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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강론] <연중 제15주일 본문+해설+묵상>-김수복
작성자김종연 쪽지 캡슐 작성일2010-07-09 조회수2,161 추천수0
 

 

 

 

복음해설(2)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가?(10,25-37)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던진 질문은 제자가 되는 일에 관한 교훈을 이어갈 기회를 예수께 드린다. 예수님의 답변은 참된 제자라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가리켜 보인다. 즉 겸손하고 지혜롭고 현명해야 한다는 것이다(그리고 그것은 율법에 정통한 사람으로서가 아니다.). 그 답변은 이 주제를 루카 10,21-22의 주제와 연결시킨다.

이 이야기는 유다교 스승들의 전형적인 교육 방법을 따른다. 즉 제자가 질문을 던지고 스승이 답변을 해 주는 식이다. 이 이야기의 첫째 부분(25-28절)은, 더 총체적이고 이론적인 부분으로서, 영원한 생명에 관하여 언급한다. 이 부분은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볼 수 있다.

- 율법교사가 질문을 던진다(25절).

- 스승께서 반대로 질문을 던지신다(26절).

- 스승께서 옳게 답했다고 인정해 주신다(28절).

둘째 부분(29-37절)은, 더 구체적인 부분으로서, 모범 사례를 들어주신다. 둘째 부분은 이렇게 나누어 볼 수 있다.

- 질문(29절)

- 비유(30-35절)

- 반대 질문(36절)

- 율법교사의 답변(37ㄱ절)

- 스승께서 너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신다(37ㄴ절).

이 둘째 부분은 첫째 부분의 노선 위에서 꾸려진다. 예수께서는 반대 질문에 앞서 한 가지 비유를 들려주신다.

25-28절: 시작하는 장면에서 루카는 아마 마르 12,28-34를 따르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앞으로는 이 이야기를 뺄 것이기 때문이다(20,40).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이 바리사이,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율법학자, 루카 복음서에서는 모세 율법에 정통한(‘그람마테우스’) 율법학자(‘노미코스’)다. 마르코 복음서와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과 말을 나누고 있는 사람이 율법 가운데 가장 큰 계명에 관하여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을 독자로 삼고 있는 루카 복음서에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고 있다.

예수께서는 반대 질문에서 율법교사에게 거절할 수 없는 어떤 것, 즉 토라에 호소하신다. 율법교사의 답변은 성경을 인용하면서 신명 6,5와 레위 19,18을 연결시킨다. 예수께서는 7,43에서처럼 그의 답변을 옳다고 인정하신다.

29절: 처음서부터 율법교사는 논쟁할 목적으로 예수께 접근한다. 교리와 실천에 관한 예수의 관점을 따지고 싶은 것이다(“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참조. 루카 4,16-31; 7,18-23). 율법교사가 예수님의 반대 질문에 내놓은 단순한 답변은 그 답변이 종교 지식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는 유다인이라면 누구든지 알고 있던 내용임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논점은 “저의 이웃은 누구입니까?”다.

30-35절: 레위기 본문들에서, ‘이웃’은 이스라엘 사람이었다(레위 19,18). 이 범위가 다음에 가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사는 이방인에게까지 넓어졌다(레위 19,34). 그러나 랍비들의 가르침은 그 이상을 넘지 못했던 것 같다. 그와 반대로, 예수님이 들려주신 비유는 극단적인 경우를 제시한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담당하는 자들의 이기적인 태도와 강도들에게 당한 사람을 서슴없이 너그럽게 돌보아 준 사마리아 사람, 유다인들이 이단자라고 그렇듯 멸시하던 사마리아 사람의 태도를 비교하신다. 예수께서 들려주신 그 극단적인 비유를 듣고서, 청중은 사랑하라는 계명에는 경계가 없음을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가는 길은 아주 가팔랐다. 예루살렘은 해발 760미터이고 예리코는 바다 수면보다 250미터 낮았기 때문이다. 그 길목에는 강도떼(그리스어로 ‘레스테스’)가 출몰하곤 했다. 복음서들에서는 바라빠(요한 18,40) 및 예수님과 더불어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마르 15,27)에게도 그와 같은 개념을 적용했다. 사제와 레위인은 경건한 유다인의 전형이라 할 수 있었다. 그 두 사람은 이스라엘 사제직에서 직급이 달랐다. 본문은 말을 하지 않지만, 그 두 사람은 강도당한 사람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면서 죽은 사람을 접촉해서는 안 된다는 정결법 때문에 그 사람에게 접근하지 않았을 것이다(참조. 민수 19,2-13).

