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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례] 전례 정신의 양성을 위하여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0-08-07 조회수1,861 추천수0

전례 정신의 양성을 위하여

 

 

올바른 기도가 올바른 신앙을 낳고, 올바른 신앙은 올바른 실천(삶)으로 이어지며, 실천은 다시 기도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 전례가 이런 순환주기 속에 튼튼히 뿌리내릴 때, 전례의 위기도 교회의 위기도 더는 발붙일 데가 없을 것이다.

 

최근 들어 구미의 신학자들이 대놓고 "교회에 과연 미래가 있는가?"라고 질문하고 있다. 과연, 한때 '그리스도교 세계'라고 불리던 곳이 지금 많은 신학교들과 수도회를 통폐합이나 폐쇄 위기를 겪고 있다. 그러나 이 신앙의 위기를 실감하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 주일 첨례 교우들의 수가 이 오래전에 확연히 줄어든 이래 지금도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주일 미사 전례의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것이기도 하다. 요컨대, 신앙의 위기는 '전례의 위기'와 긴밀한 관계에 있다.

 

물론 한국 교회의 경우에 유럽처럼 상황이 극단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결코 사돈 남 말할 처지만은 아닌 듯하다.

 

아래에, 본당과 수도 단체들을 막론하고 우리 교회에서 전례의 실천과 관련해서 감안해야 한다고 느껴지는 점들을 제시해보려 한다. 물론 이것은 전문가의 자격으로가 아니라(필자는 전례학 전공자가 아니다),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과 전례(시간전례, 특히 성찬 전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인 생활을 형제들과 함께 영위해 가는 한 수도자로서 드리는 말씀이다.

 

 

전례정신의 회복

 

도처에서 관찰되는 현상을 기초로 판단하건대 우리에게 참된 '전례 영성'의 바탕이 대단히 허술하다. 많은 경우 전례는 하나의 외적 의식이나 행사로, 마치 국민의례처럼 천주교인이라면 기본적으로 치러야만 하는 일차적 의무 정도로 여겨지는 것 같다. 사실 주일 첨례가 많은 교우들에게 힘이 아니라 짐으로, 구속이 아니라 구속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사실을 화해의 성사를 집전하면서 자주 절감하게 된다.

 

나아가, '전례'라고 하면 무의식적으로, 무슨 축일에는 무슨 색깔의 제의를 입고 제대에 초를 몇 개 놓으며 행렬과 분향은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현실이다. 전례에 대한 이런 피상적이고 빈약한 이해 또는 오해는 심지어 성직자 수도자들에게도 큰 예외는 아닌 듯하다. 이는 우리의 전례 의식이 얼마나 일천한지를 단숨에 드러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또한, 본격적인 영성 생활은 전례라는 '외적 형식'을 넘어서 이루어진다고 보는 무의식적 관념으로 전례의 의미를 과소평가하는 현상도 비교적 널리 퍼져 있음을 본다. 이런 상황에서 전례야말로 우리 신앙생활이 지향하는 "정점이자 동시에 거기에서 교회의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거룩한 공의회], 10항)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요컨대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특징짓고 양육하던 저 '전례 정신(mens liturgica)'의 회복이 시급하다고 본다. 그리하여 전례 거행은 다른 어떤 기도들보다 "탁월하게 거룩한 행위"로서 "그 효과는 교회의 다른 어떠한 행위와 같은 정도로 비교될 수 없다."(전례 헌장, 7항)는 사실을 깊이 의식화하거나 내면화하는 일이 꼭 필요하다고 믿는다.

 

이를 위해서 성경, 교회 그리고 세상이라는 '맥락(context)'으로 전례를 이해하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아래에 이어지는 글은 투박하나마 이 맥락을 중심으로 우리의 전례 이해와 실천에 관해 나름으로 사색하고 요약한 결과물이다.

 

 

1. 성경

 

무엇보다 먼저 전례는 하느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성경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강조해야 한다고 본다. 전례 모임이란 무엇보다 신앙 공동체가 말씀을 읽고(듣고) 해석하고 선포하는 본연의 자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교회와, 그리고 교회가 거행하는 전례와 애초부터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점을 깊이 알아듣고 성경에 담긴 하느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영성 생활을 해 나가는 공동체는 전례 거행의 현장이 곧바로 영적 체험의 현장이라는 것을 증언한다. 이런 전례의 현장에서 울려 퍼지는 하느님 말씀은 언제나 힘이 있고 살아 있어서 사람의 마음을 바로 건드리는 효력을 지닌다(히브 4,12). 전례 정신은 이처럼 성경 정신(mens biblica)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고, 같은 이유로 전례 기도 역시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요컨대 전례는 개인과 공동체 영성 생활의 정점으로서, 개인의 거룩한 독서는 교회 공동체의 전례를 준비하고 심화하며 연장한다. 거룩한 독서오 전례의 이 연결이 복음적 공동체가 거행하는 전례 특유의 영적 생기와 활력의 비결일 터이다. 

 

전례주년을 따라 유장아게 흘러가는 하느님 말씀의 강에서 날마다 그날 전례의 말씀을 미리 준비하고 충분히 소화하며 내면화하는 이의 거룩한 독서는 전례 중에 선포된 말씀의 진동 아래 진행되며, 이런 식으로 심화된 거룩한 독서는 다시금 공동체 전례에 크나큰 영적 생기로 합류되어 흘러 들어간다. 이처럼 공적 전례와(개인 기도로서의) 거룩한 독서는 훌륭히 통합되고 조화되어 스승 예수의 충만한 모습에 이르기까지 제자를 양성한다. 그리하여 교회 역시 이런 공동체 구성원들의 친교를 통하여 나날이 건설되어 가는 것이다.

