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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0811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08-11 조회수351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1년 8월 11일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21ㅡ19,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들을 마치시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 건너편 유다 지방으로 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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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용서에 대해 묻는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은 그가 내민 숫자로 대답을 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베드로가 주님께 물었던 용서가 몇 번이나 베풀어져야 하는가하는 문제는 사람이 죄로 인해 생긴 틈을 얼마나 참아주어야 하는가의 질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답하시는 예수님은 베드로가 말한 것과 전혀 다른 숫자와 의미로 답을 해주십니다. 

베드로는 일곱 번까지라고 말하며 일곱 번까지 하기 힘든 인간적 고민을 이야기했지만 예수님의 일곱번까지라도라는 말은 한계가 사라져 버린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일흔일곱번까지라도라는 말이 사람이 내미는 용서가 아닌 우리 모든 죄인을 용서하셔야 하는 하느님의 기준임을 설명해주십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우리가 받는 용서의 원래 모습을 임금의 예에서 보여줍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임금이 하느님이시고 빚진 사람이 우리라는 것은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듣습니다. 이 이야기는 마음을 촉촉하게 젖게 하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될 뻔하다가 급하게 비극으로 끝이 납니다. 이야기에서 임금은 이 사람의 빚을 탕감해주었지만 결국 그 빚의 책임을 묻게 되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빚을 졌던 사람은 탕감받았던 것의 몫을 감옥에서 다 하게 되는 운명을 맞습니다. 

이 이야기의 시작이 용서에 대한 것에서 나왔으니, 분명 무엇이 이 이야기를 갑작스런 비극으로 몰아갔는지는 용서와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임금의 용서는 우리가 말하는 상식에서의 용서와는 차이를 보입니다.

빚을 졌고 그것을 갚지 못하는 사람. 그의 죄는 빌린 돈에 있었고, 그가 용서를 받을 때 그 돈은 결코 갚아지지 않았습니다. 임금은 그에게 가진 것 모두를 잃고서라도 빚을 갚으라 말하지만 결코 자신의 사랑하는 것을 희생시키기 어려워하는 그리고 꼭 갚으리라 다짐한 사람을 보고 용서를 하게 됩니다. 

여기서 용서는 빚이 갚아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죄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잘못에서 일어서려는 이를 보는 임금의 마음에서 용서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이 용서는 용서를 청하고 용서를 하는 우리의 상식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자주 "빌어야 용서를 해주지"라는 말을 습관처럼 사용하는데,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용서는 그런 공식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임금이 이 사람을 헤아리는 마음에서 용서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임금이 마음을 돌린 이유는 무엇입니까? 갑자기 빌려준 돈이 아까웠거나 그가 갚지 않았다는 것에 화가 밀려든 것은 아닙니다. 임금의 용서에서 이미 받아야 할 돈은 탕감되었습니다. 갚을 돈은 남아있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되돌려진 이유는 이 사람이 자신이 받은 용서의 뜻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보게되는 용서를 받았으니 용서를 해 주어야 한다는 말은 임금이 그를 용서한 까닭을 헤아리고 그처럼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빚을 진 사람은 자신의 채무관계 앞에서 임금에게서 본 것을 자신의 처지와 연결짓지 못합니다. 그가 임금의 행동을 따라하지 못했다는 결론 보다 이 사람은 임금의 용서가 바로 자신을 바라보는 임금의 마음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임금처럼 자신에게 도움을 청한 사람을 바라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미 용서받은 사람, 그가 다시 감옥에 갇혀야 하는 처지는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이미 용서하셨기에 그에게 남아있는 빚은 없는 상태였고, 그래서 그가 다시 끌려갔을 때 그는 당연히 억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판결은 우리의 상식으로 풀 수 있는 문제가 못됩니다. 용서를 받았으니 더 열심히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 할 것이라 생각하는 우리의 모습에서는 아무 빚도 남아있지 않은 이라서 더더욱 하느님께 더 불만일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예수님은 용서를 묻는 우리에게 용서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라 이야기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는 용서 중 갚을 수없는 아니 갚지도 않고서 용서를 받는 우리의 고해성사를 생각해보라 청하십니다. 고해 성사에서 우리는 무수한 죄를 고백하지만 사실 그 죄 대로 기워갚았기 때문에 용서를 받는 일은 드뭅니다. 그리고 그 용서를 하시는 하느님께 그것을 기워갚을 길 조차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내 모든 것을 빼앗겨도 할 말이 없는 잘못들 뿐입니다. 


잘못의 시간은 지나갔기에 되돌릴수도 없고, 그 죄의 기억은 평생을 사라지지 않습니다. 갚으려 해도 상처까지 기워갚지는 못하고, 잊혀진다고 말하는 것도 그러길 바라는 것 이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용서 받습니다. 기워갚을 길도 없는데, 그저 잘 살도록 노력하고 다시 길을 어긋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 고작인데도 용서를 받습니다. 그런 말도 안되는 용서는 하느님이 우리를 보시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방적인 용서입니다. 조건이나 거래가 성립하지 않는 용서는 그래서 이유도 모른채 이루어지고 그 횟수도 한계가 없이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느님께 용서를 받습니다. 우리들은 잘못했다고 빌었기에 용서를 받는다고들 생각하지만 하느님은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잘못까지 아시면서도 용서를 하십니다. 그분 앞에 서 있는 불완전한 우리의 처지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을 사랑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용서는 이 임금, 하느님을 닮아야 합니다. 모든 일에서 용서할 기회를 잘못한 사람에게 주지 말고 우리가 먼저 그를 보는 눈에서 이 임금을 따라야 합니다. 거래처럼 용서를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그 용서의 권한을 쥐었다고 잘못한 이 위에 서려는 태도조차 잘못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분명 고해소에서 나가는 순간 나는 죄가 없다고 말하며 나에게 잘못했거나 나보다 부족한 사람의 도덕성에 대해 비하하고 조롱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용서 받은 것이 마치 나의 눈물어린 반성의 결과인 듯 생각한다면 더더욱 우리는 하느님의 용서를 훈장처럼 여기고 자신의 삶에는 대단한 방어막처럼 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동료 하느님을 아는 이들에게서 증언될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용서라는 사랑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 용서가 사랑에서 나와 우리를 헤아림을 기억한다면 우리 역시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을 그 눈으로 그 마음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혹시라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진노하시어 우리의 죄를 물으실 날이 있다면 우리는 분명 "이미 용서하신 일이 아니시냐"며 대들 것이고 하느님은 우리가 지었던 그 모든 죄까지 우리에게 덮으시어 우리의 모습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그 모든 죄를 기워갚는 것은 그 추한 모습을 우리가 보는 것일테고, 반대로 그럼에도 우리를 사랑하신 하느님께 극도의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일일 것입니다. 


용서는 눈 앞의 죄인의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람을 보는 눈과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용서는 하느님의 사랑의 다른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닮아있다고 말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소중한 근거가 된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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