그때 사마리아 사람 한 명이 무대에 등장한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적으로 여기고 있었다(집회 50,25-26; 요한 4,9; 8,48; 마태 10,5 등). 2열왕 17,24-41을 보면, 사마리아인들의 기원은 다섯 이방인 집단이 강제 이주당하여 사마리아에 정착한 데서 비롯된다. 그렇게 하여 사마리아가 이방인 관습에 물들게 되었다. 유다인들은 예루살렘에서 하느님께 예배를 드린 반면, 사마리아인들은 가리짐 산정에서 하느님께 예배를 드렸다. 사마리아인들은 모세오경만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영원한 생명의 비밀을 간직한 사람은 이방인 취급을 받는 그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 사마리아 사람의 종교는 예루살렘의 사제들의 종교만큼 완전하지도 못하고 순수하지도 못하다고 평가절하당하고 있었다. 그런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들에게 당한 사람을 보고 동정심이 일어, 율법에 구애를 받지 않고 그 사람을 돌보아준다. 그의 사랑은 이해관계를 떠난 인격적인 사랑이었다.

36절: 예수께서는 비유를 들어 이야기를 마친 다음 율법교사에게 반대 질문을 던지신다.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라는 이 반대 질문은 앞에 제기된 질문에 논리적으로 응답하는 질문이다. 율법교사의 답변은 강도들에게 당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같은 민족인 유다인이 아니라 유다인들이 적으로 여기는 사마리아 사람임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대 질문은 한걸음 더 나아간다. 왜냐하면 이웃관계에서 순서를 바꾸어놓으시기 때문이다. 율법교사는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질문을 던졌었다. 예수님의 반대 질문은 거꾸로 말한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당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이 질문으로 예수께서는 논쟁을 다른 차원으로 가져가신다. 즉 참된 이웃은 법적인 내 이웃이 아니라 나를 진정한 이웃으로 느끼고 도와주는 사람, 행동하는 사람임을 가르쳐주신다. 이렇게 이웃이 누구인가를 찾는 것은 기본적으로 법적인 문제를 떠나서 마음과 행동으로 사랑을 보여주는 데 있음을 분명히 밝히신다.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려 하는 율법교사의 의도를 발가벗기신다. 단순히 가깝다 해서 사랑이 우러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과 행동이 가까운 사람을 만든다.

37절: 예수님의 반대 질문은 꼼짝 못하게 하는 질문이다. 율법교사는 강도들에게 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이상한 요소 한 가지는 율법교사가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예수께서는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라는 명령으로 그 문제를 마감하신다. 그 명령은 복음서 독자 모두에게 내리는 명령이다.

위에서 한 말을 요약해 본다. ㄱ) 율법교사가 예수께 던진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은 의심할 여지없이 모든 제자가 제기해야 할 기본 질문이다. 율법교사처럼 독자는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얻을 수 있다. ㄴ) 예수께서 들려주신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교훈을 주기 위하여 내세운 인물들이다.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종교적 입장으로부터 상반되는 두 가지 태도가 나온다. 사제들은 멀리 피해 지나간다. 그와 반대로 이단자 취급을 받는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들에게 당한 사람을 이웃으로 인정하고 그를 도와 치료해 주고 잃어버린 건강과 존엄성을 되찾아준다. 같은 민족이나 가까이 산다고 해서 이웃이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그들과 동고동락함으로서 그들을 이웃으로 만든다. ㄷ) 율법교사는 예수님과 나눈 대화 마지막에 이웃 사랑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과연 그 율법교사가 참된 이웃사랑을 실천할까? 본문은 그 질문을 우리 모두에게 던지고 있다. 더구나, 이웃사랑의 범위와 특징에 관하여 독자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서 놀라운 귀감을 발견할 수 있다.


