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한국천주교회 희망의 아이콘 최양업(토마스) 신부 선종 157주년 추모(10)
작성자박관우 쪽지 캡슐 작성일2018-12-13 조회수1,354 추천수0 반대(0) 신고

중국 상하이에서 김대건과 함께 부제품을 받았던 최양업은 조선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으나 결국 실패로 끝나고 1849년 4월 15일 상하이에서 예수회 소속의 강남교구장 마레스카 주교로부터 사제로 서품되었다.


사제서품 이후 5월에 요동으로 떠났으며, 7개월간 장차 조선교구의 4대 교구장이 될 베르뇌 신부를 도와 병자를 방문하고 주일에 강론을 하였으며, 또한 교우촌을 방문하면서 사목자로서 임무를 수행하였다.


1849년 12월 다시 조선으로 입국을 시도하기 위하여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변문을 향하여 떠났으나 외국 신부의 입국이 어렵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불가피하게 홀로 입국을 시도하게 되었으니 당시 성직자가 조선에 입국한다는 것이 얼마나 험난한 길이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최양업 신부가 변문을 통과할 때는 어두운 밤이었으며, 거센 바람과 함께 혹독한 추위로 인하여 경비병의 감시가 다소 소홀하였던 것인데 그는 바로 이 틈을 최대한 활용하여 국경을 넘어 서울에 도착하였다.


우여곡절속에 마침내 조선에 성공적으로 입국한 최양업 신부는 서울에서 하루를 머물고 충청도에 있었던 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를 만난 이후 전라도 지역에서부터 사목활동을 시작하였다.


6개월동안 5,000리를 순회하는 가운데 신자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면서 헌신적인 목자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1851년 페레올 주교의 건강은 시간이 갈수록 악화되었으며, 더불어 다블뤼 신부도 건강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최양업 신부는 8개월동안 많은 공소를 순회하면서 교우촌에 있는 신자들을 방문하는 강행군을 하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그로부터 10년후에 선종을 하는데 아마도 이러한 강행군이 최양업 신부의 건강에 어떠한 식으로든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본다.


한편 최양업 신부는 휴가를 이용하여 충북 배티의 교우촌이 있는 절골에서 동생들로부터 부모의 순교에 관련된 자료와 다른 순교자들의 자료를 수집하는 활동까지 하였으니 그가 평소에 얼마나 부지런한 성직자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최양업 신부가 간호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으며, 더불어 전국에 있는 12,000명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어야 하였으니 당시 성직자로서의 그의 여정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