고모라 보다도 무겁다고 하였으니 비록 이 나라를 멸망시킨다 하더라도 성교의 표양에 해로울 것이 없을 것인데 다만 지금의 이 계획은 성세를 크게 벌여서 전교를 받아들이게 함에 불과한 것입니다.

 

人民無所害 財物無所取 則又仁義之極 而卓異之表也 何患表樣之不美 但恐力不及此耳 或又曰 如此則恐奏聞中朝 貽害本堂 罪人曰此則容易

 

백성을 해치지 않고 재물을 빼앗지도 아니하고 또한 인과 의의 지극함을 모범으로 삼으니 오히려 뛰어난 표상일 뿐입니다. 어찌 명분의 아름답지 못함을 근심하겠습니까. 다만 힘이 미치지 못할 것을 염려할 뿐입니다. 어떤 이는 또 말하기를 이렇게 하면 그것이 중국에 보고되어 북경 본당에 해가 미칠 것이라고 합니다마는 저는 이것은 아주 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書中說敎宗曾命神父某 傳敎貴國 貴國不惟不容 反行戮殺 今又不納傳敎 則吾當馳一介之使 布告貴國之罪於中朝 以明我等吊民伐罪之意 本國恐露私殺中士之罪 見責於中朝 必不敢奏聞 此又不足慮也

 

편지 가운데 설명하기를‘교황께서 일찍이 신부 아무개에게 명하여 조선에 성교를 전하게 하였더니 조선에서는 이를 용납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도리어 죽이기까지 하였는데 이제 또 전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땅히 급히 사절을 보내서 조선의 죄를 중국에 알리고 우리들이 죄 지은 자를 토벌하여 백성을 위로하는 뜻을 밝히겠다.’고 하면 이 나라는 사사로이 중국 선비를 죽인 죄가 탄로 나서 중국의 문책을 당할까 염려하여 절대로 감히 보고하지 못할 것이니 이 또한 우려할 것이 못 됩니다.

 

柵內開 事 爲當今最要緊急先務 逾速成 逾大幸 其他計策 亦當 數三年內施行 然後可望有成 過了此時 則又不知世 之如何

 

책문 안에 점포를 여는 일은 지금 당장 가장 요긴하고도 시급한 일이므로 빨리 되면 될수록 더욱 다행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밖의 계책도 역시 3∼4년 안에 뒤이어 시행하여야 하겠고 그런 다음에야 일의 성공을 바랄 수 있겠습니다. 이 때를 지나면 또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습니다.

 

罪人等度日如年 自行無力 盼望甚殷 切願 哀憐而速救焉 今年窘難知名之敎友 鮮有免者 餘存者 當屛氣潛伏 以示滅絶之樣 然後聖敎可以保全 而敎友們 或托跡商賈 或避地遷徙 在路者頗多

 

저희들은 하루를 보내기가 한 해 와 같은데 스스로 행할 힘이 없어, 바라는 마음만 심히 간절합니다. 간곡히 원하오니 불쌍히 여기시어 속히 구원하여 주십시오. 금년의 박해에 이름이 알려진 교우로서 화를 면한 사람이 드물고 살아남은 사람도 숨을 죽이고 숨어 엎드려 끊어 없어진 것처럼 보여야만 성교가 보전될 수 있겠으므로 교우들은 혹은 장사꾼이 되어 돌아다니고 혹은 살던 곳을 피하여 다른 데로 이사를 가고 하여 길에서 헤매는 사람이 수없이 많습니다.

 

每當齋日 易致綻露 敢此仰請 凡今日東國敎友行路者 無論大小齋  行寬免 以爲韜晦保存之地如何 有一人 上次告解時 許願一主日內 守兩日大齋 限後次告解矣

 

재일을 당할 때마다 성교를 믿는 것이 쉽게 드러나므로 감히 이와 같이 우러러 바라오니 무릇 오늘날 우리나라 교우 중에 길가는 사람은 대소재를 막론하고 일체 관면하여 주셔서 그늘에 몸을 가려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게 하시어 생명을 보전하게 하심이 어떠할는지요. 어떤 사람은 지난번 고해 때 다음 고해 때까지 한 주일에 이틀씩 대재를 지키기로 허원하였습니다.

 

窘難後 此人棄家 避 流落山鄕 山間 飮食菲薄 再者 客中事勢非便 不得已不能守 而恐有許願不守之罪 敢請寬免 幷請問已往之不能守 或不爲罪耶

 

박해가 일어난 뒤에 그 사람은 집을 버리고 도망하여 두메산골을 돌아다녔는데 산골 음식이 보잘 것이 없고 또 객지의 형편이 몹시 불편하여 하는 수 없이 재를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허원하고도 지키지 못한 죄가 있을 줄 생각합니다마는 감히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여쭙건대 기왕에 지키지 못한 것도 혹 죄가 되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天主降生後一千八百一年 西滿達 瞻禮後一日 罪人多默等再拜謹具

 

천주 강생 후 1801년 시몬 다태오 축일 후 1일 죄인 토마스 등은 두 번 절하고 삼가 갖추어 아룁니다.

 

 

 

 

신성자(socho) (2005/10/08) :

사랑의 신비여/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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