연중 제15주일


제1독서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어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30,10-14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0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이 율법서에 쓰인 그분의 계명들과 규정들을 지키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11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계명은 너희에게 힘든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12 그것은 하늘에 있지도 않다.

그러니 ‘누가 하늘로 올라가서 그것을 가져다가 우리에게 들려주리오? 그러면 우리가 실천할 터인데.’ 하고 말할 필요가 없다.

13 또 그것은 바다 건너편에 있지도 않다. 그러니 ‘누가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서 그것을 가져다가 우리에게 들려주리오? 그러면 우리가 실천할 터인데.’ 하고 말할 필요도 없다.

14 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69(68),14와 17.30-31.33-34.36ㄱㄴ과 37(◎ 33 참조)

◎ 가난한 이들아, 하느님을 찾아라. 너희 마음 기운 차려라.

○ 주님, 주님 마음에 드시는 때에,

저의 기도가 주님께 다다르게 하소서.

주 하느님, 주님의 크신 자애로,

주님 구원의 진실로 제게 응답하소서.

주님, 주님의 자애가 너그러우시니 저에게 응답하소서.

주님의 크신 자비에 따라 저를 돌아보소서. ◎

○ 저는 가련하고 고통 중에 있나이다.

하느님, 저를 도우시어 보호하소서.

제가 하느님의 이름을 노래로 찬양하리이다.

송가로 주님을 칭송하리이다. ◎

○ 가난한 이들이 이를 보고 즐거워하리라.

하느님을 찾는 이들아, 너희 마음 기운 차려라.

주님께서는 불쌍한 이들의 소리를 들어 주시고,

사로잡힌 당신 백성을 멸시하지 않으시도다. ◎

○ 하느님께서는 시온을 구하시고,

유다의 성읍들을 세우시도다.

주님 종들의 후손이 그 땅을 상속하여,

그분 이름을 사랑하는 이들이 그곳에서 살아가리라. ◎ 

 

제2독서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입니다. 1,15-20

15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16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17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18 그분은 또한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시작이시며,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맏이이십니다. 그리하여 만물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십니다. 19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20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환호송


요한 6,63ㄷ.68ㄷ 참조

◎ 알렐루야.

○ 주님, 주님의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

◎ 알렐루야. 

 

복음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25-37

그때에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영성체송


시편 84(83),4-5

만군의 주님, 저의 임금님, 저의 하느님,

주님의 제단 곁에 참새도 집을 마련하고,

제비도 제 둥지가 있어 그곳에 새끼들을 치나이다.

주님의 집에 사는 이들은 행복하리니,

그들은 늘 주님을 찬양하리이다. 


해설과 묵상


제1독서(신명 30,10-14) 해설

<말씀이 너희에게 가까이 있으니 그를 준수하라>


신명기에 실려 있는 이 세 번째의 담화문도 모세가 발표한 것으로 되어 있다. 모세는 이 담화문을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된 땅을 차지하기 바로 앞에 발표했을 것이다. 이 담화문은 약속된 땅 안에서 우상을 단호히 물리치고 하느님께 충성을 바치도록 당부하고 있다. 그리고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들’을 기념한 다음(29,1-7),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다시 새롭게 하고(29,9 이하), 계약에서 비롯된 의무들을 재차 다짐하고, 믿음이 약한 자들을 위하여 간구하도록 당부한다. 믿음을 저버린 자들은 먼 땅으로 귀양살이를 하게 되리라고 말한다(바빌론 귀양살이가 분명하게 암시되고 있다).