 

근년에 들어 우리 교회에 '거룩한 독서'의 바람이 불고 있다. 가히 '새로운 성경 운동'이라 할 만하다. 이것은 무엇보다 기도로써 성경에 담긴 하느님의 말씀에 접근하고자 하는 태도로서 성경에 숨은 말씀의 힘(dynamis)을 영적으로 재발견하도록 이끈다. 이렇게 되면 전례도 재발견할 수밖에 없으리라 전망한다. "성경을 모르면 그리스도를 모른다."(성 예로니모)는 말이 사실이라면, "전례를 모르면 그리스도를 모른다."는 말 역시 사실이어야 한다. 전례에서 거행되고 있는 것은 성경에 담긴 동일한 바로 그 '신비'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성경이야말로 전례의 모어라고 할 만큼, 모든 전례 기도문과 동작의 준거가 성경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렉시오 디비나'와 '신비 교육(mystagogia)'은 성경 정신고 전례 정신으로써 하느님 백성의 신앙 감가(sensus fidei)을 튼튼히 양성하는 양대 젖줄이다. 이 둘은 어제나 오늘이나 신앙 교육의 마르지 않는 원천이다.

 

끊임없이 '이벤트성 기획'을 벌이고 이른바 유명 강사들의 강의나 영성 프로그램 또는 기법들의 개발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은 이렇게 '원천으로(ad fontes)' 돌아가는 능력이 약화된 데서 생긴다고 본다. 그러므로 말씀에 토대를 둔 성경 영성이 그러하듯 전례 영성 역시 교회 안의 수많은 '영성들' 중 하나가 아니라 그것들의 토대요 준거가 되는 것으로서, 오늘의 하느님 백성을 위해 말하자면 '선택 과목'이 아니라 '필수 과목'인 것이다.

 

 

2. 교회

 

'전례 헌장'은 하느님 백성이 전례를 잘 거행할 때야말로 교회가 자신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는 순간이라고 가르친다. 전례에 모인 회중이야말로 교회의 가장 근본적이고도 원초적인 형태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전례를 통해 예식만 거행할 뿐 아니라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밝힌다(Dominicae cenae, 13). 교회으 신원이 드러나는 이 자리는 동시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나 개인의 내밀한 신원이 드러나는 자리이기도 하다.

 

'전례 영성' 이라 함은 이처럼 신앙인이 고독한 단독자로서의 '나'를 넘어서 하느님의 아들들로서 이루는 '우리' 곧 '교회적 나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교회의 이콘이요 말씀의 신부인 전례 모임의 '우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베네딕토 16세). 전례 거행의 주체는 바로 이런 '우리(교회 공동체)' 로서의 '나'인 것이다. 흔히 '교회와 느끼기(sentire cum Ecclesia)'라고 표현되는 이런 영성은 오늘처럼 교회 안팎으로 개인주의적 영성이 세력을 떨치는 때에는 인기가 없다. 그러나 '교회'라는 이 지점이야말로 성경과 함께 전례의 이해와 거행을 올바로 이끄는 가장 중요한 맥락이 아닐 수 없다.

 

성찬 전례를 예로 들어 보자면, 성제 축성과 영성체가 개인의 영성 심화를 우선적으로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받아모시는 바로 그 '성체'로 변모되어 교회 공동체와 한몸을 이루는 일이 목적이다(성 아우구스티노). 옛 교부들의 관점으로는, 제대에서 축성되어 신비로이 그리스도의 몸이 된 그 몸(Corpus mysticum)의 완성태는 그리스도의 진짜 몸(Corpus verum), 곧 친교를 이룬 교회 공동체였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영성체'를 알아듣는 우리 시선이 그리스도의 신비적 몸을 받아 모시고 그분과 개인적으로 내밀한 일치를 이루는 데에만 머무는 현실을 반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말씀 전례에서나(시간 전례 포함) 성찬 전례에서나 전례 행위의 궁극적 주체는 늘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언제나 강조해야 한다. 교회는 사람들이 모여 이룬 것(congregatio)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에 의해 소집되어 이루어진 것(convocatio)이기 때문이다. '교회'로 번역된 qahal, ekklesia란 말이 이뜻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는님 말씀의 이 호출, 또는 부르심에 대한 백성의 응답이야말로 최초의 그리고 근본적인 전례 행위가 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옛 교부들은 모든 전례 거행은 '사람의 일'이기 이전에 '하느님의 일(opus Dei_)'이라고 보았다. 하느님께서 주도권을 쥐고 거행하시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교우들이 모인 다음에(populo congregato)" 사제가 입당해야 한다는 규정이([로마 미사 전례서 총지침] 25항) 의미심장하다. 교우들을 기다리며 맞이하는 이는 주례자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이며, 주례자 역시 소집도니 백성 중 하나라는 사실을 일러주고 있기 때문이다. 말씀기도(독서의 기도)가 "하느님, 제 입술을 열어주소서."(시편 51,17)라는 기도로 시작되어야 한다는 교부들의 전통도,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기도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의식을 보여준다.

 

이런 의식으로써 전례 기도는 내면적으로 심화되며 깊은 개인 기도로 들어가는 단초가 된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말씀 안에 현존하시어, 교회에서 성경을 읽을 때에는 당신 친히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공의회의 가르침도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전례 헌장 7항). 이런 의식으로 참여하는 이에게 전례는 '기도의 학교' 역할을 하는 것이니, 전례를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몸소 당신 백성에게 기도를 가르치신다.

 

[사목, 2007년 3월호, 이연학 신부 / 김종헌 신부의 전례 & 전례음악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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