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12.9.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랖-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신부
작성자송문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8-12-09 조회수1,588 추천수0 반대(0) 신고

 

루카 3, 1-6(대림 2 주일)

 

이제 우리는 대림 2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전례에서, <1독서><2독서><복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1독서>는 바룩 예언자가 전하는 아주 특별한 사건을 전해줍니다. 여기에서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자녀를 잃은 과부로 비유합니다. 그런데 그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광과 아름다움을 입어라.”(바룩 5,1)고 기쁨이 선포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에게서 나오는 자비와 의로움으로, 당신 영광의 빛 속에서 이스라엘을 즐거이 이끌어 주시리라.”(바룩 5,9)고 말합니다.

<2독서>는 바오로 사도가 필리피인들을 위해 드리는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필리 1,10-11)라고 기도합니다.

<복음>은 결론적으로,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6)고 말합니다.

 

우리는 지금, 구원을 보기 위해, 세례자 요한과 함께 광야에 나와 있습니다. 사실, ‘광야는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기에,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자신을 마주해야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사방이 트여 있어서, 어디 하나 숨을 데가 없으니 벌거벗고 자신의 실상을 낱낱이 확인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저에게는 우리 공동체가 바로 광야입니다. 제 실상을 낱낱이 확인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안에는 항상 고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과 부재를 동시에 체험하기도 합니다.

사실, 홀로 있을 때보다 형제들과 함께 있을 때가 훨씬 고독할 때가 많습니다. 홀로 있을 때는 자신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이 되고, 형제들과 함께 있을 때는 서로 다름과 그 차이로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함께 있을 때가 더 괴롭고 힘들고 고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이 광야로 불러내시어 사랑을 속삭여주십니다.

그러기에, 공동체가 바로 하느님께서 자신을 숨기시는 사막이요, 동시에 하느님께서 자신의 현존을 드러내시는 사막입니다. 곧 공동체가 저를 불러내어 사랑을 속삭여주는 아름다운 저의 광야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가정이 광야요, 본당이 광야요, 직장이 광야요, 이 세상이 광야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를 듣습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4-6)

 

요한은 자신이 단지 미리 주님의 길을 닦는 이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요한은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루카 3,3)

 

이를 <마르코> 복음사가는 병행구절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마르 1,4)

 

그는 용서를 선포하였지만, 결코 자신이 죄를 용서할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비록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표시로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결코 죄를 용서 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은 오직 하느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어 우리에게 죄의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주기까지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단지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준비를 시켰을 따름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성령을 불어넣을 그릇과 그 공간을 만들 수는 있었지만, 그 그릇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오셔서 바로 이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사명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그릇에 생명을 불어넣는 사명을 지니셨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과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사명의 차이뿐만 아니라, ‘신원의 차이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게 됩니다.

요한이 말하고 있는 것은 용서를 위한 회개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그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로서의 회개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선포한 회개는 하늘나라가 선물로 주어졌기에 그에 합당한 응답인 결과로서의 회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님께서용서를 위한 회개가 아니라, 용서를 받았기에 하는 회개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회개했기에 하늘나라가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가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기에 그에 합당한 삶으로서의 회개하는 것입니다. 곧 회개가 먼저가 아니라 용서가 먼저입니다.

 

이토록, 우리는 이미 용서와 은총을 입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용서하고, 그 은총을 나누어야 할 때입니다. 그러니 오늘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을 보내면서, 이미 와 있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알아보고, 신뢰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감사의 응답으로 진정한 회개로 성탄을 기다리고 맞이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여 그 뜨거운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