자기 잘못으로 인하여 귀양살이하는 가운데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을 다 쏟아 하느님께 회개하여 돌아오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30,10). 귀양살이하는 사람들은 그 하느님의 말씀을 쉽게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 비참한 상황에서 더 이상 모세의 중개 또는 예언자들(특히 요나)의 중개를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귀양살이하는 동안 겸손해진 가난한 사람들 자신의 마음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근본적으로, 십계명이 귀양살이하는 백성에게 하느님의 보호를 받고 하느님과 친분을 맺게 해 주는 보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십계명 외에도 하느님의 역사적인 위대한 업적들이, 어떤 때는 고통스럽고 슬플지라도,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계심을 증거하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은 이국 땅 멀리에서도 계약을 저버린 당신 백성을 계속 자극하고 격려하고 죄악에서 벗어나게 하고 해방시켜 거듭 새로운 백성으로 만들고, 동시에 다른 백성들에게도 하느님의 위대하신 업적들을 드러낸다.

이국땅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이 지닌 위력이 드러나 하느님께서 다시 개입하시리라는 희망을 불러일으킨다.

14절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이 위격화(位格化)하여 마치 이스라엘 백성 가까이 계시는 어떤 분처럼 된다(지혜 7,22 이하; 잠언 8,22 이하).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요한의 신학(요한 1,1 이하)과 바오로의 신학(로마 10,6-8)은 이렇듯 오랜 과정을 거쳐 준비되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마음과 양심 속에서 끊임없이 당신 말씀을 건네고 계신다. 그 말씀을 충실히 따르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화답송(시편 69[68],14와 17.30-31.33-34.36ㄱㄴ과 37[◎ 33 참조]) 해설

<가난한 이들아, 하느님을 찾아라. 너희 마음 기운 차려라>


부당하게 모함을 받고 고발당하는 외로운 사람이 자기 고통스런 체험을 하소연하는 시편이다. 이 시편은 오로지 하느님께만 자기네 희망을 걸고 있는 ‘주님의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상태를 인상 깊게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자비롭고 사랑에 넘치시는 하느님께서 가진 것 없고 미약한 자기들을 돌봐주고 풍요롭게 해 주시리라 굳게 믿는다.


제2독서(콜로 1,15-20) 해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다>


이 찬미가로써 바오로는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 창조되지 않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수위성(首位性)을 높이 찬양한다. 15-17절에서는 창조된 만물 가운데서 가장 높으신 그리스도의 수위성을 찬양하고, 18-20절에서는 세상을 구속하시는 사업에 그리스도께서 차지하시는 수위성을 찬양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가지고 계시는 품위는 ‘하느님을 그대로 반영하는’ 당신 존재로부터 나온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을 완전히 계시하는 분이며, 하느님께서 과연 어떤 분이신가를 당신 생애로 똑똑히 드러내는 분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지혜’에게 붙여진 것과 똑같은 칭호들을 가지고 계신다(지혜 7,26). 그리스도께서는 지혜와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실 적에 이미 계셨고(잠언 8,22-31)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계셨다(집회 24,8; 요한 1,1-14).

예수께서는 또한 ‘맨 처음 태어나신 분’, ‘맏이’라고도 불리신다. 그 뜻은 창조된 만물을 지배하는 분, 만물이 생겨난 원인(요한 1,3), 창조된 만물의 기초요 중개자요 시작과 끝이시라는 말이다.

찬미가 첫 부분에서, 바오로는 창조된 만물이 좋고 의미로 가득 차 있다고 강조한다. 사람의 정신과 마음은 창조주의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발견할 수가 있고(로마 1,20), 창조주의 영원한 권능과 신성을 감지할 수가 있다. 창조된 세계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광을 자기 종점으로 삼고 있으며, 썩어 없어질 운명에 처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에 참여하는 복된 운명을 타고났다(로마 8,20-22).

찬미가 둘째 부분에서, 바오로의 시선은 새로운 백성의 우두머리요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로 향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당신 신비체가 될 새로운 인류가 생겨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처럼 먼저 수난과 죽음을 통과하고 영광스런 부활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맏이가 되신다(1고린 15,20-23).

그것은 하느님께서 사람이신 예수님을 당신의 온전한 신적 충만함으로 풍요롭게 하신 사실에서 비롯된다. 풍요로워진 인간 예수께서 모든 사람들 사이에 깊은 유대를 맺어 주신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사람은 하느님과 화해와 평화를 이루게 되고 자기들끼리도 화해와 평화를 이루게 된다(로마 5,10-11).

결국,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로써 그 화해가 이루어진 것이며, 예수님의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흘리는 땀과 피로써 하느님과 그리고 모든 사람들끼리의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복음(루카 10,25-37) 해설

<내게 가까운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는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다. 진심으로 하느님을 애타게 기다리며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셨다.

율법학자 한 사람이 자기 지식을 뽐내면서 예수님께 이론적인 신학적 질문을 던져온다. 그 율법학자는 자기들 사이에 쟁점이 되어 있는 그 질문을 예수님께 던짐으로써 어느 쪽 입장을 취하는지를 알고 싶어 한다.

스승 예수께서는 그 의도를 알아차리고, 자기가 옳다는 식의 부질없는 이론적인 입씨름을 물리치면서, 이웃이란 누가 되었든 어디서든 도움과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고 간단명료하게 답변하신다.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사는 사람을 제쳐놓고 ‘이웃’에 대하여 막연한 추상적인 이론적 개념을 만들려 함은 맞지 않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람 하나하나를, 모든 사람을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 아들을 보내시어 생명까지 바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보여 주신 그 같은 사랑이 모든 사람이 실천해야 할 사랑이다. 하느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악마의 세력에 사로잡혀 기진맥진해 있는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서 그냥 지나치시지 않고 당신 아들을 보내어 정성껏 돌봐 주고 치유해 주신다. 이 같은 하느님의 사람 사랑을 사람들끼리 서로에게 베풀 때, 사람들은 서로에게 진정한 이웃이 되는 것이다.

강도에게 당한 사람을 정작 도와준 사람은 동족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이웃’이란 혈연, 친구, 민족, 나라를 뛰어넘어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무수한 사람을, 하느님처럼 그리스도처럼, 있는 모든 것과 생명까지 바쳐 도와주고 구해 내는 사람이다. 사람을 단순히 귀중한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 이익을 계산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서, 당하고 궁핍하고 병든 사람이라면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내 나라 사람이든 다른 나라 사람이든 흑인이든 백인이든 정성껏 돌보고 구해 주는 사람이 진정한 이웃이다. 모든 사람이 그런 진정한 이웃이 되어 서로 위해주는 것이 이웃사랑, 사람사랑이다.


묵상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않고 섬기러 왔다>


그리스도께서는 땅 위에서 황제처럼 뭇 사람들로부터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않고, 그와 반대로 뭇 사람들에게 당신 모든 것과 당신 생명까지 바쳐 섬기러 오셨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 목숨을 바치셨듯이, 사람은 모름지기 형제자매인 다른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바쳐야 한다(1요한 3,16). 빼앗고 우쭐대는 삶이 아니라, 바치고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야 그리스도의 삶을 이어가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 속에 그리스도의 생명이신 성령께서 머물러 계시며, 한 성령을 모신 그 사람들은 수없이 다양한 형태로 그리스도의 삶을 이어가지만, 똑같은 성령을 생명으로 모신 유기체인 그리스도의 신비체를 이루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당신께 속한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신다. 모든 사람이 당신이 모범을 보이신 그대로 ‘바치고 섬기는 삶’을 살아가게 만들려고 하신다. 모든 사람이 신비스럽게 당신과 결합하여 한 몸이 되고 당신처럼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신다. 그러나 그 공동체는 아직 완성되지 않고 끊임없이 자라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야 자기의 영광스러운 본 모습을 만천하에 드러내면서 온 인류를 하나 되게 하고 한 마음 되게 하여 자기 안에 감싸 안으면서 완성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끝 날까지 당신처럼 ‘하느님의 나눔의 정의와 용서하는 위대한 사랑’을 역사현실 안에 실현하기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 내걸고 몸 바치는 무수하고 다양한 사람들의 공동체를 통하여 당신의 인간구원과 인류구원 사업을 힘차게 펼치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섬기기 위하여 아버지의 손에 당신 자신을 고스란히 내드리고 맡겨드림으로써 당신 사명을 끝까지 완수하셨다. 그리스도께서도 이사야서에 나오는 ‘종’처럼 되셨다(53,10 이하). 당신 제자들 사이에서도 마치 ‘시중드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제자들 발까지 씻어 주셨다(참조. 루카 22,27).

이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민족과 인류를 구원하고 해방하는 방법은 “종처럼 되는 것이고, 시중드는 사람처럼 되는 것이며, 발까지 씻어 주는 사람처럼 되는 것이다.” 이것은 속된 사람들이 품은 마음씨나 생각과는 영 딴판이다. 자기 욕심과 안일만 차리고 남들이 자기를 알아주기를 은근히 바라고 남들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의 생각과 정반대다. 그리스도의 신비체요 공동체인 하느님 나라는 오로지 ‘섬김’에 의해서만 자란다.


<우리는 ‘종’이요 ‘도구’일 따름이다>


바오로는 자기가 ‘예수님의 종이며 형제들의 종’이라고 말한다. 자기는 예수님 때문에 모든 사람의 종이 되기로 했다고 말한다(2고린 4,5). 따라서 바오로는 스승 행세를 하지도 않고 명령을 내리지도 않는다(2고린 1,24). 사람들로 하여금 아버지와 관계를 맺어 진정으로 살게 해 주는 분은 자기가 아니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똑똑히 알고 있으며 결코 잊지 않고 있다. 바오로는 구출해 주고 해방하여 주시는 분은 언제나 오직 주님뿐이심을 강조하기 위하여 자기 약점을 스스럼없이 감추지 않고 드러낸다(2고린 11,30; 12,5.9).

그리고 바오로는 신자들에게 행동규범을 제시해야 할 경우에도,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처신하고 행동하셨는가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스도교 윤리는 인위적인 규범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고 연장시키는 것이다. ‘섬기고 바치고 나누고 함께 사는 친교와 기쁨에 넘치는 공동체 건설’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바오로나 다른 어떤 사람도 어디까지나 ‘종’과 ‘도구’의 역할을 할 뿐이다. 그런 위대한 공동체를 건설하는 일은 종과 도구에 지나지 않는 사람 자체의 자격과 능력을 무한히 뛰어넘는 영원한 가치를 지닌 사업이다. 따라서 최선을 다한 다음에도 자기가 그 위대한 공동체 건설의 주체인 양 내세우거나 자랑해서는 결코 안 된다. 바오로나 베드로나 다른 어떤 사람도 자기 노력이나 수고를 마치 하느님 앞에서 무슨 자격이나 권리처럼 자랑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람은 그리스도를 뛰어넘을 수 없고, 다만 충실히 섬길 수 있을 뿐이며,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 외에 줄 수 있는 그 무엇도 가진 것이 없다. 자기 자신과 목숨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바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종과 도구가 되고, 그런 사람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생명인 성령께서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시며, 자신이 ‘스스로는 무가치함’을 알고 인정하는 겸허한 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안겨주고 당신과 더불어 당신의 자격을 나누어 받게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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